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A Wonderful World
“오늘 1차전은 K1이 던지니 점수를 많이 낼 필요 없이 초반 득점에 집중할 겁니다. 선취점을 내야 쉽게 갈 수 있어요. 남은 시리즈는 좀 더 고민을 해야 합니다. 이전 시리즈에서 5차전, 7차전까지 가느라 주전들이 지금 거의 탈진 상태에요. 선발진은 로테이션으로 돌리면 되지만 문제는 라인업입니다. 타선이 믿을 만하면 강공을 택하고 굳이 번트가 필요 없겠지만, 지금은 병살을 피하고자 매번 번트를 댈 수밖에 없는 형편입니다. 특히 우린 하위타선이 약해요. 필요할 때 한 방을 때려주는 클러치 히터가 아쉽죠. 리조와 브라이언트가 있지만, 기복이 있습니다.”
경기 직전 인터뷰에 응한 매든 감독의 말처럼 연이은 혈전으로 기운이 빠진 타선이 가장 큰 걱정거리였다. 포스트시즌은 한 방이 좌우하는 단기전이라 할 수 있는데 시즌 30홈런을 넘긴 타자는 리조가 유일하다. 26개를 기록한 브라이언트를 제외하면 20을 넘긴 거포형 타자가 없는 컵스가 월드시리즈까지 올라온 것이 기적이었다.
“이런 현실에서 K1마저 없었다면.......”
생각하기도 싫은 가정에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 감독의 눈에 마운드에 올라 투구를 시작한 그의 모습이 들어왔다.
1회 초 마운드에 오른 K1은 구종 별로 상하좌우 구석을 찔러보며 심판의 존을 확인했다. 2구로 던진 투심이 인코스 존을 걸쳐 들어갔어도 주심의 팔이 움직이지 않자 죤은 주먹을 쥐었다 펴 보이면서 같은 공을 주문했다. 불의의 안타를 막기 위해 회전을 최고 수준으로 걸어준 공이 이번에 공 반 개 차이로 중앙으로 들어오자 그제야 주심이 스트라이크를 줬다.
“구 위원, K1 투수가 유난히 1회에 투구 수가 많고 오늘도 예외는 아닌데, 그 이유가 뭡니까”
“주심마다 존 기준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배터리 눈에 스트라이크라 해도 주심 눈에 살짝 비껴 들어오게 보이면 볼이죠. 그래서 구종을 달리하여 존 이곳저곳을 찔러보면서 주심의 존을 파악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고의로 애매하게 걸쳐 던져본다는 말씀이군요.”
“그렇게 봐야죠. 1회에는 타자와의 결투와 아울러 투수와 주심 사이의 묘한 기 싸움도 벌어집니다. K1과 같은 송곳 제구력의 투수들은 1회에 1, 2인치 차이를 주면서 주심과 무언의 네고를 벌이다가 2회부터는 주도권을 잡아나가게 되는 거죠. 이렇게 스트라이크존을 넓혀가며 타자를 공략하는 K1의 능력이 참으로 탁월합니다.”
“그런데, 부상자투성이의 라인업과 거의 탈진 상태의 다른 선발진과 비교하면 K1은 정말 무쇠 몸이군요.”
“아무래도 부드러운 투구 동작과 낮은 앵글에서 벗어나지 않는 팔의 위치가 부상의 위험에서 그를 보호해 준다고 봐야겠죠. 구종의 다양함이나 구위뿐만 아니라 이렇게 부상 없이 롱런하는 투구폼으로 인해 커쇼나 범가너같은 리그를 호령하는 초특급 투수들보다 더 나은 평가를 받고 있어요.”
“어, 그런데 지금 나오는 노래는......."
공수 교대가 이뤄지는 순간 장내 대형 스피커에서 빙 크로스비가 부른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흘러나왔다. 1940년대를 뒤흔들었던 최고의 히트송이 나오자 K1의 삼진에도 별 반응이 없던 내야석 노인들의 얼굴에 감회가 서리기 시작했다. 아무 고민 없이 파란 잔디 위에서 뛰놀던 어린 시절과 함께 잊지 못할 45년도의 그 경기가 떠오른 것이다.
