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이렇게 해보고 싶었어요.
식사 전부터 시작된 일정에 대한 논의는 적당한 식당을 찾아 배회하고 식당에 들어가 식사가 끝날 때까지 이어졌다. 좀 더 원활한 대화를 위해 인터넷 정보를 활용할 목적으로 WIFI가 되는 식당을 찾았으나 식당 직원과의 소통 문제인지 사기를 당한 것인지 WIFI를 이용할 수 없었다.
일정에 대한 논의가 길어진 것은 상대방을 강제하거나 서로의 일정을 맞추는 조율 때문이 아니라 확실한 계획에 대한 부재가 원인이었다. 각자 새로운 일정을 이미 정하고 있었기에 그에 대한 부분은 서로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준영과 혜수는 속도를 높여 조금이라도 빨리 산티아고에 도착해 묵시아(Muxia)를 거쳐 피스테라(Pisterra)까지 100km를 더 걷기로 마음먹었다. 비슷하게 일정을 소화하던 민아는 함께 하고 싶지만 체력이 안 될 것 같아 고민하고 순영 누님은 처음부터 목표를 산티아고로만 잡고 있었기에 이후 유학하던 아일랜드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며칠 전부터 동행이 된 창연과 나는 산티아고에 도착 후 피스테라는 버스로 다녀오고 포르투갈로 향할 생각이었다. 혜수와 준영을 제외한 일행에게 필요한 버스 시간표와 가격, 산티아고에서 묵을 숙소와 순영 누님을 위한 산티아고 공항 정보 등 많은 것들이 필요했지만 인터넷을 할 수 없는 관계로 포기하고 작별 전 마지막 식사를 무난하게 즐겼다.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각자 고민하며 숙소로 향하는데 식당 안에서 식사를 즐기고 있던 전 일행과 눈이 마주쳤다. 간단히 인사하고 WIFI 여부에 관해 묻는데 식당 안에서 잘 안 들렸던지 수정이 밖까지 나왔다. 식당 불빛만이 거리를 비추는 어두운 밤거리에 수정과 단 둘뿐이다. 이젠 지웠어야 할 설렘이 찾아온다. 자연스럽게 발걸음이 식당 안에서 보이지 않는 사각을 향했다. 음식 맛이나 앞으로 일정 등 지극히 평범한 대화를 나누면서 몸을 숨긴 건 다른 의도 없이 그들의 눈치를 보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런데 대뜸 수정이 가슴에 불을 지폈다.
“다른 사람들 눈치 보느냐고 제대로 이야기 못 해서 힘들었어요.”
또 생각 없이 얘기해서 사람 마음을 싱숭생숭하게만 하려는 건지 진심인지 헷갈린다. 감정을 조절해야 하는지 감정이 흐르는 대로 맡기고 끌려가야 하는지 헷갈리고 있는데 덥석 품에 안겨 왔다.
“그동안 너무 보고 싶었어요.”
지금까지 수정에게 품었던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들이 한 번에 날아가는 순간이었다. 분명 다시 상처받을 수 있다고 사람은 쉽게 변하지 못한다며 정신을 붙잡으려 했지만 먼바다의 외침처럼 감정의 파도에 삼켜져 사라졌다.
“이렇게 한번 해보고 싶었어요.”
당황해 말도 잘못하는 나와 달리 수정의 행동은 직선적이었다. 다른 이들이 볼 수 없는 어둠 속에서 품에 안긴 수정의 온기는 따뜻하고 포근했다. 부르고스에서 헤어진 후 수정 일행은 내가 계획했던 어느 마을 어느 숙소에 묵게 됐다. 내 일정을 참고하겠다며 적어갔으니 며칠 후 도착할지 알고 있던 수정은 알베르게 관리인에게 쪽지를 하나 남겼다. 며칠 뒤 한국 국기를 배낭에 두른 남자 순례자가 올 건데 그에게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나는 그곳에 들리지 않았다. 힘겹게 세운 계획이 그렇게 쉽게 깨질 것이라곤 수정이나 루다는 물론이고 나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정오 무렵 목적지 도착 직전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상상도 못 했던 인물을 본 수정은 소리 지를 뻔했다. 메세타도 버스로 넘고 일정 때문에 버스를 한 번 더 탔기에 다시 만날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눈앞에 나타났을 땐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쪽지가 전달되지 못했을 가능성을 높게 잡게 됐다.
