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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귿(D)
작품등록일 :
2023.03.19 14:06
최근연재일 :
2023.04.20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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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0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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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08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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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19.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

DUMMY

완벽한 실수. 무지의 소치도 모자라 객기를 부린 대가는 상상 이상으로 가혹했다. 메세타의 거친 건조함과 더위에 프로미스타로 향하던 걸음 속에서 힘겹게 견뎌야 했던 발의 통증을 합쳐도 이만큼은 아니었다.


이틀 전 새롭게 시작된 다섯 명의 일행이 다시 만나기로 한 곳은 두 곳이었다. 다음 일정까지 고려했을 때 적당한 곳은 발베르데 데 라 비르겐(Valverde de la Virgen)이었다. 하지만 민아가 가지고 있던 책자에 따르면 그곳의 알베르게는 현재 운영이 되지 않았다. 생장에서 받은 안내표엔 버젓이 알베르게 이름과 연락처가 기재되어 있었기에 어느 하나를 확신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레온과 사이에 있는 비르겐 델 카미노(Brigen del Camino)에 있는 공립 알베르게 상태를 확인해 머물기 합당할 경우 그곳에 머물고 그렇지 않으면 처음 계획대로 하기로 했다.


비르겐 델 카미노에 도착하니 생각보다 규모가 있는 마을이었다. 일요일이라 도로변에 보이는 슈퍼마켓은 문을 닫았지만 잘 찾아보면 문을 연 식료품점을 찾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시간이 너무 이르다. 그래도 약속이니 알베르게에 한 번 가볼까? 알베르게는 마을 안쪽으로 조금 들어가야 했다. 왜 그랬을까? 고민은 깊지 않았다. 걸음은 한 번도 멈추지 않고 노란색 화살표가 가리키는 곳을 향해 이어졌다.


잘못된 선택이란 걸 확신한 건 건조하고 말랐으며 복잡하게 돌아가야 하는 흙길을 지나 한 시간 만에 발베르데 데 라 비르겐에 도착했을 때다. 언덕 아래로 보이는 마을엔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언덕을 내려와 다시 시작하는 언덕을 오르며 도로 옆으로 형성된 작은 마을 어디에도 알베르게는 보이지 않았다.


망했다. 4km 가까운 거리를 거꾸로 돌아가고 싶진 않았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14km 떨어진 다음 마을까지 가야 한다는 건데 아침에 알베르게를 나오기 전에 먹은 쿠키 몇 조각과 레온에서 사 먹은 바게트 반쪽이 전부인데 체력도 많이 떨어져 있었다. 더군다나 며칠 전부터 발가락의 상처 때문에 전투화를 대신해 스니커즈를 신었는데 밑창이 얇은 스니커즈의 특성상 발에 피로가 일찍 찾아오고 고통은 더 심했다. 그런데 남은 길이 14km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왔던 길을 되돌아가고 싶지 않다. 어차피 오늘 아니면 내일 걸을 길이다.


순례길 표식은 도로와 나란히 길게 뻗은 흙길을 가리켰다. 하지만 스니커즈의 얇은 밑창은 작은 돌멩이가 무수한 흙길에서 내 발을 보호해 주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그렇다고 도로가 마냥 편한 것만도 아니었다. 아침부터 쏟아진 열기를 열심히 받아들이고 다시 쏟아내는 검은색 아스팔트의 열기도 만만치 않다. 허기를 달래줄 식료품점 하나 없이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은 잘못된 선택을 비아냥거리기라도 하는 듯 이글거리는 아지랑이로 눈을 어지럽히기까지 했다.


최대한 일찍 도착하고픈 마음에 어느 날보다 속도를 높였다. 하지만 이미 방전이 된 체력은 에너지를 끌어올린 대가를 가차 없이 고통으로 치환했다. 다리와 발이 미칠 듯이 비명을 질러댄다. 쉬라고, 멈추라고 더이상 고통을 이겨낼 수 없다며 아우성을 질렀지만 무시할 수밖에 없다. 이정표 상으로 이제 4km 정도 남았다. 걷는 건지 다리를 질질 끄는 건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지만 이제 한 시간만 참으면 된다.


