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카고 컵스 구단 이사
그해 시카고에는 겨울이 일찍 찾아왔다.
한 남자가 신에게 물었다. "신이시여, 파이리츠가 언제쯤 우승할까요?"
신이 답했다. "앞으로 10년간은 불가능하다."
다시 남자가 물었다. "레드삭스는 언제쯤 우승할까요?"
신이 답했다. "네 대에서는 불가능하다."
남자는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럼, 컵스는요?"
한참을 생각하던 신이 대답했다. "내 대에서는 불가능할 것 같다.”
잊을 만하면 어쩌다 한 번씩 우승을 하는 파이리츠에 86년이나 걸리긴 했지만 레드삭스도 우승을 했으니 이 잔인한 조크의 대상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우승까지 107년이라는 오랜 시간과 함께 이런 모욕과 조롱을 묵묵히 견디며 조용히 인내해온 컵스의 팬들이 웃음보와 울음보를 동시에 터뜨리며 보란 듯이 떠들썩한 우승 축제를 벌였다. 전국에서 모여든 시카고 출신 팬들까지 합세한 축제의 마지막 순서는 서약식이었다. 연속 우승을 실천하겠다는 선수단의 굳은 다짐까지 받고 나서 일상으로 돌아간 다음 날 동장군의 입성을 알리는 큰 눈이 내렸다.
도시가 하얀 눈 속에 파묻히면서 저주도 한도 우승의 감격마저도 흘러간 과거에 파묻히고 당장 발등에 떨어진 제설 작업에 모든 시민이 힘을 모았지만, 축제를 취재하기 위해 몰려든 내외신 기자들의 우승 후기 리포트는 축제의 열기를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그 일부를 함께 들춰보자.
<퍼레이드용으로 개조된 이층 버스에 나눠탄 선수단이 11월의 쌀쌀한 날씨 속에서 리글리 필드를 출발하여 멈춘 첫 방문지는 시립 공원묘지. 팬들의 묘지 앞에서 엄숙한 표정과 황송한 자세로 우승 신고식을 올린 후 시가지로 진입하여 시민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시내 곳곳을 돌고 목적지 시청에 도착하자 우승 축하 기념식이 열린 시청 광장은 물론 인근 건물 옥상과 공원, 도로를 가득 채운 팬들의 우렁찬 함성이 하늘을 찔렀고 땅을 진동했다>
미국을 대표하는 ABC 스포츠 기자는 공원묘지를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컵스의 우승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올드 팬들이 잠든 곳을 찾은 선수단의 묵념에 이어 톰 리케츠 구단주가 대표로 우승을 보고하고 월드시리즈 우승팀에게 수여되는 커미셔너스 트로피를 어깨 위로 높이 들어 올려 놓고 묘지 사이를 걸으며 ‘이제 한을 거두시고 편히 잠드소서’를 외치는 것으로 공식적인 축하 행사를 시작하는 기괴한 모습을 시카고가 아니라면 그 어느 나라 어느 도시에서 볼 수 있을까. 구단주도 선수단도, 팬들과 중계진 마저 눈물을 훔친 이 날의 우승 신고식은 시카고 역사와 함께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선수단이 묘지 곳곳에 달아놓은 컵스를 상징하는 W 깃발은 겨우내 나부끼며 먼저 가신 팬들을 위로해 주리라>
CNN 스포츠 야구 담당 기자는 축하 현장을 집중 취재했다.
<시장의 축하 연설은 나무 위의 새들도 졸다 떨어질 만큼 장황하고 지루했지만, 시민들은 107년을 쌓은 내공으로 다시 한 번 인내심을 발휘했다. 역사적인 케익 커팅과 셰어링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카고가 자랑하는 케이크 제조업체 일라이스가 107 파운드(49kg) 초대형 케이크 5개를 특별 제작하여 컵스에 전달했다. 숫자에 담긴 의미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근처의 팬들은 미시간 호수의 갈매기도 아는 것을 어떻게 기자가 모를 수 있냐며 반문했다. 107년 만에 이룬 우승을 5연속 달성하라는 팬들의 지엄한 요구가 담긴 케익은 통합 팬클럽 회장의 손을 통해 리케츠 구단주, 엡스타인 사장, 매든 감독, 앤서니 리조 그리고 사이먼이라는 이름의 80대 노인이 각각 하나씩 전달받았고 행사 직후 작은 조각으로 쪼개져 시청에 모인 수천 명의 시민에게 제공됐다>
WGN-TV의 기자는 한 인물에 관심을 두었다.
<107년만의 우승 한 번으로 갈증이 가시지 않은 걸까. 5연속 우승 달성을 기원하며 제작한 케익은 구단주와 사장, 감독과 선수단 대표가 받았다. 남은 하나를 받은 노인에 대한 정체가 궁금했으나 이내 풀렸다. 그는 바로 컵스가 낳은 최고의 1루수였던 사이먼 스미스. 60년대와 70년대 중반까지 공격과 수비의 핵을 이루며 명성을 날린 사이먼을 여전히 기억하는 올드 팬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공을 놓은 지 40년이 된 그가 다시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 것은 우승 직후 구장의 안내방송을 통해 소개된 내용 때문이었다>
“아~ 무스타커스의 헛스윙으로 경기가 끝났습니다. 드디어 컵스, 시카고 컵스가 이겼습니다. 두 번째 퍼펙트게임을 달성한 K1을 앞세워 캔자스시티 로열스를 누르고 월드시리즈 7차전을 승리로 장식했습니다.”
“이렇게 시리즈 전적 4대3으로 끝까지 가는 혈투 끝에 우승을 차지했는데요. 팬들은 이 감격의 순간이 여전히 실감 나지 않는지 모두 일어선 채 멍하니 마운드만 쳐다보고 있군요.”
