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문으로만 들어온 K1
로열스의 다섯 번째 투수가 올랐다.
켈빈 헤레라.
도미니카 공화국 출신의 26세 우완인 그의 이름 앞에는 항상 파이어볼러 타이틀이 붙었다. 데뷔 때부터 남다른 강속구를 뿌리더니 곧 포심과 투심 모두 100마일이 넘었다. 속구를 노리는 타자들은 빨라도 너무 빠른 볼에 대처하지 못하고 헛스윙을 남발하다가 혀를 내두르며 덕아웃으로 들어가기 일쑤였다.
“더 이상 막강한 무기는 없다, 6회만 넘기면 우리가 이긴다.”
8회 담당 데이비스 그리고 9회에 올라 철문을 내리는 홀랜드와 더불어 7회 전문 헤레라를 두고 이렇게 큰소리친 요스트 감독의 믿음대로 불펜 트리오는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고의 필승조로 평가받으며 믿을 만한 셋업맨 하나 없는 팀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고 있었다. 그 유명한 트리오의 멤버 파이어볼러 헤레라가 무사에 주자를 두 명이나 둔 위기를 극복하라는 특명을 받고 7회 대신 6회에 올랐다.
문제는 타석에 선 4번 타자 브라이언트. 2차전과 5차전에서 각각 한 번씩 상대한 결과는 그리 신통치 않았다. 2루수 키를 넘는 안타와 담장 가까이 가는 뜬공을 뽑아낸 저 새내기의 타격술이 보통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기가 죽을 헤레라는 더욱 아니었다. 초구는 당연히 성명 절기 100마일 투심. 포심으로 믿고 자신 있게 휘둘렀으나 공은 몸쪽으로 파고들었다. 코치의 사인을 받은 새내기는 자만심을 버리고 신중함을 택하면서 유인구에 인내심을 발휘했다.
순식간에 카운트는 2-3.
포수 살바도르 페레즈가 긴장한 표정으로 코치를 돌아봤다. 예상한 대로 걸러 보내라는 사인이 왔다. 저 무서운 K1이 마운드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상황에서 이미 한 점을 빼앗긴 것부터 엄청난 부담이 되고 있는데 만용을 부리다가 한두 점 더 주게 되면 판을 뒤집을 기회는 없다고 판단한 감독의 결정이었다.
사인을 받은 헤레라가 조명으로 환한 밤하늘을 한 번 올려다봤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월드시리즈 7차전에서 고집을 피울 수는 없는 일. 그렇다고 포수가 발을 빼서 서서 받을 정도로 자존심이 짓밟혀서는 안 된다. 휘둘러 주면 좋고 아니어도 상관없는 바깥쪽 공을 던졌고 미남에 눈까지 좋은 새내기는 실실 웃으며 1루로 걸어나갔다. 빠른 발에 센스까지 뛰어난 그를 내리고 대주자를 기용할 리는 없었다.
베이스는 꽉 찼고 구장 또한 함성으로 가득 찼다.
“로열스가 브라이언트를 거르고 애디슨 러셀을 선택하는군요.”
“예. 2회에 첫 안타를 뽑아냈죠. 하지만 이번 시리즈 성적은 그리 좋지 않습니다. 로열스가 이를 계산에 넣었겠죠. 그리고 만루니까 도루 견제에 신경 쓸 필요도 없고요.”
“예상대로 초구를 또 투심으로 날렸는데요. 구 위원, 전형적인 파이어볼러 헤레라의 패스트볼과 K1의 포심을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글쎄요. 5회까지 너클볼로 로열스 타선을 꽁꽁 묶다가 6회 들어 특유의 인코스 포심을 꺼내 들었는데요. 단순히 속도만 놓고 본다면 헤레라의 구속이 조금 높습니다. 하지만......."
100마일이 넘는 광속구를 날리는 파이어볼러들이 팀마다 최소한 한두 명씩 존재하는 빅리그에서 유독 100마일 내외를 오가는 K1의 포심 패스트볼에 ‘언터처블’ 타이틀이 붙는 이유는 과감한 인코스로 타자의 혼을 빼며 스트라이크를 잡는 송곳 제구뿐만이 아니다.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진 그의 손가락 굳은살 덩어리에 감겨 팽이처럼 돌아 나오는 스핀은 메이저리그 역사를 새로 쓰고 있었다.
“리그 패스트볼 평균 분당 회전수 2,200에 비해 무려 2,800을 오르내리는 가공할 회전을 먹고 들어오는 K1의 공은 낮게 들어 오다가 타자 앞에서 확 솟아오른다고 해서 최근에는 토네이도 볼이라는 새로운 별명이 붙었습니다. 98마일로 날아오는 공이 타자들의 눈에는 103마일로 보인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지요. 게다가.......”
손가락 간격뿐 아니라 두 손가락에 주입하는 힘을 미세하게 조절하여 던지는 K1의 투심과 커터, 스플리터와 포크볼 같은 속구 계열의 구종은 구속과 회전수에 변화까지 일으키며 플레이트 앞에서 휘고 떨어지는 각도가 여느 구종과 큰 차이를 보였다.
