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 끝에서
1차전에서 로열스를 4-0으로 누른 컵스가 2차전마저 론을 앞세워 5-3으로 연승을 달리자 한쪽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던 우승에 욕심을 내며 내친김에 4연승을 노렸고 못 해도 1승 1패를 점쳤던 다른 한쪽은 몹시도 당황한 표정에 심하게 구겨진 인상을 거두지 못했다.
홈구장 카우프만 스타디움에서 펼쳐진 3차전에서 화려하게 부활한 타선과 로열스가 자랑하는 최강 불펜 3인방의 호투에 힘입어 7-2로 낙승하자 그제야 구겨진 인상을 푼 로열스의 요스트 감독은 한숨을 돌리고는 4차전 선발로 조니 쿠에토를 내세웠다. 쿠에토는 지난해 20승을 올려 순우와 더불어 사이 영 상의 강력한 후보 그룹에 올랐던 31세의 우완 투수로서 올해 11승에 그쳤지만 여전한 구위를 뽐내며 선발진의 핵심 역할을 감당해왔다.
그에 맞선 컵스의 4차전 선발은 존 레스터. 지난해까지 보유했던 ‘10월의 사나이’ 타이틀에는 미치지 못해도 로테이션을 꾸준히 지키며 자기 역할을 해준 그가 6회까지 3실점 이하로 버티면 승산이 있다고 믿은 매든 감독의 자기중심적 소망은 5회를 넘기지 못했다. 구장이 떠나갈 듯 홈 팬들의 열광적인 응원 가운데 쿠에토가 한 때 사이 영 상 후보다운 매서운 강속구와 예측하기 힘든 변화구로 7회까지 무실점으로 호투한 반면, 레스터는 5회에 집중타를 맞고 3점을 내주며 모래성처럼 무너졌다.
‘3점이라······. 어쩐다? 내일 5차전을 위해 남겨둬야 하나 아니면 끝까지 밀어붙여야 하나?’
추격조라 이름 붙은 패전 처리팀을 붙일지 아니면 포기하지 않고 믿을만한 계투진을 올려 끝까지 따라갈지 판단을 못 하던 감독은 결국 우드와 스트롭을 올리며 승리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였다.
정작 감독의 결정에 환호성을 지른 이들은 팬이었다. 로열스 말고 컵스 팬 말이다. 캔자스시티까지 700마일의 장거리를 달려와 준 컵스의 대규모 원정 팬들은 볼륨을 최고치로 높이며 열띤 응원으로 화답했다.
“구 위원, 이곳이 카우프만 스타디움인지 아직 리글리 필드인지 헷갈릴 정도로 컵스의 팬이 많이 보이는데요.”
“하하, ‘고우 컵스 고우’는 어느 구장에 가나 볼 수 있죠.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충성스런 팬으로 공인된 컵스 팬들은 만 패를 포함하여 수없이 반복되는 패배의 시즌에도 불구하고 꾸준한 열정과 사랑으로 컵스를 응원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미 우리가 중계하면서 여러 번 목격하지 않았습니까.”
승보다 패가 훨씬 많을 때도 변치 않는 사랑을 보내던 컵스 팬들이 과거의 모습과는 달리 좋은 성적을 올리고 있는 컵스를 보며 올해에는 드디어 한을 풀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과 팀에 대한 자부심까지 더해 새로운 응원 패턴을 보이기 시작했다.
“보통 구장에 가면 홈 팬들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그런데 이곳 캔자스시티도 그렇고 다른 구장을 가 봐도 컵스의 팬들이 쉽게 보이는데요.”
“사실 가깝게는 수백 마일, 멀게는 대륙을 가로질러야 하는 장거리 원정 경기까지 따라가 응원을 펼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죠. 그래서 구장은 주로 홈 팬들이 대부분이고 응원 또한 홈팀에 일방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보통입니다. 원정 팀 플레이에는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반응이 없고요. 아예 투명인간 취급할 때도 있어요.”