이어 프란코스 크레이그의 니어 유(Near you)와 밀러 형제가 부른 종이 인형의 흑백 뮤직비디오가 전광판을 채우자 하나둘씩 양복 주머니에서 하얀 손수건을 꺼내 들기 시작했다. 염소의 저주가 풀리는 날 노인들은 과거의 향수에 젖어들었고 이를 지켜보던 외야석의 젊은이들이 스스로 자제하여 요란한 응원을 멈추자 이내 장내는 숙연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포수석에 앉은 죤은 이런 희한한 분위기에 편승할 마음의 여유가 전혀 없었다.
“친구. 로열스 타자들은 시즌 내내 한 번밖에 겨뤄보지 못해 나도 잘 몰라. 데이터를 봐도 아리송하고. 어제 아론 할아버지가 이럴 때는 일단 바깥쪽으로 빼는 공이 안전하다고 하시더군. 타자들 성향을 파악할 때까지는 아웃코스로 승부하자고.”
오전 연습시간에 순우와 세운 죤의 작전 방향은 옳았다. 무릎 앞에서 꺾이는 슬라이더와 고속 회전이 걸린 투심 그리고 좌타자의 바깥쪽을 빠져나가는 서클 체인지업에 로열스의 좌우 타자들은 멀뚱멀뚱 쳐다보다가 루킹 삼진으로 응답했다. 리그가 달라 소문으로만 듣다가 이날 처음 K1과 대결해보는 타자들이 그제야 0점대 방어율의 의미를 몸소 체험하기 시작했다.
4회 들어 타순이 돌자 아웃코스를 노리고 들어온 타자들은 완전히 새로운 구종에 다시 한 번 절망했다. 100마일 인코스 포심과 절묘하게 떨어지는 포크볼 그리고 포크볼과 거의 같은 지점을 통과하다가 뚝 떨어지는 커브볼에 방망이는 연신 허공을 갈랐다. 흔히 보는 슬라이더는 아예 들어오지도 않았다.
“친구. 자네 말대로 7차전까지 갈 수 있다고 보고 디셉션과 나비공은 오늘 아껴두자고.”
양 측 전력을 고려하면 아무래도 7차전 끝판까지 갈 것 같다는 순우의 예상에 죤은 너클볼을 비롯하여 로열스 타선을 상대할 비장의 무기 한 세트를 숨겨 놓는 것이 좋겠다고 여기며 7회부터는 그간 파악한 타선의 약점을 파고들었다.
“로열스의 도루 능력은 리그 최상급인데 K1의 구위에 눌려 출루의 기회를 만들지 못하니 안타깝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K1의 공을 처음 받아보며 당황한 기색이 역력합니다.”
중계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시즌 101타점에 169안타를 기록한 로열스의 강타자 로렌조 케인이 포크볼을 올려쳐 드디어 이날 첫 안타를 신고하며 1루로 나갔다.
“아, 드디어 로열스의 반격이 시작되는군요. 케인은 빠른 발과 정확한 타이밍 센스로 시즌 26개의 도루를 기록한 선수인데요. 역시나 특유의 넓은 스트라이드로 도루를 노리고 있군요.”
“아, 투수의 1구를 노려 뛰었습니다. 2루로, 2루로, 멋진 슬라이딩으로 파고들었는데요.”
2루심의 팔은 볼 필요도 없이 누가 봐도 아웃이었다. 빠른 발로 유명한 로열스가 정작 리그 최강의 도루 저지율을 자랑하는 컵스의 포수에 대해서는 캄캄했던 모양이다. 3루면 모를까 2루 도루에는 자신감이 넘쳤던 케인이 걸리자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쳐다보며 허무한 표정을 지었다.
기회는 또 찾아왔다. 시즌 178개의 안타를 때려내며 로열스를 지금의 위치로 이끈 좌타자 에릭 호스머가 8회 첫 타석에서 포크볼을 받아쳐 1루로 진루했으나 조금 전 죤의 송구능력을 본 터라 도루에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그 또한 비명횡사의 액운을 피할 수 없었다. 순식간에 몸을 돌려 3루 주자를 잡아내는 K1의 견제구에 대해서도 캄캄했기 때문이다. 죤의 손짓을 본 K1이 전광석화처럼 날쌘 동작으로 발판에서 발을 빼고 몸을 비스듬히 돌려 미처 1루로 향하기도 전에 팔을 휘둘러 던진 공에 호스머는 뒤늦게 반응을 보이며 슬라이딩으로 되돌아오다가 태그아웃 당했다.
