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에 웅크린 늑대
시카고 링컨에 회색빛 땅거미가 젖어들 무렵 25인승 버스가 뒷마당 공식 입구 크리스네 우편함 앞에 섰다.
“어르신들 잘 다녀오세요. 고우 컵스 고우!”
영화 카사블랑카 험프리 보가트 스타일의 빈티지 양복에 중절모로 한껏 멋을 부린 여섯 노인과 오랜만의 외출이라며 곱게 차려입은 잉그리드 버그먼을 닮은 할머니 셋에, 제이슨네, 론과 죤 가족, 노총각 3총사에 이어 양 이사 일행이 모두 버스에 오르자 대니가 손을 흔들며 배웅을 했다.
“이봐, 에디. 저 아이는 안 가나?”
“연습한다며 남겠다는데 할 말이 있어야지.”
“오늘 같은 날도? 정말 지독한 놈이군. 어째 우리 뒷마당에는 독한 놈들만 모여드나?”
독한 노인들에게 독종 인증을 받은 연습벌레 대니의 고집을 꺾은 이는 따로 있었으니,
“어? 대니 삼촌 안 가? 왜? 같이 가. 엉~엉”
아빠 다음으로 친한 대니가 보이지 않자 마이클이 삼촌을 따라 남겠다며 버스 밖으로 나가려 했고 말리던 미셸마저 피터를 안고 내리려 하자 연습벌레는 대번에 천하의 역적이 되었다. 예상 못 한 상황이 벌어지자 당황한 대니를 향해 당장 버스에 오르라는 크리스의 호통에 자신도 모르게 땀으로 뒤범벅이 된 운동복을 걸친 채 맨 뒷좌석에 앉게 된 그의 무릎 위로 그제야 마이클이 만족한 웃음을 지으며 올라앉아 출발 사인을 보냈다.
“이제 출발~”
링컨에서 구장까지는 직선거리로 고작 3마일(4.8km). 세월을 낚아가며 오색 낙엽으로 뒤덮인 멋들어진 거리로 빙빙 둘러가도 10분 이상은 걸리지 않는 짧은 거리였기에 장거리 여행을 기대했던 마이클의 입은 심술로 실룩거렸다.
실룩거림은 또 있었다. 입이 아닌 양 볼이, 심술이 아닌 진한 감동으로 말이다. 링컨에서 리글리 필드로 가는 길, 느긋하게 걸어가도 한 시간이 안 걸리는 길이건만 노인들에게는 낯설었다. 청춘과 젊음을, 삶을 온전히 바친 구장과 집을 오가던 이 길이 낯설다니....... 스스로에 대한 원망과 컵스에 대한 애증으로 마음 문을 닫고 지내기 시작한 70년대 이후 첫 방문이었기에.
구장 주차장에 도착한 일행은 들뜬 마음으로 내렸지만, 노인들은 쉽게 구장의 땅을 밟을 자신이 없었다. 버스 안에서 구장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그들은 잠시 고개를 숙이더니 케이트와 미셸의 부축을 받으며 내렸다.
“대충 계산해봐도 40년 만이로군.”
“집도 길도 건물까지 전부 낯선데 우리 구장은 옛날 그대로야.”
“왜 이리 오래 걸렸을까?”
“......."
마침 루리 아동병원 마크가 붙은 대형 버스가 들어오더니 컵스의 유니폼으로 맞춰 입은 아이들이 앨리스와 다른 간호사의 부축을 받으며 하나둘씩 내렸다. 흰 붕대를 머리에 감거나 깁스를 댄 아이도 있었다. 잠시 후 소형 버스가 들어서고 게리 코치를 선두로 힌스데일 클럽 아이들이 내렸다.
“앗, 찰스 할아버지다!”
“테리 할아버지~”
노인들과 뒷마당 패밀리, 루리의 아이들 그리고 힌스데일 꼬마 선수들. 뒷마당 파티가 열릴 때면 모이는 정규 멤버들이다. 서로를 알아보고 반가워 손을 맞잡은 아이들이 이내 노인들에게 달려가 안겼고 흐뭇한 미소가 모두의 입가에 걸렸다.
