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고맙고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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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수가 타자에게 아웃 카운트를 빼앗는 방법은 두 가지, 삼진과 맞혀 잡기다. 전자는 자기 힘으로, 후자는 수비수의 힘으로 이뤄진다.
뛰어난 구위를 뽐내며 타자를 돌려세우는 투수에 팬들은 열광한다. 투수 주요지표에 뜬공 처리 기록은 없어도 탈삼진은 빠지지 않는다. 하지만 범타 유도에 능한 투수 또한 쓸모가 많다. 풀 카운트까지 몰고 가서 아슬아슬하게 타자를 돌려세우는 닥터 K보다는 땅볼이나 뜬공으로 여유 있게 아웃 카운트를 잡아내는 범타 제조기가 감독에게는 더 안전해 보인다.
대니가 본 대로 로열스의 투 피치 선발 영은 전형적인 맞혀 잡기 투수다. 그저 그런 구위에 구종 또한 단순하니 투수로서는 선택의 폭이 좁고 타자에게는 예상한 공이 들어올 확률이 높아진다. 따라서 탈삼진이 적을 수밖에 없는 그가 노리는 것은 당연히 범타다. 요스트 감독의 의도대로 투심과 슬라이더의 적절한 배합이 영처럼 경험 많고 노련한 투수의 손에서 뿌려지자 빗맞은 공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컵스의 1회 세 타자 모두 땅볼로 물러났다.
하지만 영의 피칭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던 노인들의 입에서는 그다지 긍정적인 평가가 나오지 않았다.
“저런 외줄 타기 피칭이 얼마나 갈까?”
“힘 좋은 타자에게 걸리면 빗맞은 타구도 위험하다는 게 문제야.”
“바람을 안고 가면 웬만한 뜬공도 담장을 넘어갈 수 있어. 내가 친 홈런 중에 그런 경우가 적지 않았지. 그런데 오늘 밤은 바람이 없군.”
컵스를 대표하던 강타자 크리스와 사이먼 그리고 찰스의 훈수와 해설이 끝나기가 무섭게 2회 말 두 번째 타자 애디슨 러셀의 땅볼이 3루수 옆을 스치며 지나갔다. 다음 타자 죤을 뜬공으로 잡아 위기를 넘기는가 싶더니 7번 타자 호르헤 솔러가 때린 공이 애매한 곳에 떨어지면서 두 명의 주자가 목에 걸린 가시처럼 투수의 신경을 건드렸다. 8번 타자 순우가 헛스윙으로 영에게 첫 삼진을 선사했고 영은 위기를 넘겼지만, 누군가의 마음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구 위원. 요스트 감독이 불안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더니 3회 시작부터 데이비스를 올리는군요.”
“영이 2개의 안타를 내주긴 했어도 위기를 잘 넘겼는데 감독은 안심이 되지 않았나 봅니다. 아무래도 오늘 같은 경기에서는 초반 실점에 민감할 수밖에 없죠. 그렇다 해도 교체 타이밍이 상당히 빠르군요.”
30세의 우완 웨이드 데이비스.
선발진에서 그의 이름을 찾을 수 없어도 캔자스시티에서는 여느 선발보다 인기가 높다. 올해 69경기에 출전하여 18홀드에 17세이브를 올린 데이비스는 로열스가 그리도 자랑하는 철벽 계투진을 구성하는 핵심 투수이자 마무리급 셋업맨이다. 지난해에는 아메리칸리그 홀드왕을 차지했고 올해에도 ERA 0.94라는 환상적인 피칭으로 최강의 불펜 투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데이비스 하면 평범한 선발 대신 로열스를 먹여 살리는 난공불락 불펜의 대표적인 투수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주로 헤라라가 7회를 맡고 데이비스가 8회를, 홀랜드가 9회를 맡죠. 특히 데이비스의 평균자책점 0.94는 50이닝 이상 던진 불펜투수들 기록 중 가장 낮은 수치이면서 유일한 0점대이기도 합니다. 데뷔 초기에는 선발로 뛰며 92마일의 패스트볼을 던지다가 불펜으로 전향하며 구속이 늘었어요. 평균 95마일에 이르는 패스트볼과 커브볼을 주 무기로 사용하고, 특히 커터는 0점대 방어율의 일등공신입니다.”
