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1월 4일 밤 10시 3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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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위원. 방금 알렉스 리오스를 싱커로 잡고 이제 아웃 카운트 2개를 남겨놓고 있는데요. 지켜보는 저희가 이렇게 떨리는데 마운드의 권순우 투수는 빅리그 2년 차답지 않게 압박감을 잘 극복해내고 있군요.”
“K1의 구종은 낱낱이 해부되고 공개되어 더 들여다볼 게 없다고 하지만, 기록으로 나타나지 않는 중요한 강점이 있습니다. 바로 마운드에서의 자신감과 평정심 유지 능력이죠. 무엇보다 남다른 제구력과 다양한 구종, 그리고 거기에서 오는 구속의 변화가 큰 무기가 되어 자신감과 평정심을 뒷받침해주고 있다고 봅니다. 평소 가져온 야구에 대한 강한 원칙이나 신념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마인트 콘트롤 또한 도움이 되고 있고요.”
이제 우승까지 남은 것은 두 명의 타자.
우승을 앞둔 여느 팀에서 볼 수 있는 구장을 울리는 열광적인 응원과 지진을 동반한 함성이 이미 사라진 관중석은 선이 끊어진 스피커처럼 차분했다. 하지만 의자에 걸터앉아 차분함을 유지하는 팬은 없었다. 발가락 끝에서 척추를 타고 뒤통수까지 올라오는 전율 때문이었다. 먼저 떠난 사진 속 올드 팬들과 먼 미래에 2015년도 우승의 순간을 지켰다며 자랑스러워 할 역사의 증인들이 숨을 죽인 채 K1의 공 하나하나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레이첼, 지금 내려다보고 있소? 그토록 오래 기다려온 순간이 왔는데 난 당신이 더욱 보고 싶다오’
조명으로 환한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어딘가 1등급 별처럼 빛을 발하고 있을 아내의 눈동자를 찾던 찰스의 망막이 뿌옇게 흐려졌다.
"여보, 잠시 후 컵스가, 우리 컵스가 우승한다오. 당신의 손을 꼭 잡고 함께 봐야 할 순간인데....... 우리의 꿈을 이뤄준 저 아이가 우리 집에 살고 있소. 우리가 토스트와 커피를 함께 들며 아침을 맞이하던 그 거실 위에 순우가 있소. 당신이 손수 만든 레이스 커튼을 친 바로 그 방에 말이요. 여보, 조금만 더 기다려 주오. 저 아이를 좀 더 보살펴 주다가 당신 곁으로 가겠소. 당신이 날 기다리는 그곳에서 생전 그토록 졸라 대던 크루즈 여행을 떠나봅시다. 은하수를 누비는 아름다운 돛단배에 함께 올라....... 절대로 손을 놓지 말고.......’
평생을 염원해온 우승 직전, 누가 포수 출신 아니랄까 봐 줄곧 포수석의 죤만 쳐다보는 아론.
‘이젠 볼 배합도, 리드나 송구도 빅리그 정상급이구나. 장하다, 죤! 천하제일 K1도, 데뷔 첫해에 에이스급으로 발돋움한 론도 우리 죤이 받아주지 않으면 허수아비 아닌가 말이다!’
잃어버린 엄마를 찾은 것도 할아버지 덕택이라며 품에 안겨 볼을 비벼대는 죤, 식어가던 아론의 심장에 들어와 삶의 의지를 불어넣어 준 아이가 너무나도 자랑스러웠고 대견했다. 80을 살며 이토록 흐뭇한 순간이 있었는가? 50여 년 전 케네디 대통령으로부터 받아 보물처럼 간직해온 사인볼을 이제 거실 유리 책장에서 꺼낼 때가 되었다. 죤의 약혼 선물로 줄 생각이었다. 검버섯 핀 아론의 얼굴엔 밝고 환한 미소가 어렸다.
