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줍음 띤 환한 미소
목숨을 건 배터리 때문이었을까.
컵스의 타선은 콜의 포심과 체인지업, 슬라이더와 커브볼의 구위에 눌려 방망이는 힘을 잃은 데다 절묘한 볼 배합에 타이밍마저 잃었으며 그의 괴이한 미소는 자신감과 더불어 그 농도가 더욱 짙어져 갔다.
“이거 하나는 확실하지. 분명히 K1이 나올 거다. 컵스가 거저 주운 K1을 빼면 뭐가 있겠나.”
이미 그의 등판을 기정사실로 하고 대비한 파이리츠의 해리슨 - 세리밸리 - 알바레즈 - 마티 - 매커친 상위 타선은 어제 전체 회의 때 감독이 심각한 표정으로 한 말을 떠올렸다.
“K1은 다들 알다시피 0점대 방어율을 그것도 2년 연속 달성한 외계인급 투수다. 평소 같으면 완봉패를 당해도 부끄럽지 않겠으나 오늘은 상황이 다르다. 그가 누구든 우린 무조건 이겨야 한다.”
이렇게 시작한 그의 K1 공략법은 다음과 같았다.
“포심 인코스와 떨어지는 패스트볼은 이 코스 전문인 알바레즈와 마티 그리고 매커친 외에는 건드리지 말아라. 너클볼이 들어오면 스트라이크가 된다는 보장이 없으니 자존심 내세우지 말고 가만 놔둬. 받아쳐도 우리 쪽 손해가 크다. 슬라이더와 스크루볼 그리고 싱커는 유인구라 여기고 자신이 없으면 건드리지 말 것. 그중 스크루볼과 싱커는 아직 손에 완전히 익지 않았다고 하니 참고해라. K1의 약점이라면 커브볼이다. 피안타율이 가장 높은 구질이고 투구 품을 보면 예측이 가능하다.”
100마일급 인코스 포심은 말할 것도 없고 손가락 간격과 두 손가락 관절에 주입하는 힘 조절로 변화를 주는 K1의 커터, 스플리터, 포크볼은 이미 낱낱이 분석 당한 지 오래였지만 그건 이론이었고 실제로 제대로 받아친 타자는 거의 없었다.
슬라이더, 스크루볼 그리고 싱커는 한 가족 변화구로 동일하게 들어오다가 홈에서 방향이 바뀐다. 보통은 손목의 모션으로 알아볼 수 있지만, K1의 공은 좀 잡을 수 없었다. 게다가 좌타자 상대용으로 익힌 싱커는 아직 안타를 맞지 않은 것으로 유명했는데 283도에 달하는 공 회전각 때문이었다. 그에 더해 타자가 스윙하는 순간 배트 밑으로 사라지는 ‘K1 전용 슬라이더’ 또한 마구로 통했다.
진정한 의미에서 마구는 단연 너클볼이리라.
마치 술에 취한 나비가 비틀거리며 자기 집을 찾아 들어오는 예측불허의 너클볼은 제어가 안 되기에 운명에 맡긴 공이라 부른다. 중학생도 빤히 보고 때릴 만큼 초저속으로 들어오기에 안 때리면 자존심이 상하고 엉성하게 던져 회전이 걸리면 완벽한 배팅볼로 전락하는 타자 친화적인 구종이기도 하다.
하지만 미트에 도착할 때까지 평균 0.75번 회전하며 지그재그로 서너 차례 방향을 바꾸는 K1의 나비공 중심을 받아친 운 좋은 타자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흐트러진 타이밍 때문에 아예 눈을 감고 휘두른 방망이가 간혹 일을 저지를 때도 있었지만, 회전 없는 공이라 내야를 벗어나지 않았다. 이러한 위력은 어릴 때부터 게임기 대신 잡아온 악력기로 다져온 엄청난 오른손 악력 덕분이라는 것은 이미 언론을 통해 잘 알려진 얘기다.
그래서 집중적으로 노린 것이 커브볼이었다. 횡적 무브먼트가 없는 구종이기에 노려서 받아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문제는 불여우급 포수 죤이 1회가 끝나기도 전에 파이리츠의 작전을 간파했다는 것이다.
‘내 친구의 커브가 그렇게 만만하더냐? 그러면 실컷 맛보게 해주마.’
마스크 뒤로 감춰진 죤의 입가에 돌연 웃음이 돌며 아론 할아버지의 말이 떠올랐다.
“죤, 이 할애비가 지금 너에게 줄 건 이것밖에 없구나. 20년간 포수 마스크 쓰며 얻은 비법이란다. 잘 듣거라.”
이틀 전 뒷마당에서 순우와 와일드카드게임 작전을 짜고 있던 죤에게 아론이 다가와 건네준 것은 다음과 같았다.
“배트를 세우는 타자는 낮은 볼에 강하니 약간 높게 던지고 눕히는 타자는 낮은 공으로 공략해라. 스탠스를 오픈한 타자에게는 아웃코스를, 그 반대의 타자는 밀어치기를 잘하니 인코스로 승부하고. 허리를 구부리거나 스텝이 크면 높은 공에 약하다. 머리를 많이 움직이면 커브로, 몸 전체를 움직이면 몸쪽 인코스로, 특징이 불규칙하면 일단 상하좌우 코너를 찔러보거라. 배트를 쉬지 않고 움직이면 우선 너클볼로 타이밍을 뺏은 후 기회를 만들어라.”
말을 멈춘 아론이 잠시 머뭇거렸다.
“이런 말까지 해야 하나....... 타석에 들어서는 타자에게 인사하는 척하며 그의 콤플렉스를 살짝 건드려 멘탈을 뒤집어놓으면 상대하기 훨씬 편하다만, 그건 추천하기가 좀 그렇구나. 네가 알아서 하거라.”
