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훙냐 님의 서재입니다.

돛대 없는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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훙냐
작품등록일 :
2022.05.27 23:51
최근연재일 :
2022.12.05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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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6,4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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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23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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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해후의 때

DUMMY

기르불은 몸을 손 모양으로 만들어 흔들었다. 그는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살아있었어! 살아있었어! 씨발 믿고 있었다고!”

<한 번만 말해도 알아듣거든?>

“대체 욕설은 언제 배우신 겁니까?”


환희와 안도감에 몸을 마구 나풀거리는 기르불 아래에서 지원이 몸을 축 늘어뜨린 채 중얼거렸다. 그녀는 기르불이 인간의 욕설을 내뱉는 것을 처음 들어보았다.


외국어의 숙련도는 욕설을 얼마나 자연스럽게 구사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고 한다. 지원은 기르불이 지상 유학에서 아무 소득 없이 돌아가지는 않겠다고 판단했다. 인간 언어 하나를 완벽하게 습득했으니까.


“저것 봐! 유찬호야! 세상에 팔다리 다 멀쩡하잖아?!”

“저희 시력으로는 못 보는 거리입니다. 아람 씨, 제 등 좀 봐주시겠습니까?”


창틀에 걸쳐진채 비아스의 시체의 무게로 고정되어 있던 지원을 끌어내린 건 아람 나토샤온이었다.

지원이 혼자서 움직였다가는 떨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고, 기르불은 운동력을 가할 수 없었으며 루니는 거실에서 인질들을 감시하고 제압하는데 열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람 밖에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람은 몇 시간 전까진 자신을 겁박하고 있던 인질들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그녀가 거실로 나와 지원을 도와주기로 결심하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다. 그 결과 지원의 등에는 창틀 모양으로 눌린 꽤 깊은 상처가 남게 되었다.


“죄, 죄송해요.”

“출혈이 많습니까?”

“모르겠어요, 출혈이 어느 정도인지, 죄송해요, 죄송해요.”


머리 위에서는 흥분한 지사리가 다 태워먹을 것처럼 난동을 부리고 있고, 눈앞에는 별로 도움 안 되는 부잣집 아가씨가 반쯤 패닉에 빠져있고, 등뒤로는 상처가 맹렬하게 고통을 쏘아보내며 움직일 때마다 전신에 짜릿한 존재감을 과시했다.


지원은 이 상황에 뭘 해야할까를 생각했다. 뭐, 고민할 것도 없었다.


<누가 올라오는데?>

“만칼리군이 오는군요. 아마 정찰겸 보급병일 겁니다. 그냥 보내십시오. 어차피 이제 여기서 나갈 겁니다.”


###


찬호는 기르불과 미지의 수화로 안부를 나누었다.


뜻은 조금도 통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팔다리가 멀쩡하다는 것만 확인시켜주면 됐다.


감동의 수화 이후, 기르불은 허공에 ‘타카슬’이라는 글자를 만들었다. 찬호는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다. 타카슬이 있는 곳에서 모이자는 뜻일 것이다. 터리놀에서 ‘타카슬’이 무슨 뜻인지 아는 건 공작대와 누리 나토샤온 정도밖에 없으니 암호로서 현명한 선택이었다.


찬호는 터리놀 앞바다로 향해 미리 타카슬을 불러내둬야겠다고 생각했다. 서둘러 지원과 기르불과 다시 만나고 싶었다. 그는 지하실에 숨겨둔 츠카와 미령을 데리러 계단을 내려갔다.


###


한편, 터리놀 전역에 산산히 흩어져 구역을 점령하고 있던 저격수들은, 나실 호텔 최상층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단과 기르불의 요란한 수화들을 전부 지켜보고 있었다.


나실 호텔 VIP룸에서 저격과 난사로 터리놀군을 와해시키고 만칼리군을 지원하고 있었는데 그런 지원이 끊어져버렸다. 만칼리군은 식은땀을 흘리며 나실 호텔 최상층을 겨누었다.


하지만 곧 허망하게 총구를 내릴 수밖에 없어졌다.


기르불이 허공에 ‘타카슬’이라는 글자를 그린 직후, 나실 호텔 최상층 전반에서 요란한 폭발이 일어났다. 진홍색 불길이 연기처럼 뿜어져나와 온 사방을 가렸다.


