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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죄의 비망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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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otoxin
작품등록일 :
2015.04.05 21:01
최근연재일 :
2015.05.09 21:33
연재수 :
22 회
조회수 :
5,355
추천수 :
60
글자수 :
99,831

작성
15.04.05 21:03
조회
342
추천
4
글자
8쪽

기억

.




DUMMY

1. 일상


오늘도 새로운 방에서 눈을 떴다. 곰팡이로 얼룩진 천장이 몽환적인 그림을 그리며 나의 판단력을 흐리고 있다. 정신이 들고 나서 몇 분 동안 멍하게 있다가 겨우 기억해냈다. 나는 살인자다.


이 빌어먹을 도피생활을 시작한 지 어느덧 3일이 지났다. 내 옆에 누워있는 여자는 아직도 속 편하게 자고 있다. 아무런 걱정도 없는 것처럼 평화롭게 자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보니, 이 작은 안식을 깨우는 것조차 심각한 죄책감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슬슬 깨우지 않으면 체크아웃 시간에 맞출 수 없을 것 같다.


“수진아, 이제 일어나.”


그녀는 조그맣게 속삭인 내 목소리에도 새끼강아지처럼 화들짝 놀라며 잠에서 깬다. 그녀 역시도 어제와 다른 천장에 당황하는 듯 보였으나 나의 얼굴을 찾아내고는 이내 안도에 찬 미소를 보낸다. 그리고 어떤 말도 없다. 단지 미소만 지을 뿐. 그녀는 마치 엄마와 함께 있는 아이처럼, 그렇게 아무런 걱정도 없다는 편안한 웃음을 지으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다.


내가 살인자라는걸 알면서도, 그녀는 날 보고 웃는다. 아니, 정말로 내가 사람을 죽였다는 걸 알고 있는 것일까? 겉보기에는 성인이지만 고작해야 5살 정도의 정신연령을 갖고 있는 그녀가 과연 내가 저지른 일의 무게를 느낄 수 있을까? 그녀는 여전히 웃고 있다. 내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면 몇 시간이고 이렇게 가만히 앉아서 웃고만 있을 것이다. 복잡한 생각은 나중에 하기로 하자. 우선은 이 곳을 떠나는 게 먼저다.


그녀의 손을 잡고 화장실로 데려가 샤워를 시킨다. 혼자서는 옷도 제대로 벗을 줄 모르는 그녀이기에 하나부터 열까지 내가 해주어야 한다. 처음엔 그녀의 알몸을 보는 것 조차 부담스러웠지만 지금은 그저 숙련된 기계공이 반복되는 작업을 하듯 아무런 감흥이 없다.


“지호 눈 예쁘다.”


샤워기의 물을 틀어 온도를 조절하던 도중 그녀가 말했다. 거울을 통해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가 보인다. 언제나 똑같은 미소지만 볼 때마다 가슴 한 켠이 욱신거린다. 그녀의 미소는 내가 사람을 찌르던 그 감각을 떠올리게 한다. 살인현장을 목격하면서도 잃지 않았던 미소이기에. 시선을 돌리고 그녀를 씻기기 시작한다. 그녀의 눈을 감게 하기 위해 일부러 머리부터 감긴다. 난 그녀의 미소가 싫다.


열쇠를 카운터에 던져놓고 도망치듯이 모텔을 빠져 나온다. 아니, 실제로 도망치는 것이 맞다. 언제 어디서 경찰이 나의 뒷덜미를 낚아챌 지 모른다. 나는 도망자다. 사람을 죽이고 달아나는 도망자. 지금쯤 경찰이 나를 뒤쫓고 있을 것이다. 추격을 피하기 위해 갖고 있던 모든 돈은 현금으로 바꾸어 가방에 넣어놨다. 길 모퉁이를 돌자마자 남은 돈의 액수를 확인한다. 이 정도라면 아직 한 달은 버틸 수 있을 것 같다.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수진이를 재촉하여 걷는다. 어디로 가야 할 지 아직 정하지 못했다. 최대한 인적이 드문 길을 골라 무작정 걷는다. 이렇게 또 일상이 시작되었다.


2. 살인


나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적어도 3일 전까지는 그랬다. 그 빌어먹을 지하실에 가지만 않았어도 지금쯤 복학을 하여 대학생활을 만끽하고 있었을 것이다. 기껏해야 과제나 발표 따위를 걱정하면서 말이다.


그 날은 내 오래된 친구와 술 한잔을 하고서 집에 가는 길이었다. 늦은 새벽이라 지나가는 행인은커녕 아파트 단지를 순찰하는 경비원마저 자고 있을 시간이었다. 집 앞에서 담배를 태우며 핸드폰 메시지를 확인하던 도중 아파트 지하실에서 말소리를 들었을 때까지만 해도 그저 얼른 집에 올라가 샤워를 하고 따뜻한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언뜻 들리는 대화의 내용에 모든 것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러게 왜 괜한 짓을 했나? 조용히 살았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을. 모두 자네가 자초한 일이야.”


