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이건 비밀이니까 너만 알고 있어.
오랜만의 여유가 반갑다. 비록 아직 엄지발가락이 완치되지 않아 여전히 스니커즈를 신고 자갈 가득한 비포장길을 걷고 있지만 거리도 시간도 여유로우니 마음만은 편안하다. 일행과 20km 가까이 떨어져 있고 목적지도 가까우니 급할 게 없다. 어제는 처음으로 늦은 5시까지 걸었는데 오늘은 9시가 다 되어 출발한다는 게 아이러니하다.
목적지인 산티바네스(Santibanez) 전 마을인 오스피탈 데 오르비고(Hospital de Orbigo)의 인상적일 만큼 긴 다리를 건너 처음 만나는 식료품점으로 들어갔다. 목적지 도착 전 간단한 요기를 위해 들어갔는데 눈에 익숙한 상표의 쌀이 보였다. 순례길에 오기 전 유럽 여행 중 불필요한 짐 일부를 한국으로 보내려다 배송비가 너무 비싸 포기한 덕에 배낭은 꾸준히 15~16kg을 유지했다. 그래도 최소한으로 무게를 줄이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는데 어제 같은 일을 다시 겪고 싶지 않은 마음에 1kg 쌀을 덥석 집었다. 조금 무겁다고 당장 어떻게 되진 않지만 어제 같은 일을 다시 겪고 음식까지 없으면··· 죽을 거다. 분명히.
바게트 반쪽과 복숭아 하나로 허기를 달래는 사이 작은 고민이 움트기 시작했다. 한 번 일을 겪은 덕에 겁쟁이가 된 건지 조심성이 커진 건지 모르지만 이곳에서 걸음을 멈추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규모에 비해 고즈넉한 마을의 분위기도 좋고 적당한 식료품점도 있다. 나야 심심할 만큼 짧은 걸음이지만 일행은 이곳에서 멈춘다 해도 결코 적은 거리는 아니다. 만약을 생각해 차라리 여기서 멈추고 일행을 기다릴까? 만나서 다시 상의하고 결정해도 되지 않을까? 근데 언제 올 줄 알고? 고민은 오래가지 못했다. 만약 문제가 생긴다면 다음 마을까지 가면 그만이다. 어제도 했는데 오늘 못 할 건 뭐냐.
우려와 달리 찾던 알베르게는 그 자리에 있었다. 밀림을 연상시킬 만큼 정리가 안 된 넓은 정원과 인상 좋은 중년 남자 주인이 인상적인 사설 알베르게였다. 기다리는 순례자를 배려한 그는 무려 1시간 가까이 일찍 문을 열어줬다. 금액도 만족스럽다. 알베르게 이용이 6유로에 저녁 식사 5유로다. 하루에 11유로가 결코 적은 금액은 아니지만 주방을 이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다른 식당을 이용하는 것보다 훨씬 저렴했기에 흔쾌히 돈을 지불했다.
밀림 속에서 파리 떼와 씨름하며 밀린 여행기를 정리할 때 익숙한 목소리가 정원으로 흘러왔다. 혜수의 목소리다. 정연의 상태가 아직 호전되지 않았다면 응당 그녀가 가장 먼저 도착하는 게 합당하나 뒤이어 다른 일행의 목소리도 함께 울렸다. 순영 누님을 제외하면 이틀 만에 보는 것뿐인데 재회 인사가 반갑다. 무모한 선택이 부른 참사와 절망, 라면과 소주가 만들어준 꿈같은 환상에 그들은 일요일이지만 문 연 식료품점을 찾아 푸짐하고 화기애애한 저녁으로 응수했다. 고작 하루 동안 겪은 일들을 다양하게 늘어놓고 있을 때 알베르게 주인이 조용히 불렀다. 뭐지? 내가 뭘 잘못했나? 그는 다른 이들의 시야에서 벗어나 구석으로 안내하더니 조용히 속삭였다.
“다른 사람한테는 15유로 받았어. 그런데 넌 11유로 냈잖아. 그러니까 네 친구한텐 비밀이야. 너만 알고 있어.”
아마 미국 사람이 같은 말을 했으면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했겠지만 쉬운 단어들로 빠르지 않게, 몇 번의 강조 덕에 어렵지 않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언어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물론 동일한 언어를 수준 이상 사용할 수 있다면 더 긴밀한 대화를 나눌 수 있겠지만 결국 마음과 의지가 중요하다. 낯을 많이 가리고 아직도 외국인과 대화하는 것에 겁부터 내지만 민아를 보면 언어는 타인과 소통하는 여러 가지 방법의 하나에 불과하다. 밝은 성격과 꾸밈없는 표정의 민아는 누구와도 잘 어울렸다. 성별, 언어, 나이, 국적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심지어 영어 한마디 못하는 스페인 남자와 역시 스페인어를 하지 못하는 민아는 2시간이 넘도록 동행하며 대화를 했다. 나로선 이해할 수도, 다가갈 수도 없는 압도적인 친화력의 경지랄까. 사람마다 차이가 있긴 하지만 유럽 여행의 로망 중 하나가 그런 거였는데 2달이 넘도록 난 뭘 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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