그런데 올해 컵스 원정 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관중 수가 껑충 뛰었다. 이는 컵스의 원정 경기 평균 관중 35,078명을 봐도 쉽게 알 수 있으며 이 수치는 빅리그 30팀 중에 가장 많고 2위 LA 다저스보다 2,300명이 많다. 홈이든 원정이든 유독 한 팀에 관중이 많이 몰리는 현상은 100년을 훌쩍 넘긴 메이저리그 역사에서도 매우 보기 드문, 어쩌면 처음 있는 현상이다.
“원인이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글쎄요. 우선 시카고 컵스의 팬들이 전국적으로 고르게 퍼져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제조업의 메카였던 시카고 지역이 대공항을 거치면서 대대적인 이주가 있었는데 초창기에는 주로 남부와 서부로 퍼졌다가 지금은 미국 전역에 시카고 사람들이 없는 곳이 없다고 합니다. 몸은 다른 도시에 살아도 고향 야구팀에 대한 사랑은 여전했고 그 팬심은 ‘4대 응원’에서 보듯 대를 이어 전해지고 있지요. 또 다른 이유를 들자면······.”
방송 또한 한몫했다. 컵스의 모든 경기를 생중계하는 시카고 지역 케이블 방송사 WGN-TV의 야구 중계는 미국 어디에서든 볼 수 있다. 다른 지역에 거주하는 컵스 팬들뿐만 아니라 중계방송을 통해 컵스를 대하는 새로운 팬들이 꾸준히 생기고 있었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를 들자면 올해 컵스가 일으킨 돌풍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만년 최하위에 머물다가 올해 들어 전혀 컵스답지 않은 모습을 보이며 성적이 급상승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다 보니 컵스의 희망 브라이언트와 강타자 리조 그리고 점점 뛰어난 구위를 보이는 아리에타와 과거의 명성을 유지하고 있는 레스터과 같은 스타급 플레이어들의 인기가 대단한데요. 하지만······.”
인기를 끄는 스타급 선수를 얘기할 때 K1을 빼면 할 말이 없다.
그가 등판하는 경기는 홈이든 원정이든 모든 티켓이 일찌감치 매진되어 암표상이 버젓이 활개를 치고 다녔다. 오죽하면 그가 선발로 오르는 날을 ‘브로커 데이’라 부를까. 지난해 0점대 방어율로 신인상과 사이 영 상을 거머쥔 그가 올해 사이 영 상은 기본에 MVP까지 찜했다는 데에 아무도 이견을 내세우지 않았었다. 기록적인 저지 판매량과 광고 시장 선호도 1위를 차지하며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높은 시장 가치를 지니고 있는 선수가 소속된 팀에 대규모 원정 응원단이 따라붙는 건 당연했다.
“고우 컵스 고우”
“고우 컵스 고우”
감독의 오기가 담긴 승부욕과 열성 팬들의 화끈한 원정 응원은 궁합을 짝짝 맞추며 선수들에게 힘이 되어 주었으나 딱 거기까지였다.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켈빈 헤레라 - 라이언 매드슨 - 웨이드 데이비스로 이어지는 로열스의 막강 계투 3인방은 쿠에토에 이어 무실점 행진을 계속했고 9회에 오른 로열스의 수호신 그렉 홀랜드가 로봇 청소기처럼 깔끔하게 마무리하며 승리를 쓸어 담았다.
로열스는 이날의 승리로 팬들이 보는 앞에서 1차전 K1에 당한 치욕의 완봉승을 기분 좋게 설욕하며 체면을 세웠고 컵스는 원정 팬에 대한 미안함과 아울러 소중한 불펜진 낭비라는 추가 손해를 떠안았다.
전적 2-2로 시리즈를 원점으로 돌린 양 팀이 5차전의 중요성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래서 요스트 감독이 내세운 5차전 선발은 24세의 우완 요다노 벤추라.