이미 해가 진 구장은 조명등으로 대낮 같았다. 구장 안내원을 따라 그라운드 전체가 시원하게 펼쳐진 프리미엄 석 앞쪽에 자리를 잡자 밤새 폭음한 흔적을 말끔히 지운 리처드가 어깨에 기념품으로 가득 찬 자루를 맨 아들과 사장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뜻밖의 선물을 한 아름 받아든 아이들의 함성이 끊이질 않았고 황제 또한 빈손으로 친구들을 맞이하지 않았다.
“자, 받으라고.”
“흐흐. 내 이럴 줄 알고 점심은 조금 먹었지.”
“나도!”
리처드가 건넨 프랭크 샌드위치와 윈디시티 맥주를 받아든 노인들은 마법에라도 걸린 듯 60년대로 돌아갔다. 경기 전이나 후에 혹은 도중이라도 허기진 배를 채워주던 바로 그 샌드위치가 아니던가. 진 날에는 한숨으로 마셨고 이긴 날이면 넘치는 거품이 희열로 변해 마셨던 윈디시티 맥주까지 손에 쥐자 까맣게 잊었던 선수 시절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르기 시작했다.
“무한 리필이야, 오늘만!”
옛 구단주의 익살에 무심코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포수 뒤편 좌석은 꽉 찼고 대부분 동년배였는데 다들 맥주잔을 들고 있었다.
“1차전 때 오지 못한 팬들이지.”
리처드의 설명에 노인들이 고개를 돌려 그라운드에 인접한 내야석을 훑어보니 그곳도 사정은 비슷했다.
“1차전을 놓친 올드 팬들이 생각보다 많더군.”
그들 대부분 손에도 같은 먹거리가 쥐어져 있었다. 구장 요원들이 총출동하여 샌드위치와 맥주를 나눠주느라 진땀을 빼고 있었다.
“오늘도 여긴 2달러 75센트에 내야는 1달러 50센트인가?”
“허허. 뭘 그런 걸 묻나?”
‘얼핏 봐도 우리처럼 공짜로 초청받아 온 올드팬이 삼천 명은 넘을 듯한데....... 부자는 망해도 삼 년은 간다고 했으니 걱정 말자.’
곧 일반석까지 가득 들어찬 구장이 콩나물시루가 되자 1차전처럼 올드팬들의 취향에 맞춘 흑백 뮤직비디오가 나오던 대형 전광판에 안내 방송과 함께 갑자기 알아보기 힘든 빛바랜 사진이 뜨기 시작했다.
“고우 컵스 고우! 지금부터 사진으로 컵스의 역사를 돌아보겠습니다.”
이날 참으로 다양한 팬서비스가 이뤄지고 있었다. 창단 당시 짝은 희미한 장면을 시작으로 1908년 우승 기념 사진에 19세기 구단 이름과 당시 사용하던 구장의 모습이 전광판을 메웠다.
“얘들아, 조금 전 봤듯이 우리 컵스가 처음 시작할 때에는 시카고 화이트 스타킹스였단다. 조금 촌스럽지? 얼마 후 시카고 콜츠로 바뀌었고 시카고 오펀스를 거쳐 지금의 컵스가 되었단다. 잘 기억해야 한다.”
“예. 할아버지.”
“구장도 처음부터 리글리 필드는 아니었지. 비만 오면 진흙탕이 되던 23번가 그라운드를 시작으로 레이크 프론트 파크, 웨스트사이드 파크를 거쳐 사우스 사이드 파크를 잠시 사용하다가 지금 이곳으로 옮겨왔단다.”
구단의 홍보실 직원들이 오랫동안 수집하여 야심 차게 만든 영상물은 한 국가의 역사 교과서처럼 펼쳐졌고 뒷마당 노인들은 루리와 힌스데일 아이들에게 사진을 설명하느라 분주했다.
“아, 저건.......”
“그래, 바로 저 때였지.”
대공황과 세계대전 당시 컵스의 경기 모습이 한동안 이어지다가 나타난 한 장의 흑백 사진.
양복에 코트를 걸치고 페도라를 쓴 빌리 시아니스가 정문 입구에 서서 왼팔로 염소를 안고는 오른손에 쥔 두 장의 입장권을 건네주려 하고 유니폼을 입은 직원은 입장을 거부하며 손을 내젓는 바로 그 사진.