일반적인 폭탄은 저런 화력이 나타나지 않는다. 작은 폭탄 안에 화약을 잔뜩 욱여넣어 강한 열과 압력을 만들어내는 것보다, 약간의 화약만으로 파편을 흩뿌리는게 살상력도 높고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화재같지도 않았다. 불길은 위를 향하는데, 나실 호텔 최상층을 덮은 불은 오븐에서 한창 부푸는 빵처럼 둥글고 질감이 있었다.


나이가 있는 터리놀 시민들은 그게 지사리의 소행이라는 걸 알아보았다. 과거 소방 전쟁에서나 볼 수 있던 악몽같은 불의 형상이었다.

허나 주브만칼리에서는 소방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만칼리군은 지사리가 어떤 불의 형상을 만들어내는지 몰랐고, 사태 파악을 빠르게 하지 못했다.


불과 연기에 모든 저격수의 시선이 팔려있는 동안, 기르불은 몸을 한껏 부풀리고 자신의 몸 안에 작고 위아래로 긴 공간을 만들었다.


지원은 그 공간 안으로 아람 나토샤온을 집어던졌다. 아람은 정말로 마지못해했다. 하지만 어차피 아람을 운반해주는건 전적으로 루니의 몫이었으므로 아람의 의중은 사소했다.


루니의 염력에도 한계가 있었다. 그는 두 인간의 몸무게를 모두 감당하는게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가 아람을 지상까지 내려주는 동안 지원은 최상층에서 기다렸다.


그동안 인질들이 허튼 짓할 수 없도록 감시할 사람은 지원밖에 없었다.


진홍빛의 기르불이 최상층의 겉부분을 감싸고 있었기에 VIP룸은 정육점마냥 새빨갛었다.


인질들은 거실에 모여 있었다. 이제 굳이 묶어둘 필요가 없었으므로 지원은 그들 중 한 명을 풀어준 뒤 서로의 속박을 풀어주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지원은 그 앞에서 총을 들고 의자에 앉은 채 조용히 인질들을 보고 있었다.


“너희들이 만칼리군에 합류하면, 다시 우리쪽 사람들을 죽이겠지.”


지원이 조용하게 말했다. 그녀는 그 자리의 모든 인간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었기에, 인질들은 자기보다 한참은 어린 18살짜리 여자아이의 말에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내가 너희를 살려두는게 옳은 결정일까?”


지원은 눈을 까닥 들어서 인질들을 쳐다보았다. 서로의 속박을 풀어주던 그들의 손이 멈추었다. 인질, 아니, 만칼리군의 눈길은 온통 지원이 손에 들고 있는 권총에 향했다.


아무도 감히 말대꾸를 하지 못했다. 지원은 혼잣말처럼 진홍빛 공기에 말을 흘려냈다.


“이 높은 곳에서 아래를 향해 총알을 흩뿌릴 때 무슨 생각을 했지? 무슨 생각을 했든······, 저항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죽이면서 ‘생각’이란 걸 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살아있을 가치가 있을까? 대답하지 마, 질문하는 거 아니야.”


만칼리군 중 한 명이 용기를 내서 입을 벌리자마자 지원이 그를 닥치게 했다.


지원은 총을 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지금이라면 그녀를 공격해 총을 뺏을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러면 지사리가 그들 모두를 집어삼킬게 뻔했다. 그들의 손에는 조그마한 플라스틱 조각조차 없었다.


지원은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자신의 총을 땅바닥에 던졌다.


“난 아저씨처럼은 할 수 없어. 기르불이나 찬호도, 타카슬도, 사장님과 선생님도······. 그분들이라면 너희를 죽였겠지. 난 그렇게 용감하지 못해. 그러니 부탁 하나 하자. 만칼리에서 탈영하고 터리놀에 투항해라. 이건 명령이 아니다.”

“명령이 아니라고요? 왜죠?”

“명령해봤자 의미없으니까. 난 이 도시를 떠날거야. 너희가 이곳에서 뭘 하든 내가 너희를 제지할 수단은 이제 없겠지. 그러니 ‘부탁’하는거다.”


지원은 미령의 오빠인 백하령을 구할 수도 없게 되었고 만칼리군이 터리놀 시민을 학살하는 걸 막을 수도 없게 되었다.


그녀에게 우선순위는 찬호, 타카슬, 츠카, 그리고 찬호의 보따리를 서로만으로 데려가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터리놀 시민들의 죽음을 외면한다.


그런데 그건 만칼리군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카추샤의 명령과 네흘류의 의지를 우선시했고 그 덕분에 같은 인간인 터리놀 시민들의 비명소리를 무시해왔다. 그렇다면 지금의 지원이 만칼리군과 무엇이 다를까?