60년대 컵스의 마운드를 굳건히 지켰던 197승의 에이스 에디 또한 다른 모든 팬과 함께 지팡이를 의지한 채로 의자에서 일어섰다. 200승을 코앞에 두고 너무나도 일찍 찾아온 관절염에 절망하며 공을 놓은 손, 부끄럽다며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관절염으로 마디가 두꺼워진 보기 흉한 손가락이 이 순간만큼은 수치가 아니라 훈장처럼 자랑스러웠다.
‘K1! 우리 컵스의 투수 K1이 던지고 있다. 그리고 우승.......’
자신 대신 공을 쥔 K1을 대견하게 바라보던 에디는 지독한 땀내음을 풍기며 뒷줄에 서 있는 대니를 힐끗 돌아봤다. 107년 만의 우승이 삶의 종착역이라 여겼건만 대니를 맡으면서 새로운 꿈이 생겼다.
‘컵스의 선발에 K1이 있다면 아무도 열지 못하는 컵스의 뒷문은 K1급 클로져 대니가 지키게 될 거다.’
에디가 장미빛 야망을 이어갈 때 타구음이 들렸다.
<따악>
두 번째 타자 에릭 호스머가 3구를 정신없이, 거의 무조건 반사로 휘두른 방망이 중앙에 K1의 슬라이더가 걸렸다.
“아~아~”
“어, 안돼~!”
“저런......."
우중간을 힘있게 가르는 호스머의 날카로운 타구는 누가 봐도 안타였다.
6회 병살을 기록하며 고개를 숙였던 우익수 솔러는 타구 소리를 듣는 즉시 반응하는 몸을 따라 움직였다. 코의 호흡은 멎었고 머릿속은 텅 비었다. 시간이 멈추고 공간도 휘어버린 4차원의 무대에 홀로 오른 솔러는 오직 잡아야 한다는 마음뿐, 팔을 잘라내더라도 저 날아오는 하얀 물체는 반드시 글러브에 받아 넣어야 한다는 집념으로 시공 사이에 뚫린 좁은 길을 내달렸다.
“날아오는 공을 포착한 우익수, 포지션을 잡고 뛰기 시작합니다. 아~ 거리가 너무 떨어져 있는데요. 뜁니다, 뜁니다! 공이 떨어지는 지점으로 몸을 날립니다! 아~ 슬라이딩을 하며 팔을 쭉 뻗은 우익수 솔러! 넘어지는 동시에 몸이 튕기고 모자가 벗겨질 정도의 충격을 받으면서도 눈은 끝까지 글러브를 응시했는데요. 어떻게 되었나요?”
자신 없어 하던 솔러가 누운 상태에서 글러브를 들여다보고는 용수철처럼 일어나 두 팔을 번쩍 들었다. 동시에 터져 나오는 엄청난 환호와 감격 사이로 구장 한구석에서 작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 흔한 안타 하나 만들기가 이토록 어려운 것인가? K1, 너는 과연 누구냐?’
솔러가 넓은 수비 범위와 정확한 판단력으로 안타성 타구를 플라이로 처리하자 요스트 감독의 눈에 타오르던 최후의 불꽃이 급속히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운명을 거부하기 위해 온갖 힘을 쓰던 로열스는 소름 돋는 호수비, 신들린 슬라이딩 캐치에 마지막 남은 엔진 마저 꺼지면서 추진력을 잃더니 허무하게 추락해갔다.
9회 투 아웃.
‘기가 막히는군. 지난 70년간 10월에 맛본 적이 없던 것을 11월에 먹고 마시다니 말이야. 그래, 우리 컵스가 이렇게 월드시리즈 우승을 하는군. 이제야 아버지 뵐 면목이 생겼어.’
여전히 양손에 리글리 필드 독점 볼파크 프랭크 샌드위치와 윈디시티 맥주를 들고 있던 리처드가 밤하늘을 쳐다보며 한숨으로 구단을 운영했던 불쌍한 아버지를 떠올렸다. 잠시 후 여러 감회에 흠뻑 젖어있는 여섯 친구 곁을 떠나 3층 구단 사무실로 향했다.
