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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귿(D)
작품등록일 :
2023.03.19 14:06
최근연재일 :
2023.04.20 09:50
연재수 :
33 회
조회수 :
946
추천수 :
7
글자수 :
93,076

작성
23.03.31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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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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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쪽

12. 떨칠 수 없는 그림자와 지평선

DUMMY

어둠은 여전했다. 시계를 보니 이제 막 6시를 넘겼다. 어젯밤 일이 꿈일까? 와인 한 병 반에 장자의 낮잠처럼 나비가 되는 꿈이라도 꾼 걸까. 꿈이라기엔 너무 생생하다. 그렇다면 바라던 것이 이루어졌다고 봐야겠지? 어서 아침이 왔으면 좋겠다. 수정이 잠에서 깨어 어젯밤 일이 꿈이 아니었음을 확인받고 싶었다.


조심스럽게 사다리를 타고 내려왔건만 80kg이나 나가는 남자의 무게는 침대를 흔들기에 충분했고 그 작은 움직임에 수정의 잠을 깨웠다. 화장실에 다녀온 윗자리 사내를 수정은 자연스럽게 옆자리로 당겼다. 그리고 과감한 입맞춤으로 아침 인사를 대신했다.


감정을 공유할 때의 첫 입맞춤이 얼마나 달콤한지 잘 알고 있다. 늦게 알게 된 그 달콤함에 깊이 빠진 건지 수정은 입을 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어젯밤의 격렬함과 달리 부드럽게 행위 자체의 온기를 원하는 듯한 수정의 입술을 받아들이고 있는데 불길한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오늘 갈 길이 먼 준영은 아침 일찍 출발한다고 했는데 그의 인기척인 것 같았다. 서둘러 침대 2층으로 올라갔다. 역시 예상대로 짐을 전부 챙긴 준영이 작별 인사를 하러 온 것이다. 간단한 인사와 재회를 기약하며 준영은 먼저 산티아고를 향해 떠났다.


수정과 루다는 오후에 버스를 타고 메세타를 넘을 계획이었기에 이제 내가 떠날 차례다. 아직 일정이 많이 남은 탓에 매일 20km 정도의 짧은 거리를 걸어야 하니 일찍 떠날 필요는 없지만 서서히 준비를 시작했다. 하룻밤 사이에 아쉬움도 여운도 사라졌다. 다시 만날 기약의 필요도, 관계를 고민할 필요도 없으니 준비하는 마음이 여유로웠다.


모든 준비가 끝났다. 이제 배낭만 메면 되지만 최대한 늦게 출발해야 할 이유가 너무 많다. 수정과 나란히 침대에 걸터앉았다. 이제 관계를 확실히 할 때가 됐다. 조금 떨리지만 그건 불안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그토록 바라던 것을 얻기 전 찾아오는 지극히 당연한 설렘이었다.


“아뇨. 연애는 하고 싶지 않아요. 다시는 연애나 헤어짐으로 상처받고 싶지 않아요.”


잘못 들었나?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분명하고 확실한 목소리로 말하니 더욱 믿기지 않았다. 그럼 어젯밤의 행동은? 오늘 아침의 행동은? 술은 내가 먹었는데 얘가 취했나? 아니면 그저 그 행위만을 원했던 걸까? 뭐가 됐든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화가 나고 불쾌했다. 더는 함께 자리하고 싶지 않았다.


앞으로 한 시간 후에 출발해야 예상한 시간에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지만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며칠 동안 사람을 가지고 논 사람과 함께 있을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그간의 인연으로 마지막 예의로 작별 인사를 건네는데 가슴에 안긴다. 뭐야? 이 또라이는··· 더군다나 키스까지 바란다. 미친년이었구나. 내가 미친년한테 낚였었구나. 팔을 뿌리쳤다. 루다와 인사를 마지막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어떻게든 복잡한 심경을 잊어보려 기도도 하고 사람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벌판에선 노래도 불렀지만 쉬이 떨치지 않았다. 그곳에 다 두고 오자. 꽃이 예뻐서 꺾었더라도 그곳에 버려두고 가자. 뒤돌아보지 말자. 애써 얻은 결론 아무 소용이 없다. 그림자처럼 잠시 숨을지언정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감정은 있고 그 감정에 의해서 키스는 할 수 있지만 연애는 하고 싶지 않다는 게 도대체 뭔 개소리냐고. 백번 양보해서 그럴 수 있다고 치자. 그래. 그럴 수 있어. 그럼 사람인 이상 최소한의 예의라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어떻게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뱉고서 키스를 바랄 수 있는 거지? 경험이 없다는 것도 거짓말이고 그저 키스에 미친년인가? 확실히 제정신이 아닌 건 분명해. 그래. 내가 똥 밟은 거야.