“특히 커터는 중지의 힘이 중요한데요. 날고 긴다는 빅리거 중에서 커터를 제대로 던질 수 있는 투수는 그리 많지 않아요. 중지 하나를 철봉에 걸고 몸을 들어 올릴 정도는 돼야 하거든요. 그만큼 중지에 가해지는 힘이 상상을 초월합니다. 이런 파워로 던진 공은 궤적이 잘 보이지 않고 가라앉는 위치와 각도를 예측하기 어렵죠.”
주자에 신경 쓰지 않고 타자 잡기에 전념한 헤레라가 러셀을 삼진으로 돌려세우자 관중은 한숨 섞인 실망 대신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며 응원을 시작했고 인기가 급상승한 6번 타자 죤이 긴장한 표정으로 타석에 들어섰다. 처음 만나는 투수와 타자는 눈싸움으로 대결을 시작했고 포수 페레즈가 지원사격에 나섰다.
“어이, 죤. 자네에게 뽀뽀해준 관중석의 그 아가씨 말이야. 내가 며칠 전 클럽에서 본 얼굴이던데. 대충 휘두르고 빨리 들어가서 물어봐. 날 아느냐고 말이야. 모른다는 말은 못 할걸.”
타자 속 긁는 도발 신공으로 따진다면 리그 최정상급에 속하는 죤이라 페레즈의 말은 무시했지만, 은근히 나빠지는 기분은 어쩔 수가 없었다. 나중 얘기지만, 클럽에 간 적이 있냐고 물어보며 솔직하게 대답하면 용서하겠다는 지지리도 못난 남친의 말에 처음에는 황당해하다가 이내 대답 대신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심하다는 표정을 짓는 앨리스의 표정을 보고는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그렇다고 누군가의 모함이라며 핑계를 댈 수도 없고.
'페레즈, 너 다음에 만나면 죽었어!'
그간 착실하게 모은 점수를 소심한 질문 하나로 몽땅 날려버리긴 했지만, 아무튼 월드시리즈 7차전 만루 상황에 타석에 선 타자로서 클럽의 진실에 얽힌 찜찜한 기분은 즉시 날려버리고 공에 집중했다. 타격 코치의 사인이 남달랐기 때문이다. 베이스의 주자들 또한 사인을 보고 긴장했다.
패스트볼은 보내고 유인구에는 속지 않던 죤의 방망이가 헤레라의 4구를 받아쳤다, 번트 자세로.
“아, 아! 죤 마저 번트를, 그것도 만루에서. 정말 아무도 예상 못 한 작전이군요.”
“저도 놀랐습니다. 슬러거에 속하는 죤이 번트를 대다니, 매든 감독이 한 점 추가에 모든 것을 걸었어요.”
“한 점 리드하는 상황에서 1사 만루에 번트라,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합니까?”
“보통 아웃 카운트에 여유가 있고 점수 차이가 크게 나지 않거나 한 점 승부로 승패가 갈리는 상황에서 가끔 나오는 작전입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대부분 히트 사인이죠. 외야 파울볼로도 점수가 나니까요. 그런데 매든 감독이 반대의 작전을 구사하며 수비로 이름난 로열스의 허를 찔렀습니다. 수비가 작전을 간파하고 전진수비로 나올 경우에는 성공 가능성이 없겠지만, 타자가 죤이다 보니 번트는 예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성공했으니 다행이지 만약......."
실패했다면 팀 분위기는 그대로 가라앉았을 것이다. 물론 분위기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타구가 떠서 내야 플라이로 잡히면 최소한 병살에 노아웃이었다면 트리플 플레이도 가능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1루 방향으로 깊숙이 대어 홈으로 송구하는 것을 최대한 막고 아웃되더라도 자신만 죽어야 하는데 번트에 서툰 죤이 보낸 방향은 엉뚱했다.
3루와 유격수 사이로 다소 빠르게 굴러간 공은 투수가 다가가서 집어 들던지 유격수가 앞으로 달려 나와 홈이든 1루에 송구할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뒤쪽으로 향해 있던 유격수는 멀어진 거리에다 몸의 방향을 전환할 시간이 필요했고 투구 동작을 마친 투수의 자세는 공을 쫓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방향을 잡은 유격수가 튀어나오며 공을 집어 들기 전에 3루의 코글란은 쏜살같이 홈을 파고들었고 이를 본 유격수가 있는 힘을 다해 1루로 던졌으나 주자의 발이 베이스를 스친 직후였다. 이렇게 만루에서 댄 죤의 엉성한 번트는 명품 수비로 명성을 떨쳐온 로열스를 멘붕으로 몰아넣었다.
스코어 2-0.
애써 평정을 유지하던 요스트 감독의 안색이 변했다. 번트를 막지 못한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K1을 상대한 경기에서 한 점과 두 점은 의미가 달랐기 때문이다.
