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 붙은 변화구
“저 친구, 뭐라는 거야?”
내셔널리그 포수 골드글러브의 주인공 죤은 생전 처음 보는 종족의 청년이 갑자기 다가와 절대 영어라고 여길 수 없는 언어로 말을 걸자 경계의 눈초리를 보이다가 공을 받아달라는 순우의 통역에 어이가 없었다.
<쿵, 휘~익>
<쿵, 쉬~익>
처음 서너 개의 공은 한심해서 웃음이 나왔다. 미트에 들어오지 않고 땅을 때리며 좌우로 튕겨 나갔기 때문이다. 폼도 얼마나 엉성한지 먼저 왼손을 하늘 높이 올렸다가 공을 쥔 오른손을 같은 높이로 들어 올렸는데 마치 맨손 체조 동작을 보는 듯했다. 공을 쥐고 들어 올리는 타이밍도 엉망이었고 다리까지의 연결 동작은 누가 봐도 왕초보였다.
팔을 과도하게 높이 들어 올리고는 손목을 움직여 던지는 티모시의 피칭 모션을 보며 내가 저런 공을 계속 받아야 하냐는 눈빛을 순우에게 보내던 죤의 인상이 굳어지기 시작한 것은 10구째가 들어 오면서였다.
<휘~익>
<쉬~익>
점차 안정감을 보이다가 어느새 바운드 없이 곧바로 미트를 향해 들어가던 공을 본 순우의 안색이 변했다. 옆에서 장난기 섞인 표정으로 지켜보던 대니는 물론 항상 진지한 것이 흠이라면 흠인 론의 눈 마저 크게 떠졌다. 여유를 부리며 마스크도 없이 포수석에 앉은 죤은 진땀을 흘리더니 이윽고 공을 놓치기 시작했다. 녹스빌에서 친구의 공 열 개를 모두 놓친 이후 처음이었다.
“크리켓 구종은 크게 레그 스핀, 오프 스핀, 패스트 볼링으로 나누는데 바운드 후 휘는 방향과 속도에 따라 세부적인 투구폼이 20종류가 넘지. 두스라, 플리퍼, 레그 브레이크, 구글리, 톱 스피너, 언더 커터, 레그 커터, 오프 브레이크, 슬라이더 등은 내가 잘 던지는 구종이었어. 오랜만에 던지니 어깨가 잘 안 돌아가는군. 공도 크고 말이야. 도움닫기로 뛰어들어오며 던지다가 제자리에서 던지려니 갑갑하기도 하고.”
기가 찰 노릇이었다. 몇 달 만에 던져보는 공, 그것도 평소 잡던 크리켓 공과는 크기와 무게, 실밥의 성질이 전혀 다른 야구공을 잡고 체조하듯 양팔을 번갈아 들어 올리는 황당한 폼으로 던진 공을 메이저리그 내셔널리그 최고의 포수가 받아내지 못하다니.
“슬라이더라고 했나? 야구와 같은 용어를 쓰네. 그건 뭐지?”
“다른 공과 마찬가지로 손목 스냅으로 던지는 구종인데 공을 던지는 순간에 손가락으로 공 아랫부분을 쓸어주지. 공이 타자들 예상보다 가까이 들어와 바운드되고 튀는 높이도 훨씬 낮아. 게다가 실밥 방향으로 튀지 않기 때문에 바운드 방향을 예상하기 어렵지. 필요에 따라 던지는 순간 공의 사이드를 살짝 쓸어주기도 하는데 이러면 백스핀과 사이드스핀 둘 다 걸리지. 레그 브레이크와는 폼과 궤적이 똑같아 바운드 전에는 구분이 불가능해.”
같은 공을 가지고 지구와 화성에서 던지면 이런 대화가 나오려나, 땅을 치는 바운드라는 치명적 차이가 티모시와 순우 일행의 기술적 대화를 힘들게 했으나 그가 직접 시범을 보이자 한눈에 이해할 수 있었다. 야구 슬라이더와의 폼이나 궤적 그리고 사용 목적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스핀을 주는 원리는 같았다. 공에 대한 공감대가 생기자 신기하게도 전혀 알아듣지 못했던 그의 사투리 호주 영어도 조금씩 들리기 시작했다.
일행은 며칠 후 저녁 식사에 초대를 받았다. 마침 티모시의 동생 생일이라 가족 모두 모인다고 했다. 식구 모두 집 앞에 나와 손님을 맞이했다. 벽에 걸린 부메랑과 디저리두를 포함하여 독특한 원주민 장식으로 가득 찬 거실은 원주민 박물관과 다를 바 없었다. 종족 문화를 자랑스러워하는 가장의 품격이 그대로 배어 나왔다.