떨칠 수 없는 기억의 흔적에 괴로워하는 사이 조용한 시골 마을이 눈앞에 나타났다. 오르니요스 델 카미노(Hornillos del Camino). 부르고스에서 20km 떨어진 오늘의 목적지였다. 계획보다 부르고스에서 일찍 출발하긴 했지만 그래도 12시 정도에 도착할 거라 예상했는데 이제 고작 11시를 갓 넘어가고 있었다. 그동안 수정의 걸음에 맞추며 걸은 덕에 내 걸음을 잊고 있었다. 마을 중앙 분수대를 돌아 성당 옆 알베르게는 이제 막 청소에 한창이다. 적어도 2시간은 기다려야 알베르게에 들어갈 수 있다. 다음 마을은 10km 떨어진 온타나스(Hontanas)였다. 2시간이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지만 첫날부터 너무 먼 거리를 걸어 일정이 틀어질 수도 있다. 짧은 고민은 알베르게의 wifi에 맡기기로 했다. 만약 인터넷만 할 수 있다면 얽매인 기억을 잠시 구석으로 밀어 넣을 방법은 다양했다. 하지만 이 작은 마을은 아쉽게도 무료인터넷을 이용할 수 없었다. 이제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다. 10km면 씨에스타 전에 충분히 도착할 수 있다.



마을을 벗어나 만난 건조한 세상과 조우한지 30분도 되지 않아 수정과 루다의 선택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한낮의 열기는 맹렬히 쏟아지고 그 열기를 머금은 세상은 온통 갈색빛뿐이었다. 멀찌감치 외로이 서 있는 한두 그루 나무를 제외하곤 푸름이란 찾아볼 수 없는 삭막함은 외로움을, 추수가 끝난 밭의 끝은 하늘과 맞닿은 지평선에 핀 아지랑이의 일렁임은 헛된 희망만 끊임없이 강요했다. 저 선에 닿으면 새로운 풍경, 새로운 마을이 보이겠지. 지금까지 길에서 만났던 것처럼 능선 너머 세상을 그리워한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그 너머엔 지평선의 곡선만 달라졌을 뿐 비슷한 건조함이 다시 펼쳐져 있다. 왼쪽도 오른쪽도 심지어 방금 지나온 짧은 과거까지 온통 하늘과 맞닿은 마른 지평선뿐이다.

절망을 외칠 정도는 아니지만 변화 없이 지속하는 건조함은 사람을 쉽게 지치게 했다. 지금까지 식사를 위한 휴식 외에 제대로 휴식을 취하지 않았던 건 애써 익숙해져 잊고 있던 고통이 휴식을 계기로 새롭게 되살아나는 게 싫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전날 저녁부터 제대로 된 식사도 하지 않은 상태에 더는 갈증을 견디기 힘들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멘.


물통에 어제 마시다 남은 와인이 담겨있다. 고작 한 모금도 다 마시지 않았는데 갈증이 해소되고 허기도 얼마큼 회복된 기분이다. 얼른 물통을 배낭에 도로 넣었다. 즐거움은 아끼고 아꼈다 극한을 극복한 후에 즐기리라. 온타나스에 도착해 샤워 후 아름답게 즐기리라. 와인의 힘이었을까? 10km의 거리는 우려와 달리 2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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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후기라기엔 민망하지만.... 23.04.20 24 0 1쪽
32 30 이번엔 꼭 찾아요. 23.04.19 23 0 4쪽
31 29. 산티아고 23.04.18 21 0 4쪽
30 28. 상처받지 않게 하소서. 23.04.17 22 0 8쪽
29 27. 술래잡기 23.04.16 25 0 6쪽
28 26. Now is miracle(기적과 함께) 23.04.15 36 0 9쪽
27 25. 첫 아침 식사 23.04.14 18 0 5쪽
26 24. 이렇게 해보고 싶었어요. 23.04.13 17 0 8쪽
25 23. 기적의 성당 23.04.12 21 0 4쪽
24 22. 반갑습니다! 23.04.11 19 0 6쪽
23 21. 슈퍼맨, 태극기 청년 23.04.10 21 0 5쪽
22 20. 이건 비밀이니까 너만 알고 있어. 23.04.09 22 0 5쪽
21 19.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 23.04.08 19 0 11쪽
20 18. Are you pilgrim?(순례자세요?) 23.04.07 26 0 6쪽
19 17. 분실 23.04.06 23 0 4쪽
18 16. 한국인 자매의 소문 23.04.05 23 0 4쪽
17 15. 저거 바꿔치기할까요? 23.04.04 17 0 6쪽
16 14. 어둠의 자식 23.04.03 30 0 3쪽
15 13. 언니, 언니! 한국사람, 한국 사람이에요! 23.04.02 27 0 8쪽
» 12. 떨칠 수 없는 그림자와 지평선 23.03.31 25 0 7쪽
13 11. 미안해요. 미안해요. 23.03.30 24 0 9쪽
12 10. Why are many Koreans coming here?(한국인은 여길 왜 그렇게 많이 오는 거야 23.03.29 23 0 4쪽
11 9. 이 길처럼 노란색 화살표가 제가 갈 길을 알려줬으면 좋겠어요. 23.03.28 25 0 6쪽
10 8. 방금 오빠한테 고백하는 건가요? 23.03.27 25 0 8쪽
9 - 시나브로 23.03.26 27 0 4쪽
8 7. 그냥 오빠한테 시집 올래? 23.03.25 27 0 8쪽
7 6. 오빠 모르셨어요? 23.03.24 30 1 12쪽
6 5. 일행(日行)을 위한 일행(一行)인지, 일행(一行)을 위한 일행(一行)인지 23.03.23 34 1 5쪽
5 4. 내 이럴 줄 알았다. 23.03.22 28 1 6쪽
4 3. 가난한 순례자 23.03.21 38 1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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