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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귿(D)
작품등록일 :
2023.03.19 14:06
최근연재일 :
2023.04.20 09:50
연재수 :
33 회
조회수 :
781
추천수 :
7
글자수 :
93,076

작성
23.04.02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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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쪽

13. 언니, 언니! 한국사람, 한국 사람이에요!

DUMMY

WYD 행사가 끝나고 2달의 해외여행을 계획할 때 안전과 편리를 위해 선택한 것 중 하나가 전투화였다. 제대할 때 신고 나온 전투화는 보관 실수로 신을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다. 매년 있는 예비군 훈련에 등산화로도 신을 생각으로 사제 간부용 전투화를 구입해 순례길에서도 함께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요즘 말썽이다. 오른쪽 전투화 발가락 위쪽이 구부러지며 주름이 잡혔는데 그 주름이 엄지발가락을 지속적으로 찍어 눌렀다. 하루종일 충격을 받은 발가락에 작은 상처가 생긴 건 약 닷새 전이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약만 발랐는데 같은 상황이 매일 지속되니 밤사이 조금 아문 상처는 다음 날 다시 깊어졌고 며칠간 반복되니 고통이 상당할 정도로 상처가 커져 버렸다. 이제는 걷는 것 자체가 고통이다. 휴지를 굵게 접어 오른쪽 발가락을 감싸고 양말을 신었다. 이렇게 버티다 보면 언젠간 상처가 낫겠지.


계획은 실패다. 하루에 20km는 너무 짧다. 4시간도 안 걸리는 거리를 걷기엔 하루는 또 너무 길다. 더군다나 어제 계획보다 10km나 더 걸은 탓에 모든 계획이 틀어졌다. 계획을 다시 짜는 게 의미가 있나? 그냥 매일매일 상황에 맞게 결정하는 게 낫지 않을까? 생장에서 받은 안내지를 보니 적당한 거리의 마을은 보아디야 델 카미노(Boadilla del Camino)였다. 하지만 이 지겹고 마른 땅을 조금이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도착시간에 따라 6km 더 떨어진 프로미스타(Fromista)까지 갈 생각도 가졌다. 그나저나 산티아고에 예상보다 며칠은 일찍 도착할 텐데 큰일이네.


혼자 걸으니 많은 것이 달라졌다. 간단한 순례자들의 인사 후 자연스럽게 영어로 말을 걸어오는 외국인과의 대화는 지속되지 못했다. 지금까진 일행들이 대화를 나누고 알아들을 수 있는 한두 마디로 고개를 주억거리거나 통역을 부탁했었지만 혼자선 영어로 대화할 수준이 되지 못했다. 게다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조건 자체도 형성이 되지 않았다. 수정이나 루다의 걸음에 맞출 때는 속도가 보편적이었다. 때론 누군가를 추월하고 누군가에게 추월을 당할 때도 있으며 속도가 비슷한 사람과 지속해서 같이 걷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혼자 걸으니 앞서 걷는 이를 앞지르는 경우는 있어도 뒤에서 걷던 이의 뒷모습을 보게 되는 경우는 생기지 않았다. 식사는 처음 다짐처럼 빈곤으로 돌아왔다. 주방의 재료를 확인하는 건 여전하지만 구입은 최소화됐다. 공동으로 구매해 돈을 나눌 때와 달리 비슷한 수준이라면 지출은 2배를 넘겨야 했다. 걸을 때나 목적지에 도착해 휴식을 취할 때나 식사를 할 때 대화를 나누고 공감과 의지할 수 있는 동료가 사라진 쓸쓸함은 생각보다 컸다.


익숙한 뒷모습이다. 체형은 분명 동양인이고 복장은 한국인이다. 카미노 패션인 걸까? 등산복에 등산화, 양손에 들려있는 스틱까지 전형적인 한국인의 복장이다. 등산복이나 등산화를 한 번도 입고 신어 본 적이 없어서 그 편리함을 논하긴 어렵지만 유독 한국인만 전형적이 등산 복장이다. 그리고 대부분 새 옷이라는 게 더 신기하다. 편견이라면 편견이겠지만 한국인을 알아보는 가장 쉬운 방법임은 확실하다.


“안녕하세요.”


마을 입구에 설치된 큰 안내판을 보며 길을 확인하던 세 사람은 갑작스러운 한국말에 놀라며 뒤를 돌아보며 반갑게 인사했다. 하지만 내 걸음은 여전히 앞을 향했고 그들과 짧은 인사는 그렇게 순식간에 마무리됐다. 익숙함의 소멸이 만든 쓸쓸함 역시 일시적일 뿐 새로운 환경에 익숙해지면 없던 것처럼 사라진다. 새로운 인연, 새로운 일행의 필요성은 이제 없다.


어젠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왜 갑자기 이렇게 많아진 걸까? 대부분 수정과 루다처럼 그 지겨운 길을 버스로 건넌 걸까? 100km 정도라고 했으니 아직 메세타가 끝난 건 아닐 텐데 어디서 갑자기 나타났는지 행렬에 가까운 인파가 언덕을 오른다. 하나둘 추월을 하는 재미가 나름 쏠쏠하다. 간단히 올라, 부엔 카미노 인사하며 그들을 지나치는데 또 익숙한 뒷모습이다. 멀지 않은 거리를 사이에 두고 각자의 걸음대로 걷고 있는 세 여자는 모두 한국인으로 보였다. 갈 길도 멀고 스치는 인연 굳이 한국말로 인사해 대화를 나누거나 하고 싶지 않았다.


“올라, 부엔 카미노.”