시원하게 들어오다가 마지막에 살짝 휘는 커터는 존을 스쳐 들어오기 때문에 타이밍을 잡기 어렵고 투심과 휘는 방향은 달라도 무브먼트가 비슷해 제대로 맞추기 힘들었다. 커터의 신이라 추앙받는 양키스의 마무리 마리아노 리베라와 비교될 정도로 구위가 좋다는 평을 듣고 있었다.
“아마도 데이비스는 완급조절로 많은 이닝을 끌고 가야 하는 선발보다는 적은 투구 수 내에서 모든 힘을 실어 던지는 계투가 더 적합했나 봅니다.”
“그런 것 같습니다. 계투라면 적게 던지는 대신 구위가 좋아야 하고 맞더라도 장타를 피하는 요령이 필요한데 데이비스는 이런 요건을 잘 갖추고 있습니다. 게다가 몸도 빨리 풀려 불펜에서 연습구를 던지지 않고 곧바로 마운드에 오르는 날도 있다고 하니 타고난 계투라고 봐야겠죠.”
보통 계투는 신인이나 선발 경쟁에서 밀려난 선수가 맡지만, 데이비스는 강한 멘탈에 삼진을 잡는 스터프 능력과 빠른 공을 갖추고 있어 클로져로도 부족함이 없는 전천후 계투였다. 구정한의 해설대로 계속되는 속구 이후 갑자기 떨어지는 낙차 큰 커브볼에 컵스 타선은 쉽게 타이밍을 빼앗겼고 결정구로 휘어 들어오는 커터에 맥을 못 썼다. 그가 오르는 이닝에는 점수가 나지 않는다는 말이 나올 만했다.
하지만 모든 투수에게 천적은 있는 법. 최근 3경기에서 저조한 타격을 보인 덱스터 파울러가 4회 첫 타석에 들어서자마자 물 만난 고기처럼 데이비스의, 그것도 그가 자랑하는 커터를 정통으로 맞춰 월드시리즈를 못 보고 세상을 떠난 올드 팬들의 흑백사진으로 도배가 된 담장 근처까지 가는 장타를 만들어냈다.
이날 처음 터져 나온 시원한 2루타에 사만 가까운 관중은 또다시 혼연일체가 되어 ‘고우 컵스 고우’를 외치기 시작했고 프리미엄 석의 뒷마당 패밀리도 응원에 합류했다.
“이봐, 리처드. 이제 저 로열스 감독이 어떻게 나올 것 같은가?”
“지금 투수의 구위가 괜찮고 3회도 잘 막았지. 4회에 맞은 첫 안타니까 좀 더 두고 보지 않을까?”
“난 곧 교체한다에 샌드위치 맥주 한 세트와 따뜻한 커피를 건다.”
“나도”
“나도”
“아니 그게 아니고.......”
“끝!”
리처드가 재고할 여유도 없이 6대1의 배팅은 순식간에 끝이 났고 그와 거의 동시에 요스트 감독이 타임을 걸었다. 이것이 선수와 경영인의 차이였던가. 패자는 말이 없는 법, 분하고 원통하다는 얼굴로 뒷좌석의 아들을 불렀다.
“이봐라, 톰. 세트와 커피 7개! 빨리 갖고 오너라.”
“예?”
‘명색이 시카고 컵스를 주름잡는 구단주에 최소한 시카고에서는 시장과 동급인 저명인사에게 커피 심부름이라니!’ 하는 황당한 표정을 짓자 황제의 호통이 터져 나왔다.
“그럼 이 나이에 내가 가랴?”
그때 크리스가 점잖은 톤으로 부자간에 불을 질렀다.
“리처드, 식구들은 추위에 떨고 있는데 우리끼리 마시자니 좀 그렇군.”
“꼬마들은 커피 대신 치킨이 좋겠지.”
7세트와 커피가 졸지에 네 배로 늘더니 곧이어 치킨 50세트가 추가되었다.
“톰. 여기 손님들, 어른은 커피에 애들은 치킨으로! 빨리 안 갈래?”
로열스의 세 번째 투수는 프랭클린 모랄레스였다.
“안타 하나로 데이비스가 내려가는군요. 교체 타이밍이 너무 빠른 게 아닌가 싶군요.”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엔트리에 든 투수를 모두 올릴 생각인 것 같아요.”
“모랄레스는 어떤 선수인가요?”