지원은 철학자가 아니었고, 숙고하기 위한 시간도 충분히 주어지지 않았다. 미령을 지상까지 내려다준 루니가 다시 올라와 그녀를 재촉했다.


<지원아, 가자.>

“네, 아저씨. 그전에 혹시 이 층에 남은 무기가 있는지 점검 좀 다시 한 번 해주실래요?”

<그럼 한 번 돌아보고 올 테니까 오면 바로 뛰어내릴 수 있게 준비하고 있어.>


터리놀을 떠나기 전, 최상층에 있는 만칼리군의 모든 무기를 파괴하는게 지원이 터리놀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최선이었다.


지원은 윗옷을 벗었다. 등의 상처에 자꾸만 옷자락이 쓸려 통증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호텔에서 선물해준 순면 브레이지어만이 그녀의 가슴을 가렸다.


왼쪽 어깨에는 평화와 찬호의 리볼버와 명죽 피리가 든 자신의 배낭을 매고, 오른쪽 어개에는 이미 고철이 된 지 오래인 찬호의 보따리를 걸쳤다.

지원은 비아스의 시체가 널브러진 창문으로 향했다.


“만칼리로 돌아가면, 너희는 패잔병이다. 하지만 터리놀에 투항하면 쓸만한 정보를 많이 알고 있으니 전향자로 귀하게 대접받을 수 있을거야. 그리고 모든게 끝나면, 터리놀군에게 귀의해서 터리놀의 규칙으로 심판받도록 해. 이건 말했듯이 명령이 아니야.”


기르불은 지사리보다 열등한 시각을 가진 인간의 입장을 별로 배려하지 못했다. 나실 호텔 최상층을 물들인 그의 선명한 진홍빛은 지원과 만칼리군으로 하여금 서로의 윤곽선만을 겨우 알아볼 수 있게 했다.

인간은 눈동자의 움직임으로 서로의 감정을 읽는다.

지원은 군인들의 눈빛을 읽지 못했다. 그녀는 군인들이 자신의 말에 감명을 받고 자신들을 살려준 것에 고마워하는지, 아니면 자신의 말을 흘려듣고 속으로 동료들을 죽인 공작대에게 분노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루니가 돌아왔다.

지원은 모든 준비를 마친 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잔소리를 할 필요가 없었다. 루니는 지원과 함께 자기 자신을 창문 밖으로 떨어뜨렸다.


지원이 루니와 함께 떨어지자 기르불은 최상층을 감싸는 것을 그만두었다. 기르불은 곧바로 루니와 지원의 곁으로 돌아와, 그들을 감쌌다.


최상층 내부에서 진홍빛이 한순간에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어안이 벙벙한 군인들의 눈에 세상은 온통 새벽의 파란색 뿐이었다.


지원은 기르불 속에서, 루니의 보조를 받아 편안하게 몸을 둥글렸다. 아래쪽에서는 아람 나토샤온이 수풀 속에 웅크린채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공작대가 다시 모일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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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저격 22.09.10 31 1 11쪽
60 개전 연설 22.09.06 35 1 10쪽
59 생명줄 22.09.04 33 1 10쪽
58 단둘이 22.09.02 28 1 9쪽
57 나실 호텔의 최상층 22.08.30 20 1 9쪽
56 대장과의 합류 22.08.27 24 1 10쪽
55 분산되는 일행 22.08.23 32 1 11쪽
54 함필규 22.08.21 15 1 10쪽
53 첫 살인 22.08.16 18 1 9쪽
52 너겨 엿비 22.08.14 15 1 9쪽
51 지사리의 보증 22.08.12 15 1 10쪽
50 단군 하비나 +2 22.08.10 30 1 10쪽
49 불안 22.08.06 19 2 11쪽
48 인질들 22.08.05 18 1 9쪽
47 몰살 22.08.03 19 1 12쪽
46 기다림 22.07.31 20 1 10쪽
45 블러핑 22.07.28 22 1 9쪽
44 만칼리의 추억 22.07.26 24 1 11쪽
43 스위트룸 22.07.23 23 1 9쪽
42 모함 +2 22.07.21 30 1 11쪽
41 감금 +1 22.07.09 40 2 13쪽
40 진술 +2 22.07.06 40 2 9쪽
39 터리놀, 유흥과 죄악의 도시 22.07.04 27 2 9쪽
38 패륜 +2 22.07.03 30 2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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