“구 위원, 이렇게 되면 말도 많고 탈도 많던 염소의 저주가 완전히 풀리게 되는 게 아닙니까?”
“그렇죠. 거기에 107년 만의 우승이죠. 워낙 의미가 큰 우승이라 선수단 또한 요란한 세리머니 대신 차분한 몸가짐으로 구장을 한 바퀴 돌며 팬들에게 우승을 신고하고 있군요. 감독 헹가래도 없고요.”
컵스의 로고송과 함께 대형 전광판은 타자의 헛스윙과 주심의 경기 종료 선언 그리고 컵스의 승리 확정 순간이 한동안 이어지더니 갑자기 카메라가 포수석 뒤편에 나란히 앉아 있는 여섯 노인을 비추면서 구장 안내방송이 나오기 시작했다.
“사이먼, 크리스, 아론, 찰스, 에디 그리고 테리. 과거 시카고 컵스를 빛낸 선수이자 은퇴 이후에도 함께 모여 살며 팀의 우승을 위해 헌신한 여섯 분을 구단은 오늘부터 이사로 임명함을 공식 발표합니다.”
이들을 기억하는 올드 팬들은 아직 살아있었냐, 그동안 어디에서 뭘 했느냐는 놀라고 반가운 표정으로 박수를 보냈지만, 처음 듣는 이름에다 난데없는 이사 임명 발표에 어리둥절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아나운서의 이어진 말에 모두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구단은 컵스를 향한 무한한 애정을 지닌 신임 이사들이 날카로운 통찰력과 정확한 분석력으로 권순우, 론 마이어, 죤 바그너와 같은 뛰어난 선수를 발굴하여 자택에 숙소를 마련해주고 뒷마당에서 직접 지도하며 오늘 컵스의 우승에 크게 기여했음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겁니다.”
갑자기 대형 화면에 자신들의 모습이 나오자 당황한 노인들 앞에 동년배의 노인이 나타났다. 구단 사무실에 올라가 방송을 지시하고 내려온 리처드였다.
“내 분명 자네들이 컵스의 주인이라 했지? 부인하지 않았으니 사내답게 약속을 지키게나.”
6차전이 진행되던 시각, 그러니까 바로 어젯밤 뒷마당 옛친구들을 찾아온 전대 구단주가 한 명씩 이름을 불러가며 ‘자네들이 진정한 컵스의 주인이네’ 라고 한 말을 선명하게 기억하는 노인들, 설마 구단의 이사로 임명하겠다는 형이상학적 의미가 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
“좋아, 리처드. 이 세상에서 자네만이 할 수 있는 일이야. 나 크리스는 남자답게 약속을 지키겠네.”
여전히 구장 카메라가 이들을 향하고 전광판에 일곱 노인에게 초점이 맞춰진 상황에서 크리스가 먼저 입을 열었고 뒤를 이어 친구들이 리처드를 둘러싸며 한마디씩 했다.
“이사, 컵스의 이사, 우리 시카고 컵스의 이사라고, 내가? 그거 좋지!”
“월급은 많이 주나?”
“프랭크 샌드위치랑 윈디시티 맥주는 공짜겠지?”
“좋아, 좋아. 이사가 구단주보다 높은 거지?”
“아니지, 아무래도 뭔가 코 꿰인 느낌인데.......”
우승의 감격으로 이미 목이 멘 팬들은 저 노인들이 0점대 방어율을 이룩하고 107년 만의 우승을 이룬 경기를 퍼펙트게임으로 마친, 어쩌면 소문처럼 정말로 외계인일지도 모르는 K1과 데뷔와 동시에 하와이 특급에서 빅리그 특급으로 변신한 론, 그리고 두 투수의 전담 포수이자 슬러거 죤을 발굴하고 훈련시켜 컵스로 보냈다는 사실에 더 놀랄 힘이 없었다.
이렇게 해서 일약 뉴스타로 발돋움한 여섯 노인 그리고 그들 중 카드게임에 져서 할 수 없이 이들의 대표가 되어 우승 축하연에 참석하여 5연승 다짐 케익을 받아든 사이먼을 바라보던 리처드의 얼굴에 드디어 만족감이 서렸다.
“이사가 되어 연승 케익까지 받았으니 K1의 옵트 아웃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다. 앞으로 이런 미련한 실수는 하지 말거라. 그날 안타 하나 없이 퍼펙트게임으로 마치는 걸 바로 앞에서 직접 보니 소름이 끼치더구나. 하늘이, 아니 하늘의 아버지께서 내려주신 기회다. 떠날 생각 못 하게 철저히 대우하는 거 잊지 말고."
“예, 아버지.”
“잘 알겠습니다.”
그저 나이만 들어 뒷방만 지키다가 쓸데없이 고함이나 치는 고집쟁이 어른으로만 봤건만 자신들보다 서너 수를 미리 보고 그 짧은 순간에 모든 필요한 계책을 세워놓는 초절정의 고수일 줄이야. 컵스의 주인이라는 해석하기 애매한 말을 던져 놓고 경기 종료 직후 안내 방송으로 한방에 이사로 임명하고는 연승기원 케익까지 받게 하는 이 모든 술책은 이 세상에 오직 한 사람밖에 부릴 수 없으리라.
K1을 움직이는 여섯 노인을 대번에 품에 안은 전대 구단주를 바라보던 아들과 애송이 사장은 우승의 보증수표 K1의 옵트 아웃 제안에 아무 생각 없이 사인한 것을 두고 죄송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진정으로 존경하는 마음에 한동안 머리를 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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