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야석을 채운 관중
10월 27일 화요일 밤 8시 7분, 시카고 리글리 필드 구장에서 2015년 월드시리즈의 막이 올랐다.
지난해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게 3-4로 아쉽게 패해 우승을 놓친 캔자스시티 로열스는 올해 우승을 자신하고 있었다. 2연속 월드시리즈에 오른 강팀임이 틀림없지만 언론이 로열스를 추어올리는 진짜 이유는 작년에 이어 이번에도 포스트시즌에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로열스의 야구 색채를 제대로 보여줬기 때문이다.
디비전 시리즈에서 휴스턴 애스트로스에 밀려 탈락 직전까지 갔지만, 오뚝이 근성으로 대역전극을 벌여 시리즈를 원점으로 돌린 뒤 기세를 몰아 5차전까지 잡아 시리즈를 끝내면서 그야말로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는 명언을 온몸으로 증명한 로열스. 막강 타선을 보유한 토론토 블루제이스와의 챔피언십 시리즈에서도 역전의 괴력을 보이며 지난해의 돌풍이 우연이 아님 입증했다.
“구정한 위원, 이런 이유를 들어 언론들은 6대4로 로열스의 우위를 점치고 있는데요. 양 팀의 정규시즌 인터리그 성적은 어떤가요?”
“지난 5월 말 3연전에서 만났는데 2차전은 비로 연기되어 9월 28일에 경기를 가졌고 전적은 로열스가 2-1로 앞섰습니다. 1승은 론 마이어 투수가 올린 것이고 아직 로열스는 K1의 공을 받아보지 못했습니다.”
“1969년에 창단된 로열스가 지금까지 리그 우승 3회에 창단 16년 만인 1985년에 월드시리즈 우승을 이룬 것만 봐도 저력이 있는 팀이라 봐야겠죠.”
“예. 1870년에 창단된 컵스가 1907, 1908년 이렇게 2회 월드시리즈 우승에 그친 것과는 비교가 되긴 합니다.”
“앞선 두 시리즈에서 끝까지 가는 접전을 벌여 체력이 바닥난 컵스가 6차전으로 마치고 힘을 비축한 로열스에 비하면 다소 불리한 형세입니다. 하지만.......”
하지만 컵스에는 6일이나 쉰 K1이 있었다. 9 회 말이라도 마운드에서 혹은 도루로 단숨에 3루까지 가서 상대 팀을 흔들어 기적적인 승리의 열매를 따오는 그 이름이 1차전 선발 명단에 올랐다. 로테이션대로 한다면 해멀 차례지만, 시카고에서 K1 이외의 투수를 떠올리는 이는 없었다.
“우리 컵스가 여기까지 왔다.”
와일드카드 단판전에서 꺼낸 말머리를 월드시리즈 1차전에까지 쓸 줄은 몰랐던 매든 감독. 하지만 이날은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우선 다들 구장을 한번 둘러보도록. 오늘.......“
그의 목이 막혔다. 유별나기로 태양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럽다는 컵스의 팬들에 대해서는 부임 전부터 귀가 따갑게 들었지만, 소문은 눈으로 확인한 사실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
“......."
촌닭처럼 구장을 둘러 보는 선수도, 감히 입을 여는 선수도 없었다. 8시 경기에 이른 오후부터 관중석을 채운 특별한 사람들 때문이었다.
“구 위원. 최근 제가 처음 경험하는 일이 자주 생기는데요. 오늘 내야석을 채운 관중 말입니다.”
“저도 어제 180분 투표 뉴스를 보며 설마 했는데, 이렇게 직접 보니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군요.”
“타임머신을 타고 70년 전으로 돌아간 기분인데요. 어찌 된 일인지 고국의 시청자들을 위해 설명 좀 해주시죠.”
내야석 1층부터 3층을 가득 채운 관중의 대부분은 노인들이었고 포수 바로 뒤쪽에 위치한 프리미엄 좌석의 주인은 지팡이를 짚거나 구장 안전요원의 부축을 받고 입장한 80대가 주류를 이루었다. 이들 대부분은 흑백사진에서나 보던 진한 회색빛의 낡고 허름한 빈티지 양복에 페도라와 같은 중절모를 썼고 간혹 카우보이모자를 쓴 올드팬도 보였으며 어깨에 훈장을 달고 입장한 시니어들은 멋들어진 특전사 베레모를 걸쳐 세계대전 참전이나 외인부대 출신임을 알렸다. 베이스볼 캡에 울긋불긋하고 다양한 옷차림을 한 외야석의 젊은 관중과 대조를 이루었다.
