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분실
배낭을 메고 길을 걷다 물에 빠지면 가장 먼저 뭘 건져야 할까? 지갑? 여권? 됐다. 그건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여행기와 카메라다. 여행에 대한 기억이 고스란히 담긴 추억의 산물이 가장 중요하다. 그럼에도 여행기와 카메라, 돈이나 여권처럼 중요하고 생활을 위한 최소한을 제외한 것을 버리지 못하고 16kg이나 되는 무게를 유지하는 건 그동안 깃든 추억도 추억이지만 가진 게 없는 사람일수록 손에 쥔 것에 더 얽매인달까. 버리긴 아깝단 얘기다. 게다가 그걸 짊어지고 다닐 수 있는 체력이 된다는 건 천만다행이다.
오랜만에 날이 밝아올 무렵 출발해 민아와 얘길 나누며 느긋하게 걸었다. 여전히 발에 통증이 심한 준영과 그런 막내가 안쓰러운 혜수는 휴식이 잦아 어느샌가 멀어졌고 그동안 쌓인 여독이 한계에 달한 순영 누님은 하루 더 숙소에 묵고 이틀 뒤 다시 만나기로 했다. 약 한 시간 동안의 대화에 이어 여느 날처럼 자연스럽게 거리가 벌어질 때쯤 기도를 위해 목에 늘 걸고 있던 묵주에 손을 뻗는데 아무런 느낌이 없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걸 느끼면서 열심히 몸을 더듬고 주머니를 뒤졌지만 어디에도 묵주는 없었다. 묵주뿐이 아니다. WYD때 받았던 기념 십자가 목걸이, 한국에서 연수 수료품으로 받은 목걸이까지 다시 구하기 힘들거나 구할 수 없는 소중한 물건들은 내 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가방에 넣었나? 아! 침대에 걸어놓고 아침에 잊고 나온 것이다.
누구도 탓할 수 없는 온전한 내 잘못이지만 밀려오는 짜증을 누를 수 있을 만큼 성숙하지 못하다. 민아가 보고 있기에 겉으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속은 미칠 듯이 끓었다. 그래도 어쩌랴.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벌써 한 시간을 넘게 왔는데 숙소로 돌아갔다 오면 2시간 이상 걸린다. 앞으로 남은 길도 적지 않으니 2시간을 허비하면 오늘 일정은 망가지게 된다. 게다가 한 번 온 길을 다시 돌아가고 싶진 않았다.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첫째 순영 누님이 아직 그곳에 있다. 같은 방에 묵었기에 그녀의 눈에 띌 확률이 높다. 만약 그녀가 못 봤더라도 인터넷이 되는 곳에 도착해서 카미노 관련된 인터넷 사이트에 지역과 알베르게 이름, 사연을 올리다 보면 적어도 누군가 한 명은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십자가 목걸이와 묵주니 알베르게 관리인이 쉽게 버릴 것 같지도 않았다.
확신이 없는 막연한 기대. 어쩌면 다시 찾지 못할 수도 있는 상황인데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진다. 조금 전 온몸을 가득 채웠던 짜증이 말끔히 사라졌다. 굳이 구분 하자면 긍정 보다 부정적인 편인데, 이런 상황에선 욕하고 짜증내야 되는 철딱서니 없는 성격인데 믿기지 않을 만큼 편안하다.
내 것이라면 언제고 내 손에 들어올 테고 내 것이 아니라면 딱 거기까지겠지. 포기가 아니라 할 수 있는 만큼 노력하고 나머지는 흐름에 맡기자.
뭐지? 나 이런 놈 아닌데. 그동안 순례길을 걸으며 긍정적인 성격으로 변하기라도 한 걸까? 보름 만에? 말도 안 돼. 사람은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아. 그런데 카미노를 걸은 뒤로 가끔 자신을 돌아볼 때 조금 철이 든 것 같은 모습으로 서 있을 때가 있다. 남자는 철들면 죽는다는데 큰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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