<우리는 호주 땅의 주인이다. 주인답게 살자>
<성스러운 땅을 사고팔아서는 안 된다>
오래된 나무껍질을 펴서 연결해 붙인 판에 투박한 원주민식 서체로 쓴 가훈과 토지매매 금지를 요구하는 문구가 눈길을 끌었다.
주방에 들어서자 독특하고 이국적인 향이 물씬 풍겼다. 하지만 불쾌하지 않았고 오히려 어디에선가 불어오는 지극히 고소한 고기 향이 손님들의 침샘을 자극했다. 그 천상의 향원이 곧 눈에 들어왔다.
“이건 이구아나(iguana)야. 귀한 손님들을 위해 특별 주문해서 오후 내내 구웠어. 우리 먼 친척이 배서스트에서 잡은 거야, 부메랑으로. 뜨거운 재 속에 오래 넣어두면 저렇게 되지.”
“.......”
“.......”
도마뱀보다 훨씬 크고 악어보다는 작은 거대한 파충류 한 마리가 근엄하게 눈을 감은 채 큰 식탁 중앙에 자리 잡고 천장을 향해 누워있는 모습을 본 손님 모두는 뒤로 넘어갈 뻔했다. 비위가 약한 론이 급히 손을 입에 갖다 대면서 최악의 상황은 넘겼다.
티모시가 일어나 식탁 위의 거대한 파충류를 분해하기 시작했다. 머리와 몸통을 잡고 비틀자 생각보다 쉽게 가죽이 떨어져 나가면서 닭 가슴살처럼 하얀 속살이 나타났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뼈 외에는 전부 하얀 고기였다. 보기와는 달리 침샘을 자극하던 고기 향이 더욱 강해졌다.
좌절을 많이 해봐서 그런가 아니면 현대 의술을 과신한 걸까, 대니가 덤덤한 표정으로 앞다리에 붙은 고기 한 점을 서클 체인지업 그립으로 뜯어냈다. 동료들은 약속이나 한 듯 여기저기 묻은 재를 털어내고 한입 배어 물은 대니를 쳐다봤다. 순간 번쩍 뜨여진 그의 동공에 별빛이 가득했다.
‘중독 현상인가?’
000(호주의 응급전화번호)을 눌러야 하나 고민하던 순우가 용기를 내어 너클볼 잡듯 손가락을 세우고는 등뼈 옆의 고기를 집어 들고 입에 넣자 죤이 친구의 뒤를 따랐다. 식탁 면적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대형 파충류가 순식간에 절반 이상 사라져갈 때쯤 드디어 론의 팔이 움직였다. 엄지를 아래에 깔고 검지와 중지를 이용해 고기를 뜯었다. 전형적인 포심 그립이었다.
“향은 맛에 비하면 절반도 따라오지 못하는군.”
“우리 내일 부메랑 들고 베서스트라는 곳으로 놀러 갔다 올까?”
“앨리스에게 이 요리법을 어떻게 가르쳐줘야 하나.”
“미국의 이구아나 서식지가 어딘지 알아봐야겠어.”
눈치 없는 손님들이 이구아나의 발톱까지 쪽쪽 빨아먹는 동안 주인 식구들은 버터 바른 식빵으로 저녁을 때워야 했다. 중이 고기 맛을 알면 절간에 빈대가 남아나지 않는다고, 비상용으로 남겨놓은 에뮤 날갯죽지와 캥거루 등심까지 먹성 좋은 손님들의 뱃속으로 신속히 사라지자 디저트가 나왔다.
“핑거 라임이야.”
옆으로 절단된 열대 과일 라임 속에 옅은 연두와 밝은 핑크 빛깔의 작고 즙이 많은 진주 같은 작은 알맹이들이 속을 가득 채운, 비주얼부터 남다른 과실이다.
“토종 블루베리를 얹은 케익”
“골든 와틀 씨앗으로 만든 차”
파충류의 발톱에 발바닥까지 빨아댄 손님들은 거칠 것이 없었다. 식탁에 올라오는 것은 묻지도 않고 받아넘기면서 치열했던 만찬이 막을 내렸다. 조금 전 순식간에 해치웠던 베리 케익이 티모시의 동생 생일 축하용으로 준비된 것이었음을 주인 가족 누구도 언급하지 않았다. 초대받은 손님이 와서 맛있게 먹어주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는 전통은 원주민에게도 널리 퍼져 있었나 보다.