“예. 투표로 1차전 티켓을 시니어 팬들에게 먼저 제공하는 것으로 정한 이후 오늘 오후까지 참으로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현지 소식에 훤한 구정한의 설명은 다음과 같았다.
투표 결과가 나오자 컵스 구단의 프런트 직원들이 때아닌 긴급 야간 회의까지 열며 시니어 팬들을 위한 입장권 배정 원칙을 세우고 있을 때 회의를 주관하던 구단 사무장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나, 리처드 리케츠요.”
현 시카고 컵스의 구단주 톰 리케츠의 아버지로서 구단의 크고 중요한 일은 미덥지 못한 아들을 제쳐놓고 80의 노구를 이끌고 직접 해결하는 컵스 구단의 실질적인 황제다.
“아들놈 무시하고 이렇게 하시오.”
사무장에게 하달된 어명은 다섯 가지였다.
1. 1945년 당시 컵스의 월드시리즈를 참관했던 시니어들을 우선으로 프리미엄 좌석을 제공할 것.
2. 65세 이상 등록 시니어 팬들에게 연령순으로 1층 내야부터 제공할 것.
3. 프리미엄 입장료는 2달러 75센트, 내야는 위치나 층수에 상관없이 1달러 50센트로 동결할 것.
4. 응급 의료진을 대기시킬 것.
5. 만약 7차전까지 가게 된다면 프리미엄 석과 1층 내야석 티켓은 내 지시가 있을 때까지 묶어둘 것.
토론과 180분 투표를 보며 눈시울을 적신 컵스 황제의 결정에 누가 토를 달 수 있을까. 1945년 당시 구단을 인수한 지 얼마 안 된 아버지 덕택에 포수 바로 뒤에서 경기를 지켜보던 10살 남짓한 꼬마 리처드는 염소를 끌고 와 동반 입장을 요구하던 남자와 승강이를 벌이던 구장 직원들의 황당해하는 얼굴을 보고 폭소를 터뜨렸다. 이후 파란 하늘을 보며 꿈을 키워가던 그 소년은 간데없고 어느덧 주름살 노인이 된 리처드에게 그때 한 번의 시원한 웃음을 시작으로 찾아온 컵스의 기나긴 암흑기는 염소의 저주라는 멍에가 되어 평생 자신을 구속해 왔다. 그리고 이제 드디어 풀 때가 왔고 모든 것을 한꺼번에 풀고 싶었다. 입장권 가격마저도 그 당시로 돌아가서 말이다.
“프리미엄 석은 2달러 75센트.......”
“무엇이 어쩌고 어째요?”
“그분의 명입니다.”
“......."
명석한 두뇌로 순간 리처드를 떠올린 피고용인 엡스타인 사장은 더이상 입을 열지 못했고 황명의 권위를 생생하게 실감한 사무장은 성실히 명을 이행했다.
“구위원. 아무리 70년의 한을 푼다고 하더라도 컵스가 오늘 보인 팬 서비스는 메이저리그 역사상 처음 아닙니까?”
“맞습니다. 어제 토론과 투표가 핫이슈였다면 오늘의 특종은 단연 컵스의 팬서비스라고 할 수 있어요. 내야석이 1달러 50센트.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질 않습니다. 바로 지난주 챔피언십 시리즈의 리글리필드 평균 티켓 가격이 1,450달러였어요. 외야를 포함한 가격이죠.”
“포수 뒤편이 2달러 75센트면....... 구장 매점에서 파는 가장 저렴한 아이스크림 하나 사 먹기 힘든 금액인데요.”
“제가 오후에 확인 차원에서 티켓 매매 중계소인 스터브허브와 티크 아이큐 사이트에 들어가 봤는데요. 3, 4, 5차전이 열릴 로열스의 카우프만 스타디움 프리미엄 좌석이 지금 13,500달러에 나와 있습니다. 보통 라운지 좌석으로 통하는 클럽 시트가 16,000달러에 거래되고 있고요.”
최저가인 외야석은 시니어 팬이 아닌 일반 관중으로 가득 차 있었다. 기꺼이 수백 달러를 지급하고 들어온 이들 외에도 운이 좋은 일반인은 또 있었다.
