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오늘 여기에서 만져보는구먼
어느덧 11월도 절반이 훌쩍 지난 늦가을의 맑고 쌀쌀한 날 정오쯤 뒷마당에 정기 멤버들과 친구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게리 코치와 힌스데일 클럽 꼬마 선수들이 먼저 왔고 뒤이어 벤자민과 제이콥 형제를 비롯한 루리 병원의 꼬마들이 두툼한 외투를 걸친 채 앨리스의 인솔을 받아 왁자지껄 웃고 떠들며 들이닥쳤다. 곧 시드니로 떠날 순우 일행과의 올해 마지막 파티였다.
수십 년 동안 찾는 이 없던 도시 속의 외딴 무인도, 수북이 쌓여도 치워주는 손길 하나 없어 낙엽으로 무성했던 적막과 고독 그리고 은둔의 요새 뒷마당은 이 년 전 순우와 죤이 입주한 이후 서서히 달라지기 시작하더니 어느 순간부터 놀이공원만큼 번잡해지고 아이들의 함성으로 이웃의 눈총을 받아야 할 처지가 되었다.
고기 굽는 냄새가 동네를 점령해 갈 때에도 방문객이 줄을 이었다. 아리에타와 리조를 대동하고 온 매든 감독이 뒷마당에 들어서다가 놀이동산으로 변한 광경을 보고 놀랐다.
“야~ 강타자 리조다!”
“와, 투수 아리에타까지 왔다!”
“감독님. 어서 오세요. 축하드립니다.”
반기는 아이들에 이어 사람들은 감독에게 축하 인사를 먼저 건넸다. 올해 내셔널리그 감독상을 챙긴 매든에게는 2008년과 2011년에 이어 세 번째 수상이었다. 만년 하위의 컵스를 단숨에 월드시리즈 우승팀으로 끌어 올렸으니 수상은 당연했다. 이렇게 메이저리그에서 제정한 4개 부문 수상자가 한 장소에 모이게 되었다.
아이들과 노인들의 숨바꼭질이 한창일 때 멋들어진 중절모에 회색 바바리코트를 걸친 리처드가 묵직한 여행용 캐리어를 끌고 나타났다.
“구단 이사 파티에 구단주에 빠지면 되겠는가?”
“캐리어는 뭔가? 설마 이곳에 하숙 얻을 생각은 아니겠지?”
“나 요즘 힘들게 살고 있네. 1달러 50센트 티켓 요금을 안 낸 사람이 많아서 말이야.”
걸쭉한 입심을 교환하던 리처드가 캐리어를 열고 투명한 아크릴 디스플레이 케이스를 식탁에 올려놓자 노인들의 안색이 대번에 변하며 전신이 얼어붙었다.
“아니 저건!”
“아~~”
“저것이 바로.......”
커미셔너스 트로피!
바닥을 제외하면 61cm 높이에 지름 28cm, 약 14kg 정도 무게의 은으로 만든 평범한 트로피. 평범한 만큼 아무나 받을 수 있다. 메이저리그 월드시리즈에서 이기면 말이다.
트로피를 한참 응시하던 노인들은 하나둘 다가가 만지고 쓰다듬기 시작했다. 만지면 터질까 불면 날아갈까 애지중지하며 어루만지던 여섯 이사의 눈에 습기가 차기 시작했다.
“결국, 오늘 여기에서 이 트로피를 만져보는구먼.”
“고작 25인치 높이에 한 뼘 밖에 안되는 지름의 작은 쇠붙이가 우리 컵스에 오기까지 이토록 오래 걸렸단 말인가?”
“여기 꽂힌 서른 개의 금색 깃발은 서른 구단을 의미하겠군.”
“야구공은 금도금이 되어 있는데 실밥까지 보이네.”
갑자기 엄숙해진 분위기를 감지한 뒷마당 식구들이 다가와 트로피 감상 대열에 합류했다.
“생각보다 무겁군요. 대충 30파운드(14kg) 정도 되겠어요. 그런데 디자인은 별로군요.”
궁금증이 남다른 죤이 한번 들어보며 무엄한 평가를 내리더니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르신들, 드디어 소원을 성취하셨네요. 그때 저희가 카디널스를 퍼펙트로 눌러주고 왔을 때.......”
그때 노인들이 한 말을 순우와 죤은 잊지 않았다.
<퍼펙트게임 축하한다>
<우리가 젊은 시절의 약속 때문에 여전히 울타리 없이 사는 것을 그리 안타깝게 여기지 말아라>
<너희들이 우리 컵스에 커미셔너스 트로피를 안겨주면 남은 삶을 편하게 지내마>
떡 본 김에 굿한다고, 트로피가 올려진 식탁 옆에서 즉석 세리머니가 이어졌다. 무거운 분위기에 눌려 우승 직후 헹가래를 못한 것이 마음이 걸린 순우, 론, 죤 그리고 아리에타와 리조는 허리가 아프다며 도망가는 감독을 뺑소니 범인 붙잡듯 낚아채고는 힘차게 들어 올렸다.
이어 트로피 릴레이 경기가 펼쳐졌다. 트로피를 손에 꼭 쥔 할아버지를 손자가 등에 업고 뒷마당 그라운드를 한 바퀴 도는 특이한 육상 축제였다. 우선 론이 사이먼을 업고 돌았고 이어 죤이 아론을, 순우가 찰스를 업고 돌며 그간 돌봐준 은혜에 고마운 마음을 전했는데 업힌 노인들의 얼굴이 가관이었다. 없는 힘에 트로피를 하늘 높이 들어 올린 채 업혔기에 숨이 가빠 헐떡거리는 동시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치는 모습이 피카소의 인상주의 작품 속 인물을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이어 크리스, 에디, 테리도 쇠붙이를 들고 손자들에게 업혀 돌고 내려오자 여섯 노인으로부터 나지막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옆의 사람들은 수십 년을 간직해온 노인들의 한이 마침내 호흡에 실려 코를 통해 빠져나가 대기 중에서 흩어져 버리는 소리라고 믿었다.
