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기적의 성당
무료하다. 익숙한 언어 덕에 잠도 오지 않고 휴식을 취하기도 쉽지 않다. 영어나 다른 언어들은 어차피 알아듣지 못하니 감당하기 힘든 수준의 소음만 아니라면 신경 쓰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는 상념과 휴식을 방해한다.
참지 못하고 숙소 밖으로 나섰지만 마땅히 할 일도 갈 곳도 없다. 볼 것 하나 없는 산꼭대기 작은 마을에 관광객이 이렇게 많은 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산을 오를 때 관광지에서나 볼 법한 기부요정-사전 설명 없이 준비된 용지에 먹잇감(관광객)의 간단한 인적사항을 기재하도록 유도한 뒤 그것을 빌미로 기부에 응한 것이라며 기부금을 갈취하는 유럽 유명 관광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날강도(를 나만 그렇게 부름)-이 불쑥 종이를 내밀기도 했다.
마을의 정체를 찾는 것을 포기하고 성당으로 향했다. 작은 마을과 어울리는 소박한 성당 안엔 많지 않은 사람이 기도하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 조심스럽게 문을 닫자 바깥세상과 단절된 포근하고 고요한 세상이 부드럽게 몸을 감쌌다. 미리 올걸. 왜 신경 쓰고 싶지 않다며 신경 쓸 수밖에 없는 공간에서 괴로워하고 있었을까. 복잡한 상념들이 눈 녹듯 사라지고 편안함만 가득했다.
길지 않은 시간 기도를 하고 나온 세상은 여전했다. 아직 관광객들과 순례자들이 뒤섞여 거리를 배회하고 기념품 가게와 식당은 불을 밝히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알베르게에 주방시설은 존재하나 식료품점이 없는 덕에 어쩔 수 없이 식당을 이용해야 할 텐데 어떻게 할지 고민이다. 기분 같아선 다른 누구와도 식사하고 싶지 않다. 지금 이 순간부터 누구와도 어울리지 않고 생장을 출발할 때처럼 혼자로 돌아가고 싶다. 하지만 적어도 목적지를 공유하고 일정을 약속했던 오늘은 동행해야 한다. 내 기준에선 그게 최소한의 예의였다.
볼거리 하나 없는 마을을 일없이 계속 배회하다 보니 어느새 슬그머니 어둠이 찾아오고 있었다. 들어가기 싫었지만 저녁 식사에 대해 논의는 해야 할 것 같아 알베르게로 향하는데 이전 일행과 마주쳤다. 마을 구경과 식당 찾기를 병행하던 그들이 먼저 식사를 제의했다. 고마운 제의였지만 응할 처지가 아니었기에 정중히 거절하고 지나치려는데 지금까지 어색하게 피하던 수정이 먼저 말을 걸었다.
“오라버니, 혹시 성당 갔다 오셨어요?”
지금은 시간이 늦어 성당 문이 잠겼지만 조금 전 홀로 조용히 기도하고 일요일인 내일 미사 시간을 확인하고 나온 그 성당에서 성체와 성혈이 실제 사람의 살과 피로 변하는 기적이 일어났으며 성당 안에 그 증거가 보관되어 있다는 설명이었다. 이곳에 관광객이 많이 볼 수 있었던 이유를 깨닫는 순간이기도 했다.
“정말? 아까 성당 갔을 땐 구경할 생각은 안 하고 기도만 드리고 나왔는데··· 내일도 늦게 열겠지? 못 들어가겠지?”
문이 잠긴 사실은 알고 있다. 더군다나 내일 12시 미사니 아무리 문을 일찍 열어도 10시는 돼야 할 것이다. 현실적으로 성당 안에 들어가서 기적의 흔적을 찾는 건 무리다. 안타까워하는 수정에게 맞장구치기 위해 실망과 아쉬움을 잔뜩 담아 서운해했지만 사실 전혀 아쉽거나 안타깝지 않았다. 평생을 가톨릭 신자로 살아왔으니 종교 안에서 벌어지는 기적에 대해 궁금한 건 사실이다. 신의 존재와 종교의 가르침에 대한 믿음과 올바른 실천만 뒤따르면 된다는 지극히 종교적인 입장이 아니다.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작은 밀 빵과 포도주가 자연법칙을 무시한 변화를 일으킨다는 의심도 아니다. 그저 아무런 감정의 변화가 안 생긴다. 보고 싶다거나 보지 못해 아쉽다거나 기적을 확인하고 싶다는 등 원초적으로 생길법한 감정이 싹트질 않았다. 우연에 우연이 겹쳐 벌어진 비상식적 상황이라 평가절하하는 것도 아니다. 평소의 내 반응과 너무도 다른 모습이 스스로 낯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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