180cm의 작은 키에서 나오기 힘든 강력한 패스트볼을 주 무기로 시즌 13승을 올린 벤추라는 최고 구속이 무려 103마일에 평균 구속 97마일을 자랑하는 최상급 파이어볼러로서 속도로만 따진다면 메이저리그 전체 선발 중 단연 1위다. 성격이 다혈질이라 판정에 불만이 생기거나 연타를 맞아 흔들리게 되면 마운드의 깡패로 변신하여 아무에게나 주먹을 날리는 심각한 단점은 그의 강속구에 가려 보이지 않을 정도다.
“4일 쉰 순우는 어렵겠고······.”
고민을 거듭한 매든 감독의 선택을 받은 컵스의 선발은 35세의 우완 댄 해런. 시즌 내내 5선발과 불펜을 오가며 불규칙한 등판을 잘 소화해 냈고 포스트시즌에서는 불안한 계투진의 틈을 메꾸며 인상적인 피칭을 보여 감독의 눈도장을 받아냈다.
젊은 시절 패스트볼, 너클 커브에 슬라이더와 스플리터를 구사하며 맞혀 잡는데 능한 플라이볼 투수였지만 나이가 들고 구속이 하락하자 투심과 커터를 장착했다. 와인드업에서 왼쪽 다리를 키킹한 뒤 정점에서 1초 정도 멈춘 후에 투구하는 특이한 폼으로 더 유명한 선수다. 오랜 선수 생활로 터득한 노하우로 상대의 분석을 역으로 이용하는 작전을 구사하여 전력분석원들의 리포트를 무용지물로 만드는 능구렁이 수법의 명수다.
타이밍을 맞추기 힘든 투구폼에 정상급 커맨드를 자랑하는 투심과 커터 그리고 상대 팀의 수를 제대로 읽는 통찰력이 모두 협력하여 선을 이루면 사이 영 상쯤은 가볍게 거머쥘 언터처블 구위를 보이지만, 문제는 항상 그렇지는 않다는 것. 너무 잘 던져 선발로 점찍은 다음 경기에서는 그야말로 사흘 굶은 개도 고개를 젓고 앞발을 흔들며 사양할 수준의 죽을 쒔다. 이런 이유로 그는 여전히 선발과 계투의 경계를 오가고 있었다.
이를 잘 아는 매든 감독은 독실한 크리스천 아내가 즐겨 쓰는 ‘믿는 대로 될지어다’를 주문처럼 외치며 언터처블 쪽에 배팅했건만, 신의 기준에 그의 믿음이 충분치 않았던지 절반의 높은 확률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반대로 흘렀다.
올해 해런의 공을 처음 받아보는 로열스의 타선은 결코 녹록하지 않았다. 괴상한 투구폼은 해런만의 독문기술이 아니었고 커맨드 좋은 공 또한 그의 전매특허가 아니었다. 게다가 로열스가 해런을 모르는 만큼 그 또한 로열스가 처음 들어보는 아프리카 민요만큼이나 낯설었다.
낯선 만큼 얻어맞는다는 야구계의 속설을 온몸으로 증명한 해런이 4회를 버티지 못하고 내려가고 뒤를 이은 계투진의 공을 두들겨 손쉽게 담장을 넘긴 로열스 타자들의 화려한 배트 플립이 이어지면서 악몽과 같았던 5차전이 끝났다. 첫 두 경기를 2연승으로 장식하며 장밋빛 스카프를 목에 두른 채 우승 헹가래를 받는 모습을 남몰래 상상했던 감독은 집 나간 며느리가 갈 데 없어 결국 집으로 향하듯 고개를 떨구고 조용히 시카고로 돌아왔다.
전적 2승 3패.
로열스는 3연승의 신바람을 탔고 컵스는 벼랑 끝에 몰렸다.
- 작가의말
다 아시겠지만, 낯선 만큼 얻어맞는다는 표현은 작가의 말장난일 뿐, 절대 야구계의 속설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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