“29세의 좌완입니다. 평균 구속 94마일의 패스트볼에 커브와 체인지업을 주로 던지는데 팬그래프닷컴에 따르면 그의 패스트볼은 매우 강력하지만, 그 외의 구질은 잘해야 평균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요스트 감독이 그를 올린 이유는......."
당연히 급한 불을 끄는 것이었다. 주자를 2루에 두고 편하게 피칭할 투수는 드물다. 4차전의 승리 투수 쿠에토가 오르기 전에 베이스는 말끔히 청소해 둬야 한다. 그러니까 모랄레스는 클로져가 아닌 클리너로 오른 것이다. 빠른 공을 지닌 좌완이니 한 이닝 정도는 책임져 주리라 믿었고 실제로 그는 믿을 만했다. 아웃 카운트 두 개를 잡을 때까지는 말이다.
4회 투 아웃 상황에서 타석에 들어선 죤은 희한한 배팅 기록을 갖고 있다. 좌완을 상대할 때 기록이 더 좋았다. 텐 피치 투수를 친구로 두고 수시로 그의 공을 받다 보니 다리의 움직임이나 팔의 위치만 봐도 구종 식별이 가능했는데 특히 좌완의 어깨 움직임이 그의 눈에 더 잘 들어왔다.
방망이를 곧추세운 죤 뒤에서 뒷마당 식구들과 특히 장래를 약속한 연인 앨리스의 열광적인 응원이 터져 나왔지만, 투수의 공에 집중한 그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큰 소리로 응원했는데 어떻게 한 번도 뒤돌아 봐주지 않냐며 앨리스가 따져 들면 겁에 질린 죤이 어떻게 나올 건지 여섯 노인은 살짝 궁금해졌다. 참으로 짓궂은 노인들의 망측한 호기심이 아닐 수 없다.
“타석에 죤이 들어섰네요.”
“예. 컵스에 데뷔 첫 타석에서 홈런을 친 타자가 둘이 있죠. 카스트로와 죤입니다. 작년까지만 해도 주전 포수 카스틸로에 밀려 마스크를 쓸 기회가 많지 않았는데 론 마저 그를 전담포수로 지목하면서 이제는 누가 주전인지 헷갈릴 정도가 되었습니다. 사담입니다만, 간식을 유난히 좋아하고 특히 한국식 양념치킨에 홀딱 반해서 저와 가끔 치맥을 나누기도 합······.”
구정한이 오랜만에 죤과의 친분을 과시하려던 시도는 타이밍을 잃었다. 2루 주자를 의식하며 세트 포지션에 있던 모랄레스가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는 자신의 성명 절기 포심을 쏘아 보냈고 이를 노리고 있던 죤의 어깨 또한 최대한 힘이 들어가며 방망이를 휘둘렀기 때문이다.
<따악>
대규모 합동 제사를 연상시키는 수많은 흑백사진이 걸려있는 우측 담장 하단을 맞추며 가뭄의 단비 같은 적시타가 터지자 그토록 한 점을 고대하던 팬들의 함성이 지진처럼 구장을 뒤흔들었다. 양 측 감독도 함께 흔들었다. 날아가는 타구를 바라보던 요스트 감독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자리에 앉았고 매든 감독은 팔을 높이 들고 흔들며 기쁨에 못 이겨 의자 위로 올라섰다.
유난히 큰 환호가 포수석 뒤편에서 터져 나왔다. 앨리스와 루리 병원의 아이들 그리고 힌스데일 꼬마 선수들이 일제히 일어나 한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외쳤고 엄마 케이트를 비롯한 뒷마당 식구들 또한 손뼉을 치며 흥분의 도가니에 빠졌다. 하지만 누구도 아론만큼 흥분하지는 않았다. 손자처럼 여기고 함께 살아온 귀염둥이 죤이, 7차전 첫 타점을 때려낸 자랑스러운 아이가 저기 2루 베이스를 밟고는 자신을 또렷이 쳐다보며 웃고 있지 않은가.
60년대 컵스 그라운드의 사령관과 현 컵스 안방마님의 눈길이 마주치며 마음의 대화를 나눴다.
‘할아버지, 고맙고 사랑해요.’
‘오냐, 네 마음 다 안다. 잘했다, 죤.’
1차전의 미친 선수 죤이 7차전 선취점의 주인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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