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까지 자전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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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의 첫 일요일 이른 오전 인천 국제공항은 시카고 컵스의 유니폼과 모자를 걸친 인파로 뒤덮였고 입국장에는 누군가를 환영하는 대형 포스터가 눈에 띄었다.
<죤, 론, 대니, 티모시 - 웰컴 투 코리아>
각각 시카고와 북경 그리고 시드니에서 날아와 거의 같은 시간에 인천에 도착한 죤과 론, 대니 그리고 티모시는 오랜만에 만난 순우와 깊은 포옹을 나누었다. 컵스에 함께 몸을 담은 이후 한 시라도 떨어져 본 적이 없던 다섯이었다. 스토브 시즌도 예외 없이 함께 몰려다니며 무더운 시드니에서 몸을 만들던, 그야말로 형제보다 가까운 동료였기에 불과 두 달이라는 짧은 헤어짐이 이들 모두에게는 생소했고 견디기 어려웠다. 이들 중 하나가 반가운 만남을 특별한 방법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여기서 춘천까지 160km밖에 안 돼.”
“160km? 그래서?”
마중 나온 팬들과 인사를 나누고 팬 사인회까지 마치자 순우가 만면에 웃음을 띠며 입을 열었다. 기쁘고 반가운 마음도 잠시, 뭔가 불안하고 수상쩍은 낌새를 알아챈 죤이 설마 하는 마음과 심히 떨리는 목소리로 신의 자비를 구하며 물었다. 그리고 오랜 절친답게 그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다들 옷 갈아입어. 짐은 전부 차에 두고."
“....... 왜?”
“설마.......”
“여긴 무더운 시드니가 아니라 한겨울 서울인데.......”
론과 대니 그리고 뜨거운 남반구에서 막 날아온 티모시까지 연합전선을 펼쳐 갑자기 눈앞에 닥친 암울한 현실을 극구 부정하고 싶었지만 원래 안 좋은 느낌은 절대로 빗나가지 않는 법이다. 얄미운 친구는 입국장 구석에 세워둔 최신형 로드바이크 다섯 대를 깊숙이 숨겨놓은 보물 공개하듯 자랑스럽게 보여주더니 일행에게 일생 최고의 선물이라도 안겨주는 어투로 일방적인 대화를 이어갔다.
“걱정 마. 설마 그 거리를 뛰자고 하겠어? 자전거로 가는 거야, 자전거로. 얼마나 멋져! 여기서 조금 가면 경인 아라 뱃길이 나오고 곧바로 한강으로 이어지지. 세계적인 자전거길이야. 그대로 시원하게 춘천까지 뚫려있는 데다 풍경도 기가 막혀. 가는 길에 계속 감탄사가 쏟아져 나올 거야. 이 좋은 것을 생각해 내느라 나름 고생 많았다고.”
“.......”
“.......”
“고맙다며 칭찬이라도 해 줘야 하나.......”
“거봐, 내가 오지 말자고 했잖아.......”
한국에 도착한 지 불과 한 시간도 안 되어 이번 여행을 뼈아프게 후회하기 시작한 네 명의 불쌍한 손님은 울며 겨자 먹는 인상을 지으며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걸음으로 천천히 탈의실로 향했다, 이 순간이 그저 꿈이길 바라면서.
월드시리즈 3연속 우승을 견인한 컵스의 영웅 다섯 명이 차에 오르는 대신 갑자기 옷을 갈아입고 자전거 페달을 굴리며 공항을 벗어나자 놀란 팬들은 ‘역시!’라는 표정으로 두 손을 올리며 함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행동이 재빠른 몇몇 밀착 전문 기자들은 간만의 특종이라며 급히 구한 자전거에 올라 이들을 추적하기 시작했지만, 공항을 벗어나자마자 놓치고 말았다. 평범한 체력의 기자들이 쫓기에는 다섯의 자전거는 너무나도 빨랐다.
차가운 칼바람에 장갑을 낀 손과 마스크를 덮어쓴 얼굴의 감각이 서서히 사라져 감탄사 대신 무시무시한 욕이 튀어나올 무렵 아라 뱃길을 벗어나 한강으로 접어들자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시원한 겨울 풍경과 세련된 서울 도심의 모습에 결국 첫 감탄사가 나오긴 했다. 자전거길 하나는 순우의 말처럼 정말로 멋졌다.
여의도를 지나 한강 남단을 계속 따라가니 큰 운동장이 보였다. 그리고 인내심은 거기까지였다. 허기는 우정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무너뜨린다.
“이곳이 잠실 야구장이야. 웅장하지? 리글리필드와 비교하면 어때?”
“리글리필드고 뭐고 제발 먹을 것 좀 주라. 배고파서 쓰러지겠다.”
“맞아.”
“더는 못 간다.”
“다리에 힘이 없다.”
죤은 울먹거렸고 대니와 티모시는 당장 무릎이라도 꿇듯 통사정으로 나왔으며 절대로 못 한다는 말은 못 하는 자존심 센 론 마저 페달을 멈추며 인상을 쓰고는 굶주린 배를 움켜잡았다. 구장 인근의 식당에서 순식간에 해치운 삼겹살 20인분과 밥 10공기가 넉넉했다고 여긴 일행은 아무도 없었다.
“식사 후 과도한 운동은 몸을 망쳐. 알잖아.”
“난 식곤증이 있어서 자전거는 위험해.”
“추워서 손발이 얼어붙었어.”
“길도 얼어서 위험한데.”