“입석과 계단석에도 일반 관중이 보이는군요. 입석 가격도 만만치 않을 텐데요.”
“확인은 못 해봤지만 100달러 이하는 아닐 겁니다. 그런데 내야석을 채운 어르신들이 혼자 오신 것은 아닌 것 같네요.”
대부분 시니어 팬들의 손에는 작은 액자가 들려 있었고 가슴에는 좀 더 큰 사진틀이 놓여 있었다.
“지금 카메라에 보이듯이 거의 다 흑백 인물사진입니다. 오늘의 경기, 바로 염소의 저주가 풀리는 역사적인 경기를 보지 못하고 떠난 윗세대 팬들의 사진이죠.”
“아.......”
캐스터마저 구정한의 말을 받지 못하고 진한 감정을 흘렸다. 한을 풀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올드 팬들의 사진은 외야 담장까지 둘러쌌다. 운 좋게 외야석 티켓 구입에 성공한 사람들이 주변의 부탁들 받고 들고 와 담장을 따라 세워 놓은 것이다.
“컵스 팬들의 마음이 그토록.......”
어렵게 감정을 조절하며 해설을 이어가려던 캐스터의 목이 다시 메었다.
목이 멜 정도는 아니라도 내야석을 메운 수많은 노인과 그들이 가져온 액자 그리고 외야 담장을 덮은 대형 사진을 본 컵스의 선수단은 마음이 무거웠다. 야구가 좋아 야구 선수가 되었고 야구장에서 온갖 희비애락을 경험했지만, 이날처럼 책임을 느끼는 자리에 있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저 노인들 때문에라도 오늘은 무조건 이겨야 한다. 그래서 감독이 입을 열었다.
“로열스가 그냥 월드시리즈에 올라온 게 아니다. 선발진은 평범해도 빠른 발과 막강한 수비는 유명하다. 빅리그 전체에서 도루가 2위에 팬 그래프 팀 필딩 UZR 기준으로 수비력이 1위야. 거기에다 로열스가 자랑하는 최강 불펜 3인방이 오르면 뒤집기 힘들다. 3위를 기록한 팀 평균자책점 3.73은 선발진으로 보면 12위지만 불펜으로만 보면 단연 1위지.”
매든 감독의 설명은 한마디로 안타로 나가면 내야를 뒤집어엎고 점수를 내주면 곧바로 3인방이 오른다는 말이다.
“겁먹을 거 없다. 선발 에딘슨 볼케즈는 체인지업이 제법 날카롭긴 해도 제구력이 형편없지. 안타 몇 개만 얻어맞으면 힘을 못 쓸 테니 열심히 두들겨 주라고.”
시즌 13승 9패를 기록한 32세의 우완 볼케즈는 매든 감독의 인색한 평가처럼 형편없는 투수까지는 아니더라도 오랫동안 지적받아온 제구력 문제 극복이 안 되어 에이스급으로 성장하진 못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98마일까지 나오는 포심과 90마일 초반의 투심 패스트볼이 올해 그가 구위를 급상승시킨 필살 구종이라는 것을 본 로열스의 네드 요스트 감독은 그를 1차전 선발로 낙점했다.
“우리 선발 볼케즈의 패스트볼을 제대로 공략할 타자는 컵스에 없다. 저쪽 선발 K1이 0점대 평균자책점 어쩌고저쩌고하던데, 허약한 내셔널리그에서나 통하는 거지. 아메리칸 리그 방망이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자.”
지난해 60을 넘긴 요스트 감독은 20대 청년처럼 활기 넘치는 톤으로 선수단을 격려하며 1차전 승리를 확신했다.
그리고 곧이어,
“플레이 볼!”
- 작가의말
다들 아시다시피, 2015년 월드시리즈 우승은 뉴욕 메츠를 누른 캔자스시티 로열스가 차지했습니다. 메츠는 챔피언십시리즈에서 컵스를 이겼고요.
소설 ‘투수 K1’은 이미 벌어진 사실들을 기초로 주인공의 활약을 그리고 있지만, 글의 핵심 부분인 월드시리즈 우승을 위해 할 수 없이 메츠와 로열스를 희생시키게 되었습니다. 작가로서 이 부분을 언급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요.
그리고, 캔자스시티 로열스의 열혈팬 이성우 씨 이야기는 스토리 라인에 맞지 않아 아쉽지만 제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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