체력이 한계에 달했는지 40대로 보이는 여자는 고개도 거의 들지 못하고 인사에 간신히 대답하며 힘겨운 걸음을 옮겼다. 키가 큰 두 번째 여자를 지나치며 인사를 하는데 고개를 돌려 마주 인사하는데 예쁘다. 와! 얘는 여기 왜 있지? 수정이 얘기하길 이 길에서 자신들보다 예쁜 여자는 없을 거라 했다. 예쁜 여자가 왜 이런 고생을 하러 이곳에 오냐는 그 말에 공감했는데 상식이 파괴되는 순간이다. 해맑게 웃으며 인사하는 여자를 앞지르는 순간 뒤에서 놀람을 감추지 못한 탄성이 들렸다. 그리고 바로 뒤에서 힘겹게 걷던 여자를 속삭이듯 불렀다.


‘언니, 언니! 한국 사람, 한국 사람이에요!’


안 들릴 거로 생각했을까? 너무 또렷이 들려 순간 웃을 뻔했다. 근데 저 여자는 어떻게 알아차린 거지? 아······. 생장을 출발할 때, 아니 그 이전 홀로 스위스를 걸을 때부터 배낭에 태극기를 두르고 있었다. 국가에 대한 자긍심이나 애국심 같은 순수한 의도완 거리가 멀었다. 그저 영어 한마디도 제대로 못 하는 가난한 여행자에게 동포임을 보이거나 한국에 대해 긍정적 시각을 가진 이들의 사소한 도움이라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지극히 계획적이고 계산적인 의도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얼굴로는 확인이 어려운-한국인임을 확인시켜주는 용도로 변질되어 있었다.


등 뒤에서 놀라움을 표현하는 두 여자의 속삭임이 들렸지만 애써 모른 척하고 마지막 관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번에도 빠르게 인사하고 지나치려는데 먼저 고개를 돌리며 ‘안녕하세요.’ 인사한다. 동료가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은 거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인기척만 느끼고 바로 한국말로 인사할 리가 없지. 여자는 자연스럽게 대화를 시도했다. 태극기를 배낭에 두른 이유나 출발한 날짜, 카미노를 걷는 동기 등 처음 만나는 이들끼리 나눔 직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다행히도 쉬었다 간다는 고마운 말로 짧은 인연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괜한 선택이었을까? 엄지발가락을 감쌌던 휴지는 돌고 돌아 발바닥에 머물러 다시 전투화의 공격에 상처가 노출되고 오래 걸을 때마다 찾아오던 발바닥의 고통은 유독 심해 절룩일 수밖에 없었다. 그냥 보아디야 델 카미노에 도착했을 때 멈출 걸 그랬나 하는 후회가 머리를 가득 메웠다. 안내지에 나온 마을 간 거리가 잘못된 건지 생각했던 것보다 걸음이 빠른 건지 12시도 안 되어 도착해 6km밖에 되지 않는 걸음을 선택한 것인데 고통에 주저앉고 싶은 마음뿐이다. 그래도 쉴 순 없다. 정해진 목적지가 있다면 휴식으로 고통의 시간이 길어지는 것보다 최대한 일찍 도착해 고통의 시간을 줄이고 휴식 시간을 늘리는 게 낫다. 고통의 지속에 휴식을 포함한다 해도 총량은 변하지 않는다. 의학적 과학적 근거와 무관한 내 성격일 뿐이다.


결국 참을 수 있는 수준의 고통이었다. 쓰러지고 싶고 주저앉고 싶다던 외침은 어리광에 지나지 않았다. 숙소 앞에 도착해 문이 열리기까지 20여 분이 남았으니 쓰러져야겠지만 슬리퍼로 갈아 신고 우표와 엽서를 사러, 성당 구경하러 돌아다닌다. 발가락에서 흐른 피로 양말은 붉게 물들었지만 돌아다닌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원효대사의 해골 물 일화로 잘 알려진 얘기다. 잘못 사용하면 모든 상황을 마음이 지어낸다며 일방적으로 몰아갈 수도 있는 내용이지만 이럴 땐 정말 어울리는 표현이다. 아니면 꾀병이었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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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말

저 때는 왜 한국사람으로 안 보는지 이해가 좀 안 됐는데... 한국 와서 사진 뒤져보니 알겠더군요ㅋㅋ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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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후기라기엔 민망하지만.... 23.04.20 20 0 1쪽
32 30 이번엔 꼭 찾아요. 23.04.19 19 0 4쪽
31 29. 산티아고 23.04.18 15 0 4쪽
30 28. 상처받지 않게 하소서. 23.04.17 18 0 8쪽
29 27. 술래잡기 23.04.16 18 0 6쪽
28 26. Now is miracle(기적과 함께) 23.04.15 26 0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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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24. 이렇게 해보고 싶었어요. 23.04.13 14 0 8쪽
25 23. 기적의 성당 23.04.12 15 0 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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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언니, 언니! 한국사람, 한국 사람이에요! 23.04.02 24 0 8쪽
14 12. 떨칠 수 없는 그림자와 지평선 23.03.31 20 0 7쪽
13 11. 미안해요. 미안해요. 23.03.30 20 0 9쪽
12 10. Why are many Koreans coming here?(한국인은 여길 왜 그렇게 많이 오는 거야 23.03.29 20 0 4쪽
11 9. 이 길처럼 노란색 화살표가 제가 갈 길을 알려줬으면 좋겠어요. 23.03.28 20 0 6쪽
10 8. 방금 오빠한테 고백하는 건가요? 23.03.27 20 0 8쪽
9 - 시나브로 23.03.26 23 0 4쪽
8 7. 그냥 오빠한테 시집 올래? 23.03.25 24 0 8쪽
7 6. 오빠 모르셨어요? 23.03.24 25 1 12쪽
6 5. 일행(日行)을 위한 일행(一行)인지, 일행(一行)을 위한 일행(一行)인지 23.03.23 28 1 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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