갖가지 타당하고 논리적인 이유를 대며 따뜻한 식당 온돌 바닥에 누워 버티기 작전으로 나오는 동료들의 시위는 불행히도 아무 효력이 없었다. 해지기 전에 춘천에 도착하려면 쉴 틈이 없다며 친구들을 버리고 홀로 자전거에 오르는 순우의 뒤통수를 사납게 째려보던 8개의 불만으로 가득한 눈동자는 남양주 북한강 철교를 지나 경춘선 폐철도 길과 북한강 강변으로 들어서자 어느새 소풍 나온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바뀌었다. 남양주의 종합촬영소와 피아노 폭포 그리고 남이섬과 가평의 호명 호수는 그냥 지나치기에 너무 아름다웠다. 하지만 자전거로 다시 와보고 싶을 정도는 아니었다.
<론, 죤, 대니, 티모시 - 춘천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춘천시, 강원 리틀야구단 & K1 리그>
엉덩이가 쑤셔 어느 순간부터 양쪽 페달 위에 엉성하게 걸쳐 타고 어느덧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 가로수에 하나둘 노란 등이 켜지기 시작할 무렵 드디어 저 멀리 불 켜진 춘천 시내가 보이기 시작했다. 곧바로 시내로 들어가지 않고 얄밉게도 호수를 빙 돌아 신매대교에 이르자 이들을 환영하는 대형 현수막이 걸려 있었고 조금 과장하면 춘천 시민의 절반 정도가 환영 인파를 이루고 있었다. 이들의 160km 자전거 질주 소식이 온종일 전파를 탔기 때문이다.
공항 근처에서 일찌감치 이들을 놓쳐 편집장에게 지구에 존재하는 온갖 험악한 욕을 다 얻어먹어 거북이와 두루미보다 장수할 기자들이 분하다는 표정으로 다리 입구에 진을 친 채 기다리고 있다가 일행을 맞이하며 일제히 마이크를 들이밀었다. 기자의 첫 질문에 방한 첫날부터 지옥 훈련을 가진 일행의 입에서 고운 말이 나올 리가 없었다.
“이 추운 날씨에 인천에서 이곳까지 자전거로 오다니 과연 강철 체력들이시군요.”
“우린 절대 강철이 아닙니다. 그저 못된 친구 둔 죄로 완전 개고생한 거죠.”
“맞아요.”
“정말 그래요.”
“멀리서 온 손님을 이렇게 대접하다니.......”
마음에 있는 말은 담아놓지 못하는 솔직한 죤이 이날 따라 더욱 솔직한 답변을 내놓자 다른 동료들이 동시에 억울함을 호소하고 나섰다. 하지만 이어진 순우의 말에 기가 질려 아무도 인터뷰에 더 이상 응할 수가 없었다.
“하하. 다들 좋았으면서 왜들 그럴까. 원래 야구선수에게는 겨울철 체력 단련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를 잘 아는 저희는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라도 매일 새벽 의암호수를 돌겠습니다. 매일 5시 반에 학교 정문에서 출발합니다. 누구든 조깅 합류를 환영합니다.”
이미 춘천에 신혼살림을 차린 순우에게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뛰어온 조깅 코스였다. 그리고 그 거리가 대충 25km 정도 된다는 것은 전에 호수를 억지로 몇 번 돌아본 경험이 있는 죤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거기에 5시 반이라면 별 보고 뛰다가 별 보며 끝난다는 말이다.
눈치를 긁은 동료들의 인상이 대번에 구겨졌다. 종일 저 빌어먹을 자전거를 타며 맞은 겨울 바람으로 몸살이 들었는지 몸이 오싹오싹하고 사지의 뼈마디가 쑤셨다. 최소한 며칠 몸조리를 해야 할 판이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라도 해서 몸을 만들어 놓는 것이 중요했기에 아무 대꾸를 하지 못했다.
“아, 시드니에서의 훈련이 그립구나.”
“그러게. 눈을 밟으며 뜀박질을 할 줄은 몰랐네.”
다음날부터 이들이 통합 캠프가 열리는 하이난으로 떠나는 날까지 의암호수 새벽 조깅로는 특별 이벤트 장소로 변했다. 춘천뿐만 아니라 전국의 야구는 물론 축구나 마라톤 동호회원들까지 구름처럼 모여들어 5인의 새벽 운동에 합류하고 취재 목적으로 내외신 기자들까지 모여들면서 호숫가 휴식 공간 곳곳에 어묵과 김밥을 파는 모습까지 보였다.
하지만 대학 정문에서 출발하여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사람은 5인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었다. 칼바람으로 유명한 춘천에서 그것도 새벽에 뛰는 25km는 풀코스보다 훨씬 힘들었다. 아울러 순우와 동료들의 체력이 더욱 돋보인 계기가 되었으며 모든 운동의 기초는 뜀박질임을 확실히 보여준 교육적 이벤트이기도 했다.
<컵스의 영웅, 야구대에서 클리닉>
<전국의 야구인들, 춘천으로 몰려>
건물은 완공되었으나 아직 개교식을 열지 않은 강원야구전문대는 이례적으로 오리엔테이션을 먼저 열었다. 요란한 기사 제목처럼 리틀야구단 출신이 대부분인 신입생들에게는 메이저리그를 평정한 컵스의 영웅들과의 만남이라는 귀하디귀한, 어쩌면 평생 한 번 갖기 어려운 기회였기 때문이다. 특히 투수 포지션 학생들은 자신들이 롤 모델로 삼은 초절정 투수 바로 옆에서 그의 피칭 모션을 직접 보고 질문까지 하며 배울 수 있는,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기회였다. 거기에 야구대학 신입생은 아니더라도 뉴스를 보고 무작정 춘천으로 몰려온 전국의 투수 지망생들로 인해 아직 공식적으로 개관이 안 된 실내체육관은 인파와 열기로 가득했다.
그리고 드디어 첫 조깅을 마친 그들이 체육관에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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