굳이 비교하자면 화생방 훈련과 비슷할까? 미칠 듯한 고통에 눈물과 콧물을 쏟으며 당장이라도 이 고통에서 도망치고 싶지만 굳게 잠긴 문을 열 수는 없다. 방독면을 쓴 교관의 지시에 군가를 부르고 팔 벌려 높이 뛰기 같은 PT를 통과한 후에야 빛을,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다. 끝이 오지 않을 것처럼 느리게 흐르는 시간, 이겨내기 힘든 고통, 합당한 과정을 거쳐야만 맞이할 수 있는 휴식과 안녕, 하지만 강제와 선택이라는 큰 차이가 있다. 객기 한 번에 이게 무슨 사서 고생인 건지.


주유소다. 편의점도 있다. 대략 2km 정도 남은 것 같다. 평소라면 30분도 안 남은 거리 아무리 힘들어도 이 악물고 걷겠지만, 그사이 죽을 수도 있다. 다리와 발에 전해지는 고통도 고통이지만 몇 시간째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갈증과 굶주림 역시 만만치 않았다.

문을 열고 들어간 편의점은 다른 세계다. 시원한 에어컨 공기와 각종 음식과 음료들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이 지경에도 돈 계산을 먼저 한다. 샌드위치는 가격이 너무 비싸고 과자나 초콜릿으로도 이 상황을 극복하진 못할 것 같다. 무거운 몸을 끌며 한참을 고민한 결과 계산대에 올린 건 그동안 즐겁게 마셔왔던 산미구엘(Sanmiguel) 맥주였다. 1L 유리병을 가득 채운 맥주는 슈퍼마켓에서 1유로 조금 넘는 가격에 사 먹던 것인데 이곳은 2유로에 팔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2유로에 갈증과 허기를 해소하고 약간의 알코올도 섭취할 수 있다면 결코 비싼 가격은 아니었다.


평소 알코올 냄새만 나는 탄산음료라고 생각했는데, 술도 아니라 무시했던 맥주는 축복이요 기적이었다. 두 배가 넘는 돈을 주고 샌드위치를 사 먹었어도 이렇게 만족스러울 수 있었을까? 절대 불가능하리라. 물론 기적의 맥주도 육체적 고통까지 해결해 주진 못했다. 발바닥과 다리가 느끼는 고통은 그대로였다. 하지만 힘이 생겼다. 고통을 견딜 체력도 어느 정도 회복됐다. 여전히 절뚝거리며 힘겨운 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지만 지난 2시간보다 시간은 훨씬 빨리 흘렀다.




천국이다. 땀과 먼지로 범벅이 된 지친 몸을 씻을 수 있는 물과 몸을 뉠 수 있는 침대가 있는 이곳은 천국이다. 고통의 시간은 이제 완전히 끝났다. 이제 편안한 휴식과 풍요로운 식사만 있을 뿐이다. 아픈 다리를 끌며 힘겹게 마을 탐방에 나섰다. 행여 일행 중 누군가 잘못된 선택으로 이곳에 올 수도 있으니 미리 식료품점을 찾아둘 필요가 있다. 식료품점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다만 가게가 비어 있을 뿐이다. 그리고 다른 식료품점도 없다. 빌어먹을··· 망했다. 수중에 있는 돈으로 당장 식당에서 식사할 수 있지만 앞으로 일정에 대해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다.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생길 수 있는 변수를 대비한 최소한의 금액은 주머니에 넣고 있어야 했다. 일단 숙소로 돌아왔다. 카톡을 확인해 보니 민아에게 연락이 와있다. 순영 누님을 포함한 다른 일행은 약속대로 비르겐 데 카미노에 있으며 다행히 순영 누님이 목걸이와 묵주를 가지고 있었다. 내 것이라면 결국 이렇게 돌아오는구나.


그래도 죽으란 법은 없다. 배낭 깊숙이 잊고 있던 비상식량이 아직 한 봉지 남았다. 파리에서 바오로 신부님에게 받은 세 봉지의 라면 중 하나는 론세스바예스에서, 그리고 또 한 봉지는 부르고스에서 헤어지는 준영에게 줬다. 그리고 남은 한 봉지. 앞으로 어떤 일이 생겨 또 굶거나 힘들어질지 모르나 마지막 한 봉지의 라면을 먹기에 부족함이 없는 날이다.