아웃 카운트 하나를 남겨 놓고 60년대 컵스의 스타 크리스는 뒷줄에 앉은 아들 내외와 손자를 돌아봤다. 야구에 재능이 있다고 우겨 놓고 지미를 맡은 이후 흰머리와 한숨만 늘었지만 그래도 행복했다. 원래 손자 야구는 할아버지가 책임지는 거다. 마운드에서 마지막 공을 뿌리는 저 K1처럼.
‘야구에 미쳐 돌보지 않은 아내가 갑자기 병으로 떠난 이후 삶의 의미를 잃었고 아들 제이슨 마저 공허한 뒷마당이 싫다며 식구를 데리고 도망치듯 나갔을 때는 모든 것을 포기했었는데.......’
그토록 야구를 미워하더니 어느 날 갑자기 K1과 죤을 슬그머니 뒷마당에 들여보내며 식구를 데려와 대화를 시작하고 마음을 열어준 착한 아들. 이치를 따진다면 아무 할 말이 없는 자신을 이해하고 감싸주는 아들이 그토록 오매불망하던 우승보다 더욱 값져 보였다.
아들을 생각하는 이는 또 있었다, 바로 옆에서.
컵스가 낳은 최고의 1루수였던 사이먼은 큰돈을 강탈하듯 받아 들고 나가 몇 년째 소식이 끊긴 아들을 하루라도 잊은 적이 없었다.
‘야구에 미쳐 늦게 본 아들, 컵스의 우승을 갈망하다가 언제 컸는지도 모른 아들, 그저 착하기만 하던 아들에게 여태 미안하다는 말도 하지 못했는데, 그리고 이제는 할 수 있는데, 지금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니?’
론과 그의 가족을 데리고 살며 보람을 얻고 외로움을 어느 정도 잊었지만, 우승의 순간이 다가오자 다시 떠오르는 아들 생각에 작게 소리 내어 불러봤으나 금세 목이 메었다.
‘우승과는 비교할 수 없이 귀한 내 아들 레이! 보고 싶구나. 지금이라도 당장 오너라.’
열 효자가 악처 하나만 못하다 했던가. 악처라고 하면 천벌을 받을, 천사보다 착했던 아내가 암으로 떠나자 엄마 잃은 아이처럼 서럽게 울며 뒷마당에 묻은 테리 또한 우승 직전 아내를 떠올리고 있었다.
‘뒷마당에 묻은 날 나의 삶도 함께 묻었고 그 이후 껍데기만 남아 부질없는 목숨을 이어온다 여겼는데, 이렇게 좋은 날도 찾아오는구나.’
바로 뒤에 앉아 수다를 떨던 마크, 래리, 프레드 노총각 3총사가 그의 마음을 훔쳐보기라도 한 듯 팔을 내밀어 그의 어깨를 포근하게 안아줬다. 함께 살며 어느덧 정이 들었고 이젠 손자처럼 없어서는 안 될, 안 보이면 불안한 그 셋이 말이다.
‘오빠! 오빠가 어떤 사람인지 제가 왜 모르겠어요. 모든 것을 걸 만큼 제가 가치가 있나요? 못났지만 오빠 마음 받을게요. 어쩌면 춘천의 닭갈비 식당 문을 열고 들어오는 오빠의 첫 눈길에 이미.......'
건네받은 쪽지에 적힌 순우의 서툰 한글을 이미 수없이 되풀이 읽은 지현이 마운드에서 마지막 공을 뿌리는 오빠를 바라보며 마음의 대화를 이어갔지만 정작 중요한 대목에서 멈춰야 했다.
로열스의 27번째 타자 마이크 무스타커스의 방망이가 허공을 가르며 경기가 끝났기 때문이다.
2015년 11월 4일 밤 10시 39분.
“.......”
“.......”
“.......”
태초에 빛이 있었다면 그 전에 존재했던 고요와 적막이 이러했을까.
멈춰진 화면처럼 구장의 모든 것이 정지했고 흐르던 시간 마저 멈춰 서더니 너클볼을 빛내기 위해 사라졌던 한 줄기 바람이 어디선가 불어와 마법에 걸린 세상을 깨웠다.
그제야 작은 흐느낌이 관중석 여기저기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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