“구 위원, 추가 실점으로 로열스 벤치가 상당히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는데요.”
“그럴 수밖에 없죠. 아무리 K1이 0점대 방어율 투수라도 한 점은 만회할 수 있는 점수입니다. 완봉을 밥 먹듯 해도 점수를 내어주는 경기가 조금 더 많으니까요. 문제는 실점의 숫자인데요. 두 점을 내준 경기가 드물다는 겁니다.”
죤의 내야 안타로 한 점을 더 달아난 컵스는 이어 오른 솔러의 병살로 추가 득점에는 실패했지만 대체로 만족해하는 표정이었다. K1이 마운드를 지키는 경기에서 굳이 힘들여 많은 점수를 낼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서로 말은 없어도 수비에 치중하자는 눈빛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한결 여유가 생긴 컵스에 비하면 로열스는 꼬리에 불붙은 쥐가 되었다. 걷어내기로 투구 수를 늘려 조기 강판을 노렸건만 6회까지 72구라는 짠물 피칭으로 여전히 쌩쌩한 어깨를 자랑하던 K1이 한술 더 떠 7회부터는 팔의 각도를 내려 던지면서 아메리칸리그의 최강자 로열스는 소문으로만 들어온 내셔널리그의 K1을 심도 있게 실감하기 시작했다. 1차전에서 완봉을 이루던 모습과는 또 달랐기 때문이다.
“디셉션은 한 마디로 타자를 속이는 기술입니다. 릴리즈 순간까지 최대한 공을 숨기기 위해 쿠에토처럼 등을 보이는 변칙적인 투구폼으로 타자의 타이밍을 흐트러뜨리죠. 물론 적응한 타자가 속지 않는다면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K1의 디셉션은.......”
차원이 달랐다. 스리쿼터가 사이드암 가깝게 팔을 내려 던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하나의 구종이 팔의 각도에 따라 두 개의 전혀 다른 변화를 보였다. 팔의 각도가 다르면 사용하는 근육도 달라져 어깨나 팔꿈치에 과부하가 걸리는 약점은 투구폼 수정으로 보완했다. 순우는 이를 디셉션이 아닌 새로운 구종을 위한 플랫폼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같은 공이라도 효과가 다른가요?”
“방금 던진 슬라이더는 팔을 내려 던졌죠. 6회까지 보인 스리쿼터 슬라이더와는 이곳 중계석에서 봐도 상당히 다른데 타석에서 공을 바라보는 타자에게는 오죽하겠습니까. 이미 못 던지는 공이 없다는 평을 듣는 K1이 사이드암으로 던지는 공까지 더해 명실공히 ‘언터처블 하이브리드’ 경지를 이룬 거죠. 특히 내려 던지는 싱커는.......”
좌타자 상대용으로 익혀 올해부터 던지기 시작한 싱커는 상상을 초월하는 높은 회전각으로 인해 아직 제대로 된 안타를 맞지 않아 스윙하는 순간 배트 밑으로 사라지는 슬라이더와 함께 귀신 붙은 공(ghost ball)으로 불렸다. 그리고 로열스 타선은 귀신을 보았다.
7회가 시작되자 여러 사람이 여러 생각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번트를 허용한 헤레라가 내려가고 라이언 매드슨이 올라 왔다가 이내 루크 호체바로 교체되었지만, 프리미엄 석의 노인들은 조용했다. 외로운 리처드가 교체 타이밍을 놓고 내기를 걸며 정다운 대화를 이어가려 했으나 7회에 접어들자 여섯 친구는 약속이나 한 듯 얼굴이 굳어지며 입을 닫았다.
“아직 1루를 밟은 타자가 없다.”
모두가 107년 만에 찾아온 우승의 순간을 눈앞에 두고 극도로 흥분하고 있을 때 포수석의 죤은 친구가 7회까지 안타를 허용하지 않은 것에 더 큰 의미를 두고 있었다.
“저....... 어머니. 부탁드릴 게 있어요. 8회 말이 끝나면....... 이 편지를....... 지현에게 주시겠어요?”
죤이 K1의 새로운 기록 달성 가능성을 생각할 때 죤의 엄마 케이트는 옆에 앉은 지현을 곁눈질하며 코트 주머니 속의 쪽지를 매만지고 있었다. 이날 오전 구장으로 떠나기 직전 홍당무 얼굴을 한 순우가 망설이며 건네준 곱게 접은 메모지였다.
- 작가의말
오전에 컵스의 2016 월드시리즈 진출 확정 뉴스를 봤습니다. 순간 글로 표현하기 힘든, 마치 여러 기억이 꼬인 단기 기억상실과 비슷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소설 속 설정과 제가 사는 세상 사이에서 혼란을 겪는다면 우습겠죠? 현실 앞에서 소설로 쓴 허구는 의미가 없다는 생각도 들더군요.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를 누르고 108년 만의 우승을 일궈 낼지 함께 지켜봅시다.
컵스의 선전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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