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나브로
이 길에 첫발을 디딜 때만 해도 길을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도 몰랐다. 가리비 표시만 따라가면 된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모든 갈림길에 가리비 표시나 이정표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바닥에 장난스럽게 그려진 노란색 화살표뿐이었다. 이놈들은 아무리 낙서를 좋아해도 그렇지 이런 산속까지 들어와서 바닥에 낙서를 하나? 그것도 이렇게 볼품없게? 생장을 떠나 피레네 산을 넘을 때 아스팔트 바닥에 그려진 그 노란색 화살표가 방향을 알려준단 사실은 론세스바예스에 도착해서야 알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이 길을 걷는 사람이면 당연히 준비하는 과정에서 알 수밖에 없는 사소한 것들도 나만 모르고 있었다. 과연 이런 놈도 산티아고까지 무사히 갈 수 있는 걸까? 하지만 걸음은 누구에게나 허락된 것이었고 알든 모르든 걸음은 다른 순례자들과 같은 방향으로 향했다. 그들과 비슷한 일상을 보내고 비슷한 시간을 보내는 동안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많은 것들이 익숙해졌다.
목적지에 도착해 씨에스타가 시작되기 전 간단하게 점심 식사를 한다. 할 줄 아는 요리라곤 냄비 밥이나 간단한 찌개 몇 가지의 한식뿐이지만 이곳에서 다른 순례자들의 요리를 어깨너머로 나마 배워 매일 다른 메뉴로 요리를 했다. 메뉴 선택과 재료는 알베르게에 도착하자마자 주방 탐색 후 결정할 수 있다. 이전에 묵었던 순례자들이 사용하고 남기고 간 재료들의 양을 확인해서 스파게티 면이 많으면 스파게티를, 쌀이 많을 땐 쌀밥과 다른 재료를 더 해 반찬을 만들었다. 돈과 시간을 줄일 수 있는 이 방법 역시 누구에게 배운 게 아니라 과정속에서 자연스럽게 얻어진 결과였다. 씨에스타를 느긋한 휴식으로 보내고 저녁 식사와 간단한 음주 혹은 휴식을 취한다. 호흡을 맞춰 누군가와 걷고 함께 평범한 일상을 공유하는 것은 일부러 거부하고 부정하던 것들인데 이마저도 걸음 속에서 어느샌가 익숙해져 있었다.
생장에서 받은 마을 간 거리와 알베르게 정보 등이 담긴 안내지를 이용해 계획을 세우는 것도 누구에게 배우지 않았음에도 언제부턴가 자연스럽게 활용하고 있었다. 그 방법이란 게, 먼저 남은 일정을 상정하고 그 날짜에 맞춰 대략 하루에 걸을 거리를 정한다. 만약 600km에 30일의 시간이 남았다면 하루에 걸을 수 있는 거리는 대략 20km 정도이다. 마을 간의 거리는 천차만별이다. 어떤 곳은 3km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 있는가 하면 어떤 곳은 20km도 넘게 떨어진 곳이 있다. 그렇기에 마을 간 거리를 합쳐서 계획된 거리를 맞추다 보면 어떤 날은 20km를 훌쩍 넘기거나 20km에 한참 못 미치는 거리를 걸어야 하는 날도 올 수 있다. 그런 것들은 몇 번의 수정을 거치다 보면 대략적인 계획이 나오는데 기간과 상황에 여유가 있는 준영은 크게 연연하지 않았고, 수정과 루다는 아직 확실한 결정을 못하고 있었다. 일행 중 남은 일정이 가장 여유롭지만 그 일정 보다 일찍 끝내기도 부담스럽던 탓에 일찌감치 앞으로의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는데 수정과 루다가 아직 확정되지 않은 자신들의 일정에 참고한다며 내 일정을 적어갔다.
아이러니하다. 아무것도 몰라 질문하고 도움만 받던 무지렁이가 이젠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 남들보다 뛰어나거나 적응을 잘해서? 아니다. 똑같다. 다르다면 체력이 조금 좋고 빨리 걸을 수 있다는 사실과 나이 말고 일행과 차이는 거의 없다. 도리어 영어를 거의 하지 못해 외국인들과 대화를 할 수 없는 내 입장이 훨씬 불리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여기 있다. 나뿐 아니라 모두 각자의 걸음을 걸어 이곳에 있다. 시작이 어떠했든 과정이 어떠했든 누가 더 뛰어나고 대단할 것 없이 시나브로 각자의 방식과 특성대로 익숙해지고 성장하고 있었다.
- 작가의말
2014년 사진만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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