“아들을 통해 자네들 얘기를 들었네. 검색해보니 야구는 실력으로 평가하더군. 차별이 없는 스포츠인 것 같던데.”
티모시의 아버지가 차를 들며 입을 열었다. 야구에 차별이 없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실력으로 평가한다는 말은 틀리지 않았다. 출신과 배경에 상관없이 누구나 잘 던지고 잘 때리면 설 수 있는 곳이 메이저리그 아니던가.
“내가 아들의 미래를 망쳤어. 기자들 앞에서 객기를 부리다가.......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깨달았지. 신사의 스포츠라던 크리켓 마저 우리 원주민을 무시하고 차별한다는 것을 말이야. 자네들이 보기에는 어떻던가, 우리 티모시 말이야. 야구공을 잡을 만하던가? 그렇다면 도와주게나. 호주가 버린 원주민 크리켓 선수가 미국을 뒤흔드는 야구 선수가 되도록 말일세.”
아들을 위한 개인적인 부탁인지 원주민의 주권 회복을 위한 거국적인 의뢰인지 헷갈렸지만, 며칠 후 시카고로부터 답을 받은 일행은 티모시를 뒷마당의 네 번째 하우스 투수로 받아들였다. 그의 피칭 동영상을 받아본 시카고의 여섯 이사가 동의했고 투수 출신 테리가 맡기로 했다.
“티모시, 우선 어번 오리올스팀의 레이먼드 감독에게 투수 기초 훈련을 받고 시카고에서 합류하는 것으로 하자.”
여전히 크리켓 폼이 그대로 남아있는 황당한 자세로 시카고로 갔다가는 까다롭기 그지없는 노인들에게 무슨 말을 듣고 어떤 욕을 먹을지 뻔히 아는 순우는 동갑 친구가 시드니에서 기초적인 투구폼이라도 배우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다.
“이봐, 순우. 자네 눈이 정말 날카롭더군. 티모시 이 친구 말이야, 굉장한 투수감이야. 패스트볼은 그리 늘지 않은 대신 변화구는 정말 귀신 붙은 수준이라니까. 크리켓 하면서 제대로 배웠더구만.”
칭찬에 인색한 레이먼드 감독이 불과 석 달도 지나지 않아 침을 튀기며 시카고의 순우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어떤 공을 잘 던지던가요?”
“변화구는 몽땅 다. 파워 커브, 슬로 커브에 너클 커브는 기본이고 체인지업도 수준급이야. 특히 슬라이더는 고속에다 수직으로 떨어지는 종 슬라이더까지 금방 배우더군. 지난달부터 배운 백도어 슬라이더와 프런트 도어 슬라이더 그리고 옆으로 휘는 슬러브까지 이제 능숙하게 던져.”
“예? 그래요?”
“안 믿기지? 더 황당한 것은 스크루볼을 아주 편하게 던지더라고. 크리켓 시절부터 손과 손목을 반대쪽으로 비틀어 꼬아 던지는 폼에 익숙했나 봐. 싱커도 아주 멋지긴 한데 구속은 150km(93마일) 이상은 안 나와. 파이어볼러는 힘들겠어. 이게 내가 본 유일한 약점이야. 너클볼은 나도 못 던지는 공이니까 나중에 자네가 직접 가르쳐 주던가. 긴 연투를 허락하지 않는 크리켓에서 배운 탓에 100개를 던지는 선발감은 아니라도 급한 불을 꺼야 하는 소방수급 계투로는 최고야. 마무리로도 충분히 통할 거고. 여기서 꽤 잘 친다는 타자들을 세워봤는데 건들지도 못하더군. 어떻게 할까? 여기서는 더 배울 게 없는데 그쪽으로 보낼까?”
시드니의 레이먼드 감독으로부터 연락이 온 것은 4월이었고 티모시가 뒷마당에 첫발을 들인 것은 5월이었다. 특이한 외모의 키 작은 투수가 투박한 오버핸드 스로 모션으로 귀신 붙은 변화구를 던지는 모습이 기자들의 드론에 잡힌 것은 한참 후였고 ERA 0.00을 기록한 링컨 뒷마당 출신 네 번째 투수로 언론의 주목을 받은 것은 그의 첫 시즌 2017년 5월 말이었다. 미국 입국 1년 만에 리그 정상급 변화구 투수로서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 것이다.
그에 대한 기사가 늘어날 무렵 컵스 구단 사무장은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여긴 워싱턴 백악관입니다. 2016시즌 우승팀을 초청하고자 합니다. “
“누가요?”
“누구긴요, 트럼프 대통령이죠.”
Comment '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