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K1급 클로저로 만들어 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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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리 코치의 말을 마음에 담아둔 순우는 얼마 후 대니를 뒷마당으로 초대했다.
“그 모든 역경과 좌절을 딛고 일어선 투지와 용기에 감명을 받았습니다.”
순우가 그를 만나고 싶어 한 이유를 설명했는데 뜻밖에 대니의 얼굴에서 수많은 좌절을 겪은 흔적을 찾기가 어려웠다.
“대학 졸업 이후 최근까지 날 힘들게 한 것이 많았다네. 왜 나에게만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화도 났고 우리 가문에 무슨 저주가 흐르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지. 어느 날 오기가 생기더군. 그래서 새벽 바닷가에 서서 목이 터지라 외쳤지. ‘그래, 운명아, 나를 마음껏 짓눌러 봐라. 하지만 야구를 향한 나의 열정 그리고 또 한 가지, 내 얼굴에서 웃음만은 빼앗아 가지 못 할 거다’라고 말이야.”
얘기를 나누던 카페에 노인들이 한둘씩 들어서기 시작했다.
“리틀야구 코치직에 지원한 이유는요?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이 훗날 꿈을 이룬다면 내 꿈을 이룬 것과 같을 것으로 생각했지.”
옆에서 잠잠히 듣고 있던 투수 출신 에디가 입을 열었다.
“ 그런즉, 자네 꿈에는 유효기간이 없다는 말인가?”
“정확히 보셨습니다, 어르신.”
여전히 환한 얼굴로 커피잔을 내려놓고 힌스데일로 돌아가려던 그의 눈앞에 갑자기 하얀 공이 보이더니 에디의 말이 들렸다.
“던져 봐.”
엄마가 갓 구워온 쿠키를 정신없이 먹던 죤은 영문도 모른 채 입맛을 다시며 마스크를 써야 했고 뒷마당 마운드 주위로 오랜만에 노인들을 비롯하여 모든 식구가 둘러섰다. 일반 가정집 뒷마당에 설치된 훌륭한 야구장을 보고 깜짝 놀란 대니는 여섯 노인의 예리한 눈빛을 받고 잠시 몸을 풀더니 하프 피칭을 시작으로 30여 개의 공을 던졌고 죤의 미트에서 경쾌한 소리가 났다.
그가 떠나고 뒷마당 노인들은 다시 모여 머리를 맞대었다.
“이미 서른 살에 구위도 그저 그렇군.”
“무슨 소리! 작년에 들어온 론은 30이 넘었지. 그때 작업복 걸치고 던진 론의 공은 훌륭했나?
“오기 하나로 버티기 힘들지 않을까?”
“그럼, 론은 오기 말고 뭐로 버텼는데?”
“수술한 팔이 부상까지 입었다던데, 몇 개나 던지려나?”
“모르는 소리! 불꽃 같은 공 20개만 던지면 로젠탈급 마무리가 되는 데에 문제없지.”
유난히 에디가 대니를 감싸들았고 대니는 얼마 후 뒷마당 식구로 합류했다. 예상대로 처음부터 그에게 관심을 보였던 에디가 2층의 방을 내어주었다.
“에디 할아버지, 대니의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드셨어요?”
모두가 궁금해 여겼지만, 선뜻 물어보지 못하다가 쿠키로 그의 마음을 녹인 케이트가 용기를 냈다.
“내가 컵스에서 14시즌을 뛰며 197승을 올린 건 알고 있지? 200승을 이루지 못해 속상했지만, 정말로 괴로웠던 것은 그 결과가 아니라 이유였단다.”
말을 마친 에디는 주름살로 덮인 손가락을 내밀었다. 관절염으로 마디가 두꺼워져 보기 흉한 기형 손가락들을.
“이건 말이다. 나이가 들어 생긴 것이 아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다섯 노인은 약속이나 한 듯 고개를 숙이거나 눈을 감았다.
