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에 보인 묘기
그날 밤 숲속의 궁전에서 일어난 일을 정확히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어깨 위에서 번쩍거리는 별들을 자랑하던 파티장의 군인들은 졸지에 쫓겨나갔고 어디선가 술을 마시다가, 어쩌면 이번에도 공짜 술을 즐기다가 허겁지겁 달려온 김일국 장관은 시종일관 고개를 숙이고 ‘예’ 외에는 아무 말도 못 한 채 메모지에 대화 내용을 적어 내려가기 바빴다. 순우와 지도자는 밤늦게까지 대화다운 대화를 나눴고 가끔 호쾌한 웃음소리가 홀을 울렸다.
감히 지도자의 비밀스러운 대화를 엿들은 대담한 이는 없었어도 이때 결정된 일을 모르는 사람 또한 없었다. 곧 언론에 낱낱이 공개되었기 때문이다.
다음날 오전 정식 문서로 합의 내용을 전달받은 순우는 더이상 평양에 머물 필요가 없었다. 편한 마음으로 명소를 둘러보라는 친절한 제안을 한마디로 거절하고는 전보다 훨씬 정중해진 안내원의 호위를 받아가며 방북 루트 그대로 남쪽으로 향했다. 막막했던 방북길 심정에 비해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개성에 도착한 순우는 개성 시장의 영접을 받고 통일관 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함께했다.
“이곳은 예로부터 전해오는 놋반상기 상으로 차려냅네다.”
시장의 설명을 듣고 고개를 돌리니 수많은 그릇이 식탁 위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것이 보였다. 격식을 갖추어 밥상을 차릴 때 사용하는 노란 놋그릇 세트 20여 개가 각각의 손님 테이블에 차려져 있었는데 밥그릇을 포함하여 모든 그릇은 모양과 무늬가 같았으며 전부 뚜껑이 씌워져 있었다. 간장과 초장, 초고추장을 담는 종지까지 같은 디자인이었다. 접대원 아가씨가 뚜껑을 열자 보기에도 익숙한 김치와 깍두기를 시작으로 각종 나물과 반찬에 산적과 회가 보였다. 언젠가 아주 어릴 때 잔칫집에 가서 본 기억이 나면서 여전히 이북 음식을 그리워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떠올랐다.
“15첩 반상기입니다. 당과 인민의 성의입네다. 천천히 드십시요, 권 동지.”
순우는 반찬이 15가지라는 의미인지 궁금했으나 물어보지 않고 숟갈을 들었다. 며칠 만에 접한 밥이었다. 하얀 쌀밥에 구수한 쇠고깃국 그리고 테이블을 가득 채운 여러 요리를 단숨에 비우고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숭늉까지 한 방울 남김 없어 들이켰다. 그 많은 그릇에 담긴 음식이 모조리 사라지면서 고려호텔 술값 바가지로 인한 불쾌한 감정 또한 함께 사라졌다. 온몸에 기운이 충만해지며 100마일급 포심을 온종일 던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권 동지, 비디오로 보니 못 던지는 공이 없던데 몇 개만 보여주지 않겠소?”
생각이 야구공에 이르자 지난밤 대화 도중 갑자기 공을 건네며 묘기를 보여달라던 지도자의 엉뚱한 요구가 떠올랐다. 잔뜩 긴장한 데다 식사도 부실하여 손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지만 원활한 대화를 위해 윗도리를 벗어젖혔다.
우선, 일렬로 정돈된 식탁 맨 끝 의자 등받이를 맞추었다. 낙차 큰 커브를 본 그의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파티장을 장식한 여러 멋들어진 유럽풍 촛대 중 가운데를 골라 횡 슬라이더로 맞추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한참이나 감탄을 금치 못했다. 두 개의 공을 가지고 먼저 던진 저속의 공을 나중에 던진 빠른 공으로 맞추는 모습에는 함성을 지르며 박수를 쳐대기 시작했다. 어릴 때 본 물개 박수가 생각난 순우는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지만, 간신히 참았다.
“정말 대단하오. 그럼 말이오....... 저쪽 벽 끝에 걸린 두 궁전도 맞춰보시오, 권 동지.”
순우는 잠시 망설이던 지도자의 손끝이 가리키는 방향을 주시했다. 20미터 전방에 두 개의 사진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꽤 멀었지만 한눈에 봐도 러시아와 중국을 대표하는 건축물이었다. 크렘린 궁과 자금성이었다는 것은 나중에 알게 되었다.
“맞으면 액자가 깨질 수도 있습니다.”
“걱정 말고 마음껏 깨부수시오.”
오랜만에 야구공을 손에 쥔 순우는 망설이지 않았다. 좌측의 자금성은 포심으로, 우측의 크렘린 궁은 너클볼로 산산조각을 냈다.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경탄을 마지않던 지도자는 걸레처럼 찢어진 사진을 한참이나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고개를 서서히 끄덕이기 시작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김일국 장관 또한 열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순우의 투구 실력 때문만은 아니었으리라.
“야, 내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구만 기래. 흔들거리며 날아가는 나중 공은 볼수록 신기하오. 하하하, 속이 후련하구만. 정말 훌륭하오, 권 동지.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저 두 나라에는 언젠가 화끈하게 되갚아 줄 날이 올 거요. 두고 보자우!”
이후 대화는 일사천리로 이어졌다.
