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간의 무리수
내셔널리그 동부와 서부지구 우승팀인 뉴욕 메츠와 LA 다저스는 디비전시리즈 5차전까지 가는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2006년 대결 이후 9년 만에 다시 만난 두 팀은 미국의 동부와 서부를 대표하는 대도시라는 자존심 싸움까지 걸려 있어 양 도시 팬들의 관심은 어느 때보다 컸다.
그에 비하면 중부지구 우승팀이자 빅리그 전체 승률 1위를 기록한 카디널스가 간신히 와일드카드 단판전을 치르고 올라온 셀라 드웰러(만년 최하위 팀) 시카고 컵스와 5차전까지 갈 줄로 예상한 야구 팬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컵스가 2승을 모두 완봉으로 장식할 줄은 더욱 몰랐던 사람들은 K1과 론을 보유한 컵스가 올해 과연 어디까지 갈지 더욱 지대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3차전으로 시리즈를 끝내고 메츠와 다저스의 혈투를 즐겁게 지켜볼 생각이었던 매시니 감독의 표정이 밝을 리는 없었지만 그리 비관적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컵스를 상대로 5차전까지 오다니 한심하군. 다행히 저쪽 두 팀도 마찬가지니 불리할 것은 없겠지만.'
그는 내심 메츠를 응원했다. 커쇼와 그레인키가 버티고 있는 다저스가 조금 버거운 건 사실이었으니까. 5차전을 앞둔 상황에서 일찌감치 챔피언십시리즈 상대를 두고 고민할 만큼 그는 컵스에 자신이 있었다.
'K1과 아리에타는 나오지 않는다. 기껏해야 해멀과 레스터 정도고 헨드릭스나 우드는 우리가 환영할 만한 투수지. 유일한 변수라면 4일 쉰 론인데......."
그러다가 생각이 이틀 전 4차전에 머물자 고개를 흔들었다. 떠올리기조차 싫은 그 날 K1의 신들린 공에 하마터면 또다시 퍼펙트를 헌납할 뻔하지 않았던가. 상징처럼 굳어진 그의 모자챙 인사가 나오고 1루 측 뒤편에 떼 지어 앉은 어린이 팬들을 포함하여 관중 대부분이 동시에 일어나 모자챙을 만지며 그의 이름을 부를 때만 해도 이날의 선발은 그저 비교적 작은 체구의 마른 체형을 지닌 평범하고 순한 인상의 동양인 투수에 불과했다.
연습구로 던진 8개의 공 모두 구종이 다른 것을 보고서야, 그리고 그의 공에 실린 위력에 타석에 들어서기 전부터 일찌감치 얼어붙은 카디널스 타자들의 표정을 보는 순간 시즌 25승과 2년 연속 0점대 방어율을 기록한 넘사벽 투수가 마운드에 서 있다는 현실로 돌아왔다.
카디널스의 퍼펙트게임 트라우마가 또 터진 걸까, 이미 눈빛만으로 완전히 제압당한 타자들이 어떻게든 삼진을 피하고자 성급히 휘두른 방망이 덕분에 3회까지 투구 수는 겨우 22개에 불과했다.
"다들 왜 그래? 끝까지 몰고 가란 말이야. 2구까지는 손대지 말라고. 기다리다가 떨어지는 공을 받아쳐."
기가 막힌 투수 코치가 덕아웃을 향해 마구 고함을 지르고 누가 들어도 신통치 않은 공략법을 제시하며 살아나갈 방법을 제시해 주었지만, 타석에 들어가기만 하면 늑대 앞에 선 순한 양이 되어버린 타자들 덕분에 K1은 6회까지 정확히 50개를 던지며 일찌감치 완봉을 예고했다.
8회에 헤이워드가 거의 눈감고 휘두른 배트에 맞은 투심이 2루수 키를 살짝 넘어 이날의 첫 안타가 되었을 때 감독은 자신도 모르게 만세를 부르며 눈물을 글썽거렸고 9회 두 번째 타석에서 몰리나가 이를 악물고 받아 올려친 포크볼이 3루수의 글러브를 맞고 튀었을 때는 그의 발에 입에라도 맞춰주고 싶었다.
매시니 감독이 컵스에 진 것이 아니라 K1에 졌다고 여기며 애써 자신을 위로할 때 5차전을 치르기 위해 다시 세인트루이스로 부시 구장에 돌아온 매든 감독 또한 4차전의 사이다 게임을 떠올리며 환한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웃음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눈앞의 현실이 암담했던 것이다.
1차전에 나왔던 존 래키를 선발 예고한 것을 보고 일단 해멀 카드를 쓰기로 결정한 감독은 어쩌면 올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코치진 전체 회의를 소집했다.
"우선 해멀을 올려 2, 3회까지 쓰고 레스터로 바꿔 5회까지 버티면 헨드릭스와 우드를 올리죠"
"8회까지 스트롭과 그림이 지켜주면 9회에 론돈이 올라 끝내면 됩니다."
코치들도 투수진 풀가동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감독은 거명된 투수들을 하나하나 떠올려봤다.
긁히는 날이면 K1급 구위를 보이는 해멀. 그런 날이 별로 없다는 게 문제다. 1차전에서 나름 자기 역할을 한 레스터가 감독 앞에서 거의 시위조로 팔팔한 어깨를 과시하고 다녔지만 불안했다. 아리에타의 13패는 감독인 자신이 봐도 미안하고 억울한 결과였지만 레스터의 16패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20패를 면한 것에 감사해야 할 것이다.