“마지막 시즌 초반 즈음 손가락 마디가 조금씩 아프더라고. 아침에 일어나면 관절이 붓더니 곧 손가락이 제대로 쥐어지지 않더군. 손목도 같이 아파오고. 병마개조차 열기 힘들어 병원에 갔더니 급성 관절염이라고.......”
이미 부어오른 손가락과 손목으로 간신히 기록한 197번째의 승리가 그의 마지막 경기가 되었다. 무릎까지 아프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5년 정도는 너끈하게 더 뛸 힘과 빅리그에서 통하는 뛰어난 기량에도 불구하고 에디는 아무 말 없이 마운드에서 사라졌다, 울분을 삼키면서. 대니가 좌절을 겪으며 어떤 심정이었는지 은퇴하자마자 지팡이를 의지하며 걸어야 했던 에디는 이해하고도 남았다.
어찌 되었든, 이렇게 뒷마당은 진정한 풀 하우스가 되었다.
공식 정문으로 인정받은 크리스 집에는 제이슨 가족이, 그 뒷집 사이먼 집에는 론의 식구가 살고 있다. 그 옆집 아론 내외는 케이트와 죤을 데리고 있고 그 앞집 찰스네에는 순우가, 반대편 테리의 집은 노총각 3총사 프레드, 마크, 레리의 거주지이자 사무실 겸 스튜디오로 사용되고 있었다.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에디의 집에 대니가 입주한 것이다.
한편, 과부 사정 홀아비가 안다고, 좌절을 겪은 것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 누구에게 뒤지지 않던 론이 대니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수시로 그를 찾았다. 대니의 열 마디에 론의 한 마디로 이어진 비대칭 비정상 대화였지만, 둘은 서로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다.
대니는 뒷마당 마운드에서 순우와 더불어 깊은 대화를 나누었고 래리가 그의 피칭을 세밀하게 찍었다. 마크가 며칠 동안 영상을 분석한 결과를 카페에서 공개했다.
“수술 후 당한 부상으로 인해 뼈를 감싼 근육과 주변 인대의 내구성이 약한 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일부 조직이 영구 파손된 것 같습니다.”
“음.......”
누구보다 먼저 에디가 신음을 흘렸다.
“어깨는 타고났는지 제가 본 투수 중 가장 튼튼합니다. 팔과 상체 그리고 하체의 연결도 부드럽고요.”
“빙빙 돌리지 말고 핵심만 얘기해라.”
노인들의 지적에 인내심과 나이는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을 새삼 깨닫고 결론을 토해냈다.
“내구성은 약한 반면 회복 능력은 대단합니다. 굳이 비교한다면 눌린 스펀지 같다고나 할까요. 근육 피로도 수치를 기준한다면 25구 정도의 풀피칭은 무리가 없고 24시간 후 근력의 95%는 회복될 겁니다.”
“알았네. 그 정도면 충분해.”
말을 막은 에디가 울퉁불퉁한 손가락으로 대니의 어깨를 잡고서 뚫어지게 쳐다보며 일을 열었다.
“끝이 없어 보이는 거듭된 좌절의 터널 저 끝에 무엇이 보이더냐? 내가 너를 K1급 클로저로 만들어 주마. 몸을 만들 준비와 각오는 되어 있겠지?”
***** ***** *****
10월 10일 내셔널리그 디비전 시리즈 2차전 경기가 시작되었다.
전날의 역전패로 인해 다소 상기된 표정을 짓고 있는 컵스의 타자들은 오전 연습 때 들었던 감독의 말을 떠올렸다.
"오늘 카디널스 선발은 하이메 가르시아다. 아주 위력적인 투수가 될 뻔했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는 한심한 선수지. 지난 7년간 세 번이나 수술을 받은 유리 몸이라 별 볼 일 없다. 한 가지, 땅볼 유도 능력만큼은 리그 최고다. 싱커성 무브먼트를 가진 포심 패스트볼만 조심하면 된다. 스트라이크존을 적극적으로 공략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니 참고하길. “
옆의 론을 힐끗 쳐다본 감독이 말을 이었다.
