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어둠의 자식
이른 새벽의 출발은 늘 조심스럽고 불안하지만 아름답다. 목적지까지의 거리와 알베르게 입실 시간을 고려해 출발하다 보면 짙은 어둠에 덮인 새벽에 길을 나설 때가 종종 있다. 대도시라면 모를까 작은 마을엔 가로등도 많지 않고 그마저도 마을을 벗어나면 칠흑 같은 어둠뿐이다. 다행히 휴대용 손전등은 있다. 하지만 며칠 전부터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마을을 벗어나는데 10분을 넘게 헤맸다. 알베르게를 나온 직후 표식을 확인하지도 않고 짐작만으로 걸은 게 문제였다. 어쩌면 길게 뻗은 도로를 따라 한참을 갔을지도 모르는데 다행히 지나던 차가 멈춰서 잘못 들어섰단 사실을 알려줬다. 그가 알려준 대로 가서도 10분을 더 헤맸다. 이런 적은 처음인데 무슨 불길한 징조일까.
어둠에 익숙해져 숲길을 걷는데 이번엔 어제 이정표를 보던 세 명의 한국인이 방해된다. 각자 하나의 손전등을 들고 있는 건 어둠을 헤치기 위한 당연한 방법이었지만 어렵게 어둠에 익숙해진 눈을 자극하는 세 개의 강렬한 빛도 문제지만 굳이 말을 건다.
“손전등 없이 어떻게 걸어요?”
빠른 걸음, 다른 순례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큰 배낭, 전투화 등 흔하지 않은 모습의 한국 순례자를 신기하게 생각하는 대화를 얼핏 듣긴 했다. 그런 데다 다시 만났을 땐 손전등도 없이 어둠을 헤치니 신기했으리라.
“손전등을 켜면 발 앞만 보게 되잖아요. 좀 더 앞을 보더라도 빛이 머무는 곳만 보게 되고 그러면 주변을 볼 수 없게 되더라고요. 차라리 조심해서 걷다 보면 어둠에 익숙해지고, 그럼 어둠 속에서도 주변이 어느 정도 보여요. 더위를 피하려고 새벽에 걷는다고 해도 몇 시간 동안 빛이 머무는 곳만 보고 걷기는 너무 아쉽더라고요. 그래도 갈림길에선 저도 화살표를 찾기 위해 손전등을 켜죠. 괜히 객기 부리다 엉뚱한 데로 가면 안 되잖아요.”
대답을 끝으로 앞서 나갔다. 덕분에 빛에 익숙해진 눈은 어둠이 불편했다. 게다가 그들과 거리가 멀어지기 전까지 뒤에서 아른거리는 빛은 쉽사리 어둠에 익숙해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말하고 나니 지금 내 모습이 딱 그렇다. 혼자가 익숙했는데 열흘을 함께 한 뒤 다시 혼자되는 게 낯설었다. 불편하고 쓸쓸하기까지 했다. 그래도 겉보기에 별 차이 없이 이틀을 보내며 다시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다. 다시 따뜻한 온기에 익숙해지지 말자고 다짐했다. 그런데 제 버릇 개 주는 법이 없다더니 어제 숙소에서 처음 만난 두 젊은 여자와의 대화를 거부하지 않았다. 도리어 즐겼다. 처음 사비나 아주머니에게 붙잡혀 수정, 루다와 걸으며 대화하는 것에 재미를 붙이더니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그러면 그렇지 태생이 그런 것을.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