“얘들아. 이사를 업었으면 구단주는 더욱 높이 업어드려야지.”
“그럼, 그럼! 100마일로 달리거라.”
평정을 되찾은 노인들의 말에 리처드가 놀란 표정을 하며 거절했으나 결국 순우와 죤의 등에 올라타 두 바퀴나 돌았다. 트로피를 가운데 두고 둘러앉은 일곱 노인은 컵스 로고송을 시작으로 1차전의 떼창 What a wonderful world에 톰 존스의 Green, Green Grass of Home을 지나 60년대를 휩쓴 팝송을 부르며 뒷마당 버전 우승 축제를 가졌다. 아이들은 뒷마당 곳곳을 누비며 뛰어놀았고 어른들은 트로피를 중앙에 눈 노인들 옆에 섞어 앉아 가사도 모르는 노래를 열심히 따라 불렀다.
밑천이 떨어지면서 입이 아파지기 시작하자 뒷마당 노래자랑은 막을 내리고 흥겨운 오락 시간이 되었다. 붙임성 좋은 죤과 미소 천사 대니가 마이크 대신 숟가락을 쥐고 사회를 보며 해준 한 가지 얘기에 모두가 배꼽을 잡았다.
“시카고 컵스의 가장 최근 두 번의 월드시리즈 우승 사이에 인류 역사상 몇 가지 중요한 변화가 생겼죠?”
“그렇죠. 하나씩 얘기해 볼까요?”
“좋아요. 우선, 그 사이에 라디오 방송이 상용화되어 컵스 팬들은 팀이 지는 걸 집에서 라디오로 듣게 되었고요.”
“텔레비전이 발명되어 팬들은 팀의 역전패를 집에서 TV로 보게 되었죠.”
“컴퓨터가 발명되어 팀이 졌을 때의 안타까운 심정을 하드디스크에 저장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인공위성이 만들어져 팬들은 팀의 완봉패를 전 세계에서 생중계로 보게 되었다죠.”
“게다가 인터넷의 발명으로 10연패 경기를 다운 받아 언제든 볼 수 있어요.”
“최근까지만 해도 스마트폰으로 팀이 10년 연속 최하위권에 머문 원인을 보여주는 동영상을 언제 어디서든 볼 수 있었죠.”
“하지만.......”
둘의 익살은 공동 맨트로 마무리되었다.
“이제 피플러스(P+)를 통해 컵스가 빅리그 정상에 오른 이유를 낱낱이 분석할 수 있게 되었답니다!”
대부분은 재미있어하며 손뼉을 치고 크게 웃었다. 하지만 노인들은 은근히 열이 올랐고 특히 리처드는 부아가 치밀었으나 어쨌든 끝이 좋으니 억지로 인상을 풀며 웃는 시늉을 했다. 그중 화가 가장 빨리 풀린 속 넓은 찰스가 제안을 했고 아론이 맞장구를 쳤다.
“우승 반지 끼고 상까지 받은 소감 좀 들어보자.”
“그래. 우리 때 우승팀은 반지 대신 회중시계를 기념품으로 나눠 가졌는데.”
이런 얘기는 밤새워 들려줄 자신이 있는 죤, 사랑하는 앨리스가 옆에 있어 더욱 신이 나서는 마우스(mouth) 모터 스위치를 올렸다.
“제가 원래 특급 포수였는데 더블A 시절 저의 진가를 몰라본 감독 때문에.......”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절정의 자화자찬 신공에 낯이 뜨거워진 앨리스가 견디다 못해 남친의 옆구리를 여러 번 찔렀지만 이미 무아지경에 빠진 죤은 도중에 멈추면 주화입마에라도 걸릴 듯이 굽이굽이 돌고 돌아 끝을 보고 나서야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론과 순우의 소감이 이어졌다.
“가족을 위해 던졌습니다.”
“포수의 사인만 보며 수비를 믿고 열심히 던졌습니다. 두 상 모두 제게 과분합니다.”
들을 준비도 하기 전에 끝나버린 둘의 초간단 소감에 모두 허탈해할 때 지난해 수상 직후 스스로 사이 영 상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했던 순우의 말을 떠올린 죤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번엔 자격 운운하지 않고 과분하다는 말로 그치는 걸 보니 자신감이 붙은 모양이구나. 이봐, 친구. 자네한테 과분하면 누가 받겠나?’
한편 리처드는 옆에 앉은 매든 감독에게 속삭였다.
“이보게 감독. 아까 사회 본 동양인 투수 말이야.”
“예. 이름이 아마 대니라고 했던가요?”
“맞아. 내 말 잘 들어. 내년 컵스를 먹여 살릴 또 하나의 보배니까 절대 놓치지 말게나.”
작년 이맘때 순우를 찾아 왔다가 어릴 적 영웅이었던 노인들을 만나 인사를 하고 말을 이어가던 매든 감독의 눈에 마당 저쪽 마운드에서 묵묵히 공을 던지고 있는 우람한 체격의 투수가 들어왔다. 망가진 레스터를 대신하여 올해 컵스를 구해준 론이었다. 그런데 그새 언제 또 노인들이 새로운 선수를 키우고 있었던가? 놀라는 표정을 짓고 있는 감독의 귓가에 리처드의 속삭임이 이어졌다.
“일단 스프링 캠프에 초청해서 잘 살펴보고 결정하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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