우드와 헨드릭스는 꾸준하지 않았다. 크게 이길 때는 쓸데없이 잘했지만 2, 3점 차 박빙의 승부에서는 치킨급 새가슴이 되었다. 스트롭과 그림은 주자 처리에 미숙했고 마무리 론돈은 1차전에서 잃은 자신감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110개를 던진 론이 4일 쉬었으니 60개 정도는 무리 없이 던질 수 있을 겁니다."
누군가 론 얘기를 꺼내자 눈치를 보던 보시오 투수 코치가 망설이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흐음. 그리고 말입니다. 이틀 전 순우가 82개를 던졌습니다.”
“순우? 지금 순우 얘기하는 거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시오. 완투한 선발이 어떻게 하루 쉬고 오를 수 있겠소? 래키 공을 받기 전에 팬들이 먼저 우리에게, 아니 나에게 돌을 날릴 거요.”
장기적인 안목으로 원칙을 지켜 선수를 보호한다는 감독의 철학은 굽히지 않았지만 이어진 말에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감독님,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리 쪽 포럼 게시판부터 시작해서 시카고 지역 언론 대부분이 챔피언십시리즈를 위해 약간의 무리수 두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여론이 지배적입니다.”
세인트루이스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전국구 언론들이 이미 동부와 서부 간의 디비전시리즈 승자와 카디널스 간의 가상 대결 기사를 올리고 있는 상황을 본 컵스의 팬들은 마음은 급해졌다. 곧 5차전 승리를 위해서라면 못 할 것이 없다는 여론이 퍼졌다. 코치가 말한 ‘약간의 무리수’는 다음과 같았다.
“선발이고 계투고 간에 무조건 다 올라가라.”
“5명의 선발이 1회씩 맡아라.”
“4일 쉰 론이 선발을 맡아라.”
“만루의 위기는 K1이 책임져라.”
“투수진 소모로 챔피언십시리즈를 말아먹어도 비난하지 않겠다.”
‘팬심은 천심’이라고, 어쩌면 그토록 매든 감독의 애타는 속마음을 정확히 꿰뚫어보고 있는지 놀랄 정도다. K1까지는 아니더라도 위기가 닥치면 론과 아리에타를 가리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리고 디비전을 넘어 챔피언십시리즈에 오르면 어떤 결과에도 비난하지 않겠다는 팬의 다정한 말 만큼은 절대로 천심이 아님을 감독은 잘 알고 있었다. 카디널스를 눌렀다며 영원한 태양처럼 받들어주다가 2연패라도 당하면 천하에 보기 드문 무능한 감독이니 뭐니 하면서 당장 K1을 올리라며 온갖 압박에 위협까지 서슴지 않을 테니.
“구 위원, 이렇게 5차전까지 왔군요. 지금 이 시각 메츠와 다저스도 5차전을 치르고 있는데요. 오늘 경기를 어떻게 보십니까?”
“이런 상황이면 오히려 단순해집니다. 챔피언십시리즈에 올라가 4연패를 당하더라도 일단 오늘은 이겨야 하니까요.”
“그럼 인해전술 비슷해지겠군요.”
“그렇게 보면 될 겁니다. 선발이니 계투니 하는 개념은 없다고 봐야죠. 타선도 출루를 목표로 해야 하니 갖은 수가 다 나올 테고 대타 요원도 최대로 활용할 겁니다. 더블 스틸도 심심찮게 볼 수 있겠죠. 이렇게 되면 뛰는 야구에서 한발 앞선 카디널스가 유리합니다.”
야구의 기본기부터 다듬기 시작한 매시니 감독의 ‘뛰는 야구’가 야구의 천재들로 득실대는 빅리그에서 통할지 의문을 가진 이들이 많았지만, 뚝심으로 버틴 감독은 성적으로 증명했다.
“100m를 12초대에 뛰지 못하면 야구 선수가 아니다.”
“도루는 10cm에서 결정 난다. 누가 그 거리를 선점하느냐에 따라 그 날의 경기가 결정된다.”
“내 눈에 흙이 들어와도 외야수가 원 바운드로 송구하는 것은 안 된다.”
“어떤 공이든 원하는 반원 안에 번트 공을 굴려 넣지 못하면 주전은 포기해라.”
다른 팀들이 타력 강화에 올인할 때 카디널스는 루키 팀에서나 볼 수 있는 달리기와 지겹도록 되풀이하는 도루 연습 그리고 각종 번트와 장거리 송구 드릴 등의 기본기에 충실했다. 끝도 없는 지긋지긋한 훈련이 이어졌으나 지구 우승 단골에 리그 최강자 타이틀이라는 달콤한 결과에 선수단 모두 감독의 방식에 존경을 표했고 감독은 눈에 흙을 넣지 않아도 되었다.
메이저리그 최고의 승률을 올린 카디널스의 공신은 정상급 선발진과 세대교체를 이룬 화려한 타선뿐만이 아니었다. 물샐틈없는 철벽 수비와 상대 팀 수비의 정신을 쏙 빼놓는 화끈한 주루 플레이가 없었다면 가을 좀비라는 말을 듣지 못했을 것이다.
구정한의 해설처럼 양 팀은 1회 탐색전을 조기에 마치고 2회부터 방망이 대전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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