이어 다른 노인들의 협박성 격려가 잇따랐다.
“이런 비방을 전수받고도 안타를 맞으면 다시 여기 올 생각 하지 말아라.”
“월드시리즈까지 좀 편하게 가자, 꼬마야.”
이어 투수 출신 테리와 에디가 순우를 붙잡고 훈수를 뒀다.
“파이리츠 아이들 말이야, 네가 마운드에 오르면 별짓을 다 할 거다. 어떻게든 살아나가려고 일부러 공에 맞거나 기습번트를 대는 등 별수단을 다 쓸 거란 말이야. 너는 오히려 그들의 절박한 심리를 이용하거라.”
“그 미련한 매든 감독이 마지막 경기까지 투수를 물 쓰듯 하는 바람에 선발이든 계투든 여유가 없다. 순우야, 계투 없이 네가 끝까지 맡는다고 여기고 공을 아끼거라. 파울로 걷어내는 집요한 타자들은 안타로 내보내 견제구로 잡아라. 실점만 피하면 되는 거다. 포심은 7회 전에는 쓰지 말고.”
기우는 전력을 만회할 목적으로 파이리츠와의 승수 싸움에서 이겨 홈에서 경기를 치르기 위해 막판 서너 경기에 투수란 투수는 모조리 투입했지만 결국 1승 차이로 밀린 컵스는 얻은 것은 없었고 투수력 손실만 입었다. 여유가 있다 해도 단판전 경기에 순우를 내려보내고 누구를 올릴 수 있단 말인가. 결국, 와일드카드 게임은 5일 휴식을 가진 순우가 끝까지 책임져야 했다.
은퇴한 지 30년이 넘은 뒷마당 노인들, 그러나 번뜩이는 눈과 예리한 상황 판단은 여전히 현역이었다. 동시에 그들의 목소리에는 전에 느낄 수 없었던 간절함 또한 가득 배어있었다. 노인들의 염원대로 ‘염소의 저주’와 더불어 ‘뒷마당의 한’이 풀릴 것인가? 염소의 저주는 월드시리즈에 올라가면 풀리지만, 노인들의 한은 우승까지 가야 하는데.
경기는 5회를 넘어가고 있었으나 양 팀 모두 실점은 없었다. 하지만 포 피치 콜의 투구 수가 70개를 넘어서자 서서히 구위에 변화가 생기고 있었다.
“다들 들어봐. 안타를 못 치더라도 성급하게 굴지 말고 풀 카운트까지 끌고 가서는 파울로 걷어내라고.”
이렇게 구위에 눌려서는 아무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리조가 3회 들어 새로운 타격 작전을 제안한 것이 효과를 보고 있었다.
한편, 파이리츠 타선은 작전을 수정할 필요가 없었다. 평소 15% 미만이었던 K1의 커브 구사율이 서너 개 중 하나로 대폭 높아졌기 때문이다. 반겨야 할 변화임이 분명한데 타자들은 인상은 갈수록 구겨졌다.
“구 위원. 오늘따라 K1이 커브볼을 많이 쓰는군요. 여기에서 봐도 확연하게 탑스핀 구질을 볼 수 있습니다.”
“투수는 그날의 컨디션에 따라 유난히 잘 들어가는 구종이 있죠. 그런데 보통 유인구로 쓰는 커브를 저렇게 위닝샷으로 쓰는 것은 처음 봅니다. 다른 구종과는 달라서 타자에게 읽히기 쉬워 그리 자주 던지는 공은 아닌데요.”
“제가 봐도 그렇네요. 주로 속구-슬라이더와 속구-체인지업으로 승부하지 않습니까?”
“보통은 그렇죠. 한데 가만히 살펴보면 커브의 낙차가 천차만별이네요. 72마일(116km) 저속부터 86마일(138km)까지 속도가 다양하고 그에 따라 떨어지는 각도 또한 달라집니다. 받아치기 쉬운 커브볼이 아직 안타를 맞지 않은 것은 아마도 다양한 속도와 낙차의 폭, 그리고 무엇보다도 스리쿼터에서 4회부터는 거의 사이드암 수준까지 내려오는 팔의 각도 변화가 아닐까 싶네요.”
구정한의 해설처럼 파이리츠 타자들은 3회까지 속도와 낙차에 적응하지 못해 연신 헛방망이질을 했다. 두 번째 타순이 돌자 관중석에서 먼저 웅성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4회 첫 공은 76마일(122km)의 평범한 커브였지만 투수의 팔은 조금 전까지 익숙하던 스리쿼터가 아니었다.
“기억해, 22.5도야. 팔이 두 각도를 각각 기억하도록 연습해.”
내린 각도에서 던진 커브볼은 릴리즈 포인트는 물론 공이 휘기 시작하는 지점과 존에 걸쳐 들어오는 궤적이 달랐다. 속지 않겠다며 각오를 다지고 들어선 타자들의 배트는 당혹감으로 움직이질 못했고 순우는 이상적인 각도를 찾아내 그에 적합한 메커니즘까지 지적해준 마크와 래리의 얼굴을 떠올렸다.
'난 정말 운이 좋은 투수다. 이런 사람들을 만나다니.'
5회에 들어서도 당황한 타자들의 방망이는 침묵을 지키거나 허공을 갈랐고 세 번째 타자 포란코가 들어설 때 순우는 심호흡을 하며 고개를 들고 하늘을 쳐다봤다.
그 순간 끝없이 펼쳐진 푸른 가을 하늘이 열리더니 가슴속에 몰래 숨겨놓은 그 사람의 수줍음 띤 환한 미소가 보였다.
‘보고 싶은 지현!’
자신도 모르게 같은 미소로 답을 한 순우.
그런데 이 한 번의 미소가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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