잘 끓인 라면을 들고 서둘러 숙소 앞마당 테이블로 향했다. 한국 사람에겐 별 자극이 안 되지만 매운 것에 익숙하지 않은 외국인들에게 화생방 수준의 테러가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냄비 뚜껑을 열자 뜨거운 열기가 얼굴을 감싸며 하늘로 사라졌다. 이 더운 날씨에 얼굴을 훑은 열기가 반갑지 않아야 했지만 오랜만에 느끼는 라면의 매운 향은 온몸을 황홀경에 빠트렸다. 성스러운 의식을 행하듯 조심스럽게 포크를 들어 꼬들꼬들한 면발을 살짝 건져 돌돌 말았다. 한 번에 너무 많은 양을 먹어서 이 즐거움을 일찍 끝낼 수 없기에 신중을 기해 적절한 한 포크를 말았다. 너무 뜨거워 맛을 못 느껴도 안 되기에 입바람을 후후 불어 적당히 식혀주고 조심스럽게 입안에 넣었다. 포크에 단단히 말린 면발을 이빨로 긁어 입안에 넣고 천천히 씹자 라면 특유의 매운맛과 향이 입안을 가득 메웠다. 씹으면 씹을수록 부서지는 면발에서 빠져나오는 고소함 역시 첫사랑을 다시 보는 것 같은 설렘을 안겨줬다.


아차!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숙소로 뛰었다. 시간이 조금이라도 지체되면 라면이 불 것이다. 다리와 발바닥의 통증? 모르겠다. 아픈 것 같지만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라면 다리가 부러져도 뛰어야 한다. 방으로 들어와 왜 하필 문에서 가장 먼 곳에 자리를 잡았나 하는 후회를 던지며 배낭 속으로 손을 넣었다.


“정말 지치고 힘들어서 포기할 때 먹어라.”


다시 한번 바오로 신부님의 당부가 머릿속에 메아리쳤다. 신부님의 서랍 속에 들어있던 단 두 병의 소주 중 한 병. 손의 감각은 단번에 소주를 찾았다. 소주를 손에 들고 다시 밖으로 뛰었다. 면이 불으면 안 된다는 의지의 발현은 현실을 배신하지 않았다. 면은 아직도 탱탱하게 제 모습을 지키고 있었다.


소주병과 뚜껑을 잡고 돌리자 알루미늄 뚜껑이 열리는 특유의 ‘딱’ 소리가 마치 에밀레종의 경건하고 신비로운 소리처럼 세상을 울렸다. 은은하게 병에서 흘러나오는 익숙하고 그리운 소주 향을 음미하며 다시 한번 포크에 면을 말았다. 왼손엔 소주병을 오른손엔 포크를 집었다. 기대와 행복에 손이 떨린다. 하지만 한 방울도 흘릴 수 없다. 조심스럽게 왼손을 입으로 가져갔다. 소주잔 딱 한 잔, 첫 모금은 사치를 부려보자. 더도 덜도 말고 딱 소주잔 한 잔이 입안으로 들어갔다. 한국이었다면 바로 넘겼겠지만 입에 머금고 잠시 음미했다. 자극적인 알코올 향과 씁쓸하면서도 익숙한 단맛. 따뜻하고 부드러운 목 넘김. 그리고 이어지는 매콤한 면과 얼큰한 국물 한 숟가락······. 눈물이 날 것 같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맛이 있을 수 있을까. 이제 앞으로 소주 먹을 때 라면을 안 먹을 수 있을까? 라면 먹을 때 소주를 안 먹을 수 있을까? 이 조합은 세상 그 어떤 음식의 조합보다 훌륭하다. 인간이 만든 그 어떤 음식보다 발명품보다 훌륭하다!


행복을 즐기는 시간은 늘 짧다. 단 한 방울의 예외도 없이 소주와 라면을 배 속에 넣었지만 아쉽다. 배를 채웠다는 느낌조차 안 드는 부족한 양이었다. 하지만 행복하다. 그 어떤 순간보다 만족스럽고 흐뭇하다. 행복을 즐기는 시간은 찰나 같지만 그 여운은 잠드는 순간까지 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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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26. Now is miracle(기적과 함께) 23.04.15 23 0 9쪽
27 25. 첫 아침 식사 23.04.14 13 0 5쪽
26 24. 이렇게 해보고 싶었어요. 23.04.13 12 0 8쪽
25 23. 기적의 성당 23.04.12 12 0 4쪽
24 22. 반갑습니다! 23.04.11 12 0 6쪽
23 21. 슈퍼맨, 태극기 청년 23.04.10 15 0 5쪽
22 20. 이건 비밀이니까 너만 알고 있어. 23.04.09 14 0 5쪽
» 19.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 23.04.08 14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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