K1의 구위에 내내 눌리다가 간신히 잡은 두 번의 기회에서 허무하게 포수에게 잡히고 투수의 견제구에 걸려 마지막 기회까지 날리고 들어온 로열스의 붕괴된 멘탈은 리그 1위라는 수비력에도 영향을 미쳤다.
선발 볼케즈가 자랑하는 인코스 패스트볼을 받아쳐 1루로 나가 자타가 인정하는 최고의 철벽 수비진 사이에서 초원을 누비는 종마처럼 2루에 이어 3루까지 훔쳐 발 빠른 로열스의 자존심을 뭉갠 이는 바로 죤이었다. 그가 공격에서 결정적인 플레이를 해주고 수비에서는 2루 송구로 첫 주자를 잡아내 이날의 소위 ‘미친’ 선수가 되었다.
“0점대 방어율로 신인상에 사이 영 상 받은 K1이니 저 정도는 당연히 해야지.”
원래 잘하는 K1의 화려한 삼진 쇼에도 별 반응 없이 무덤덤하던 시니어 관중이 죤의 화끈한 플레이에 드디어 환호를 보내기 시작했고 전광판의 뮤직비디오가 70년대 팝송으로 시대적 발전을 이루며 남녀노소가 함께 흥얼거리자 내야석과 외야석 사이에 존재하던 벽이 서서히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고우 컵스 고우”
“고우 컵스 고우”
연세 지긋한 노신사들에게 점령당해 썰렁하던 관중석에서 모처럼 컵스 팬 다운 흥겨운 소리와 함께 터져 나온 응원에 고속으로 풀 충전된 컵스의 타선은 굳이 번트를 댈 필요도 없이 상하위 타선이 돌아가며 철벽 수비를 자랑하던 로열스를 신나게 두들겼다. 실신 상태의 로얄스 수비진은 그 명성이 땅에 떨어지며 한동안 시카고에서는 ‘수비의 명문’ 문구를 사용하지 못했다.
하지만 로열스도 건진 것이 하나 있었으니,
“제발 저놈의 노래 좀 꺼!”
신들린 컵스의 타선에 신나게 얻어맞는 동안 구장의 모든 남녀노소가 전광판의 영상과 음악에 따라 옆 사람의 손을 잡고 리듬을 타며 부른 노래는 로열스의 지옥송이 되었고 선수들뿐만 아니라 요스트 감독까지도 귀를 막고 고개를 흔들었지만, 귓가를 파고드는 관중의 구수한 떼창은 막을 수가 없었다. 덕분에 노래 하나는 확실하게 배웠다. 이날 밤 잠자리에서 자신도 몰래 흥얼거리지는 않았을까.......
푸른 나무들, 붉은 장미가 보이네요
당신과 날 위해 피어나는 게 보여요
혼자 생각하죠, 얼마나 멋진 세상인가 하고요.
I see trees of green, red roses too.
I see them bloom, for me and you.
And I think to myself, what a wonderful world.
대책 없이 침몰해가는 로열스를 지켜보며 손에 손을 잡은 구장의 모든 이들이 행복한 미소를 띤 채 가사를 음미하며 한마음으로 부른 What A Wonderful World에 어쩌면 이미 고인이 된 루이 암스트롱이 벌떡 일어나 흥겨운 얼굴로 트럼펫을 잡을지도 모르겠다.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이 보이네요
축복받은 화창한 날, 어둡고 신성한 밤
혼자 생각하죠, 얼마나 멋진 세상인가 하고요.
하늘에 떠 있는 너무나 예쁜 무지개색
지나가는 사람들 얼굴에도 떠 있네요
악수하며 인사를 나누는 친구들이 보여요
그들은 사실 서로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죠.
리글리 필드에서 시작된 합창이 시카고 밤하늘 구석구석 울려 퍼지며 1차전의 막이 내렸다.
그리고 그 누구도 염소를 운운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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