“쪽지엔 뭐라고 적었어?”
마치 오랜만에 다시 만난 연인처럼 여전히 따뜻하게 안겨 지난날을 떠올리던 수정은 쪽지 내용에 관한 질문에 모른다는 쑥스러운 대답만 남기고 식당 안으로 도망쳤다.
믿지 말자. 다신 속지 말자. 조금 전엔 갑작스러운 공격에 당황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오랜만에 느낀 온기를 내가 착각한 것뿐이야. 감정에 속지 말고 현실이란 즐거움에서 멈추자. 상처받지 않으려는 겁쟁이의 자기보호 본능이란 걸 안다.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을 향해 손을 뻗고 다시 상처 입고 싶지 않은 겁쟁이. 하지만 그게 최선이다. 시간이 지나면 결국 감정도 기억도 옅어질 테니 그게 최선이다.
안구가 바짝 마른 듯 뻑뻑하고 따갑다. 눈을 감고 있어도 시간이 흘러가는 것만 느껴질 뿐 잠에 빠지지도 않는다. 피곤에 쓰러질 만큼 힘든 걸음도 아니었지만 나름 언덕도 있고 지칠 만큼 걸었는데 잠이 전혀 오질 않는다. 피곤의 문제가 아니라 옆 침대 2층에 누워있을 그녀석 때문이다. 저 무신경한 여자는 이 상황에서 잘도 자는구나. 자기가 뱉은 말과 행동이 상대에게 어떻게 들리고 보이는지 모르니 저렇게 잘 수 있겠지. 멍청한 건지 알고도 일부러 그러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그래서 더 답답하다.
잠깐 잠이 들었던 걸까? 침대가 흔들리는 통에 깬 것 같은데 사다리를 타고 천천히 사비나 아주머니가 바닥으로 내려왔다. 마침 옆 침대에 누웠던 루다도 일어나 배낭 속에서 뭔가를 챙겨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갔다. 이른 새벽에 간단한 아침 식사 후 최대한 일찍 알베르게에 도착할 수 있도록 출발하고 있다던 얘기는 들었지만 이렇게 이른 시간에 일어날 줄은 몰랐다. 시계를 보니 3시 30분이다. 한참을 뒤척이며 어렵게 잠든 것치곤 눈이 너무 맑다. 당장 잠들긴 틀렸구나. 억지로 잠에서 깬 짜증에 깊은 한숨을 내쉬는데 옆 침대가 흔들리며 수정이 바닥으로 내려온다.
“오빠, 자요?”
한숨 소리로 안 자는 것을 눈치챈 건지 수정은 작은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 고개를 돌리자 한참 전부터 잠을 안 자고 있었던 것처럼 멀쩡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바람 쐬러 갈래요?”
도대체 잠들기 전 지키지도 못할 그 부질없는 다짐은 왜 했던 건지······. 망설임 하나 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처음 맡아보는 이른 새벽의 공기는 생각 이상으로 차가웠다. 얇은 외투를 걸치고 나왔지만 그것만으로 견디기 어려운 찬바람에 자연스럽게 서로를 끌어안았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온기를 나누기 위한 선택은 굳이 대화로 이어지지 않았다. 짧은 몇 마디의 대화가 오갔지만 검은 하늘을 흐르는 구름과 은하수, 날씨에 대한 의미 없는 표현일 뿐 대화라 부를 만한 건 아니었다. 쉬지 않고 불어오는 차가운 새벽바람이 몸을 훑을 때마다 마주 안은 온기가 더욱 강하게 느껴진다. 상대의 심장 소리가 느껴지고 내 온기가 상대를 통해 다시 느껴질 수 있다는 사실도 처음 알게 됐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체온이 떨어져 추위를 이겨내기 점점 힘들어져 온전히 서로의 온기를 나누고 느끼는 시간은 길 수 없었다.
자리에 누운 수정의 숨소리는 이내 바뀌었다. 계속 잠을 안 자고 있다 긴장이 풀린 건지 작게 코까지 곤다. 차라리 바로 잠들면 이 복잡함을 조금이라도 덜 느낄 텐데. 과거의 기억과 달라진-달라졌다고 믿고 싶은 수정의 행동, 변하지 않은 내 감정과 수정이 늘 얘기하던 산티아고의 기적이 한 대 어울려 다시 머릿속을 헤집기 시작했다. 아··· 잠자기 글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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