1차전에서 이미 풀린 ‘염소의 저주’ 주인공이 나타나자 여전히 트라우마는 완전히 떨쳐내지 못했는지 여기저기에서 복잡한 감정이 실린 신음이 흘러나왔다.
“또 꺼내고 싶지는 않네만.......”
그때 리처드가 자못 진지한 얼굴로 노인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1945년 당시 이 장면을 보도한 기자는 시아니스가 이곳에서 월드시리즈가 열리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썼어. 그 기사는 나도 읽은 기억이 나지.”
‘다들 알고 있는데 새삼스레 왜?’
의아하게 쳐다보는 친구들의 시선을 무시한 채 리처드의 말은 계속되었다.
“그런데 말이야. 당시 정문에서 시아니스와 승강이를 벌인 직원의 말은 조금 달라. 그가 들은 말은 이랬어.”
<컵스는 더 이상 우승을 못 할 거다. 리글리필드에 염소를 입장시키지 않는 한 다시는 월드시리즈에서 승리하지 못할 거라고! The Cubs ain't gonna win no more. The Cubs will never win a World Series so long as the goat is not allowed in Wrigley Field!>
“당시 직원을 불러 그의 말을 확인한 아버지는 코웃음을 치며 무시했지. 그 쓸데없는 염소의 저주가 시간이 흐르면서 내용마저 이런저런 모양으로 바뀌어 컵스를 조롱하는 것에 더욱 불쾌해하셨고 말이야.”
“.......”
“월드시리즈가 이곳에서 열렸으니 다들 1차전으로 저주는 풀렸다고 하는데, 자네들도 그렇게 보는가? 난 그렇지 않네.”
“.......”
“우승하기 전까지 그 저주는 어둠 속에 웅크린 늑대처럼 컵스를 노려보며 여전히 그대로 있는 거야.”
“.......”
“그리고 난 자네들과 함께 오늘 그 늑대가 어둠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보고 싶네.”
그 사진 이후 어니 뱅크스나 행크 사우어 같은 컵스의 전설적인 선수들 사진이 나오고 2008년 4월 23일에 기록한 만 번째 승리 뉴스가 소개되면서 박수가 터져 나왔지만, 노인들은 조금 전 들은 리처드의 말을 되새겨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뭐야? 그럼 아직 그놈의 저주는 진행형인가?”
“결국, 오늘 이겨야 저주가 풀린다는 말이군.”
이심전심일까, 불펜에서 가볍게 몸을 풀며 마운드에 오를 준비하고 있던 순우의 생각 또한 비슷한 흐름을 타고 있었다. 카디널스를 상대로 퍼펙트게임을 달성하고 죤과 함께 뒷마당에 돌아왔을 때 노인들은 평소와 달리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퍼펙트게임 축하한다.”
“우리가 젊은 시절의 약속 때문에 여전히 울타리 없이 사는 것을 그리 안타깝게 여기지 말아라.”
“너희들이 우리 컵스에 커미셔너스 트로피를 안겨주면 남은 삶을 편하게 지내마.”
결국은 월드시리즈 우승을 봐야 한을 풀고 울타리를 치겠다는 그들의 말은 그 후 돌에 새긴 글처럼 잊히지 않았다.
“순우야, 월드시리즈 우승도 좋다만 어느 경기든 최선을 다하는, 프로야구 선수로서 투혼을 불사르는 모습을 보여주거라. 지현이가 시카고까지 간 것은 우승 트로피가 아닌 너의 그런 모습을 보기 위함인 것을 기억해라.”
순우의 생각이 낮에 나눈 춘천 할아버지와의 통화 내용으로 이어졌고 답답한 마음에 올려다본 어두운 밤하늘에 시드니의 식구들과 아울러 지현의 얼굴이 환하게 떠오르자 온몸을 짓누르던 압박감이 가벼워지면서 동시에 가슴이 뜨겁게 끓어올랐다.
‘투수는 마운드에 올라 공으로 모든 것을 보여준다. 우승도 트로피도, 좋아하는 사람마저도 공에 우선할 수는 없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오늘도 나의 전부를 공에 실어 던질 것이다.’
“플레이 볼!”
차분한 국민의례와 어느 유명 인사의 시끌벅적한 시구에 이어 드디어 주심의 콜이 구장을 울리면서 경기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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