“오늘 우리 선발 론은 가르시아와는 차원이 다른 투수다. 수비 실수 없이 초반에 2, 3점만 내면 우리가 이긴다. 승부를 원점으로 돌리고 시카고로 데려가 납작하게 짓눌러주자.”
3연승으로 밀어붙여 일찌감치 시리즈를 끝낼 생각인 카디널스의 매시니 감독의 말은 달랐다.
"오늘도 우린 뛰는 야구로 간다. 3차전에서 끝낼 테니 힘들다고 불평들 말고. 저쪽 선발 론 마이어가 15승을 올렸다고 기죽은 바보는 없겠지. 하와이 촌놈이 약한 상대만 골라서 간신히 이룬 맹물급 15승일 뿐이다. 가르시아가 오늘도 땅볼을 대량으로 생산할 테니 내야진은 바짝 차리고 한 놈도 1루를 밟지 못하게 해라."
전의를 불태우고 있는 가르시아를 잠시 응시하던 감독이 낮은 톤으로 경고에 가까운 지적을 했다.
"어제 홈런 친 애송이는 제법 한 가닥 한다. 신인이라고 깔보지 마라."
K1 & 론 전담포수!
데뷔할 때부터 일반 미트로 너클볼까지 다 잡아내어 자연스럽게 K1 전담포수가 된 죤의 타이틀은 올해부터 그 안에 추가로 론의 이름이 들어가며 조금 길어졌다. 사실, 별로 친해지고 싶지 않은 무뚝뚝한 산적이 배터리 코치의 조언을 받아들여 카스틸로와 호흡을 맞춘 적이 두 번 있었다. 적합한 볼 배합에 포수의 리드 또한 좋았지만 론의 공은 주인의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미트 주위에서 길을 잃고 방황했다.
“야! 포수 봐가며 공 던지나? 차별하는 거야? 왜 갑자기 공이 엉망이냐고?”
자신이 받은 두 번의 경기에서 구위와 제구를 잃고 확실히 패하자 카스틸로는 이성을 잃고 달려들었고 론은 고개만 숙인 채 말이 없었다. 그가 일부러 그러지 않았음을 누가 모를까.
“선배님. 이해해 주십시오. 론이 연습 때부터 줄곧 죤의 리드만 받아와서 그렇습니다.”
순우와 죤이 끼어들어 말도 안 되는 핑계로 간신히 카스틸로를 떼어놓은 이후 론이 등판하는 날이면 괜히 죤까지 긴장되었다
‘물론 이렇게라도 해서 출전 기회가 많아지니 좋긴 하지.’
5선발 로테이션에 따라 순우와 론이 등판하면 당연히 죤이 마스크를 썼고 투수 리드를 잘하는 포수로서뿐만 아니라 타격술이 훌륭한 거포라는 명성을 얻었으며 곰 같은 체구에 비해 엄청 빠른 발로 ‘도루하는 명포수’ 별명도 보너스로 얻게 되면서 마이너리그의 수많은 포수가 꿈꾸는 대상이 되었다.
여전히 자신을 보며 싫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는 죤이 론의 눈에는 그저 사랑스럽고 귀여운 재롱둥이 동생으로 보였다. 아들 마이클이 가장 잘 따르고 앨리스가 질투할 정도로 아내에게 잘해주는 자상한 죤이지만, 마운드에 서면 그의 미트는 유일한 아군이자 그리운 고향이었고 그의 손가락은 시커먼 밤바다를 밝혀주는 반가운 등대가 되었다.
마스크 뒤에 가려진 표정은 보이지 않았어도 타자의 약점을 정확히 집어내어 가장 적합한 공을 주문하는 그의 볼 배합에 단 한 번도 고개를 저어 본 적이 없었다. 포수석의 죤을 보면 특별한 이유 없이 마음이 편했던 것이다.
부시 구장의 5만 명 가까운 관중이 자신을 쏘아보고 있어도 그 편안함은 사라지지 않았고 드디어 그리운 고향을 향해 제1구를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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