식사 후 북측 판문점에 들어섰고 얼마 후 판문각이 보였다. 어깨에 별 셋을 단 장군이 건물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찻잔을 깰 때 얼굴을 붉혔던 스리 스타는 보이지 않았다. 며칠 사이에 바뀐 모양이었다. 당시의 일을 떠올린 순우는 괜히 미안해졌다. 여권을 건네고 출국 도장을 받는 동안 상장과 차를 나눴다.
“경외하는 최고사령관 동지께서 권 동지와의 인연과 우정을 귀하게 생각한다고 말씀하시었습네다.”
“.......”
“가까운 시일 내에 우리 공화국을 다시 한번 방문해 주시면 당과 인민은 열렬히 환영 하갔습네다.”
“....... 아, 예....... 뭐, 고맙습니다.”
불과 며칠 전에 일어난 찻잔 사건을 생생히 기억하는 신임 장군은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신중을 기했다. 그런 모습에 순우는 더욱 할 말이 없어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그새 찻잔은 바뀌어 있었다. 중국풍의 화려한 꽃무늬 대신 단순한 국화 문양이 보였다. 이렇게 작은 찻잔부터 서서히 모든 것이 바뀌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군인 하나가 출국 스탬프가 찍힌 여권을 들고 와 돌려줬다.
‘평생 잊을 수 없는 여행이었다.’
생각에 잠긴 채 분계선 회의장을 향해 계단을 내려오던 순우의 눈에 분계선 너머 중계차와 카메라를 든 기자들이 구름처럼 몰려 있는 것이 보였다. 엄동설한에 며칠 동안 같은 자리를 지켰을 리는 없고, 아마도 그의 귀환 소식이 미리 알려졌나 보다.
군사 정전위원회 회의실을 통과하여 분계선을 넘자 대기하고 있던 남측 인사가 다가와 여권을 받아갔다. 국경을 넘어왔으니 입국 절차를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낯선 체험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국경을 넘었다는 느낌은 받지 못한 순우로서는 번거로운 절차로 여겨졌다.
순우가 입국 도장을 받는 동안 프레스 라인 뒤편의 기자들은 아우성을 쳤다. 그 넓은 자유의 집 라운지로는 수백 명의 내외신 기자들을 수용하기 어려워 건물 앞 광장에 포토존과 라인을 치고 그를 기다렸다. 살을 에는 영하의 날씨였지만 마땅한 장소가 없었다.
아무리 기자들과의 만남을 부담스러워하는 순우였지만 지금의 상황은 절대로 피해갈 수 없다는 것을 모를 수가 없다. 여권을 건네받은 순우가 드디어 라인 앞에 서자 카메라 플래시가 일제히 터지기 시작했다. 양복 안주머니에서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금색 봉투를 꺼내 속에 든 종이를 펴자 플래시 폭탄이 또다시 터졌다.
일반 도화지보다 두꺼운 최고급 재질의 B5용지에 북한에서만 사용하는 생소한 공화국 폰트로 단정히 프린트된 문서였다. 하단에 국무위원회 위원장 직인이 붉은색으로 커다랗게 찍혀있었다. 오전에 건네받은 합의서였다. 체육성 장관이 아닌 최고지도자의 직인이 찍혀있다는 것이 갖는 특별한 의미를 아직 순우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강원리틀야구단 대표 권순우입니다. 내각 체육성의 초청을 받아 평양을 방문하였으며 여러 관계자의 융숭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어젯밤 국무위원장과 만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야구 발전에 관하여 의견을 교환했습니다.......”
순우의 입에서 ‘국무위원장을 만나’ 대목이 나오자 기자들의 입에서 일제히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가 집권한 지 6년이 넘었지만, 아직 외국 방문객과의 공식적인 만남을 가져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합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순우는 감정의 동요 없이 덤덤하게 합의서를 읽어내려갔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자국의 야구 발전을 위해 체육성 내 야구발전 위원회를 조직하고 강원리틀야구단과 다음과 같이 협력하기로 합의하였다.
1. 두 조직은 정치적 영향이나 간섭을 받지 아니한다
2. 모든 기술적 물적 지원은 강원리틀야구단을 통해 제공받는다
3. 남측 당국과 협의하여 강원도 고성군 DMZ 내부 북남에 걸친 공동지역에 군사시설을 폐하고 야구장을 건립한다
4. 공동 야구장에서 북남의 야구부는 친선 경기를 포함하여 정기적 경기와 교류를 가진다
5. 야구 교류와 관련한 방북은 판문점 혹은 고성군 출입사무소를 통해 육로 입국을 승인한다>
“이상입니다. 이러한 합의 이행에는 남측의 적극적인 행정적 협조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별도의 문서 하나를 받았는데 북측 적십자회가 남측 적십자사에 보내는 서신입니다.”
말을 마친 순우는 추가 문서를 대기 중이던 적십자사 간부에게 건넸다. 기자들의 열화같은 요구에 간부는 망설일 틈도 없이 그 자리에서 서신을 꺼내 읽어야 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적십자회는 인도주의 정신 실천의 일환으로 2015년 10월에 가졌던 제20차 행사 이후 중단된 북남 이산가족 순차 상봉 행사 재개를 다가오는 2월 16일 구정을 전후하여 실시할 것을 제안한다. 행사의 장기적 실행을 보장하기 위해 우선 강원도 연고의 이산가족 상봉을 제안하는 바이다. 이산가족이 없는 실향민들의 고향 방문도 환영하며 아울러 해당 지역 이탈민들의 가족 상봉에도 제한을 두지 않을 것이다>
이날 전 세계가 놀랐고 대한민국 전역에 난리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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