얼어붙는 듯한 차가운 목소리를 들었을 때, 내가 그 지하실에 내려갔던 것은 혈액 속에 녹아있는 알코올의 패기 때문이었을까? 내 자신이 딱히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런 수상한 냄새가 나는 대화를 지나칠 정도로 무신경하지도 않다.


잠깐의 고민 끝에 나는 그 지하실에 내려가보기로 결정했다. 조금이라도 수상한 낌새가 보이면 바로 경찰에 신고하자. 별 일 아닐 거야. 그렇게 스스로를 진정시키며 계단을 천천히 내려갔다. 금방이라도 꺼질 듯한 불안한 백열 전구 아래에서 내가 본 것은 피로 범벅 된 시체와 웃고 있는 여자, 그리고 검은 양복을 입은 채 한 손에 칼을 들고 있는 거구의 남자였다.


사람 시체를 본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러나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살인 사건의 현장이었고 나는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 도망칠 수도, 입을 열 수도 없었다. 그 순간 여자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고 시선을 눈치 챈 남자 또한 나와 눈이 마주쳤다.


“음, 이거 참……”


남자는 무심한 표정으로 내 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칼날에 반사된 불빛이 나의 눈을 찔렀을 때가 돼서야 나는 정신을 차렸다.


‘도망쳐야 해. ‘


남자는 이런 내 생각을 눈치 챘는지 내게로 뛰어들었다. 뒷걸음질 치던 도중 계단에 발이 걸려 넘어진 것은 그 남자도, 나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뭐가 어떻게 됐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는 내 위에 무너지듯 쓰러졌고 그의 가슴에는 칼이 깊숙이 박혀있었다는 사실이다. 칼은 내 손에 있었다. 어떻게든 칼을 뺏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까지는 기억이 난다. 지독히 어두운 지하실에서 풍기는 피비린내는 오히려 나의 현실감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두 구의 시체와 미소를 잃지 않는 묘령의 여인. 마치 이 곳만 시간이 멈춘듯했다.


“상처가 있었어요.”


그녀는 나를 보며 웃는 얼굴로 말했고, 현재의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녀의 달콤한 목소리는 나를 깨워주었다.


“아 그래요. 어디 다치신 데는 없나요?”


“상처가 있었어요 아주 깊은 상처가. 많이 아파 보여요.”


“네, 그야 칼에 찔렸으니…… 그보다 저 사람들이랑은 어떤 관계죠?”


“상처가 있었어요 아파 보이는 상처가. 그래서 무서워 보였어요. “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나서야 이 여자의 상태가 짐작이 됐다. 아마 충격적인 모습을 보고 넋이 나간 것이리라. 이대로는 안 된다. 어서 경찰에 신고해야 한다. 상황을 설명하면 정당방위로 인정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 상황을 다 지켜본 증인이 있으니까.


“일단 경찰에 신고를 하죠. 혹시 형사들이 오면 제가 정당방위였다는 것을 설명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상처가 무서워요. 날카로운 칼에 찔린 상처 같았어요.”


“이봐요, 당신이 증언을 해줘야 제가 처벌을 안 받는다고요. 정신 좀 차려요 제발!”


“상처가 무서웠어요…… 나도 그런 상처 생기면 어떡해?”


도저히 말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만약 이대로 신고해버리면 나의 무죄를 입증할 가능성이 너무 낮다. 만약 정신이 돌아온다 해도 그녀가 본 것을 기억할 지 의문이다. 이 지하실에는 CCTV도 없다. 2명을 죽인 살인마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도망가야 한다.


“이봐요, 이름이 뭐에요?”


“이수진이요.”


“좋아요 수진씨. 이대로라면 우리가 살인죄를 뒤집어쓰게 될 지도 몰라요.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우리 도망쳐야 된다고요.”


“도망가요?”


“네, 멀리 가야죠. 추적을 피하려면.”


“멀리? 히힛 여행 간다!”


지하실 시멘트의 냉기도 녹여버릴 것만 같은 뜨거운 유혈을 뒤로 한 채, 우리는 그렇게 도피를 시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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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발악 +2 15.05.09 260 2 11쪽
21 휴식 15.05.05 211 3 7쪽
20 지옥 15.05.03 152 4 13쪽
19 거래 15.05.02 149 3 16쪽
18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15.05.01 151 2 7쪽
17 갈등 15.04.29 131 4 9쪽
16 결투 15.04.28 170 1 10쪽
15 해결책 15.04.27 134 2 8쪽
14 이판사판 15.04.26 254 2 8쪽
13 시체 +4 15.04.22 215 3 8쪽
12 트라우마 15.04.18 188 2 8쪽
11 진실 15.04.17 206 3 8쪽
10 재회 15.04.16 283 2 9쪽
9 계략 15.04.15 229 2 8쪽
8 다시 전장으로 15.04.12 273 2 11쪽
7 만남 +1 15.04.11 334 1 13쪽
6 협박 15.04.10 282 2 16쪽
5 검은 양복 +2 15.04.09 519 7 9쪽
4 그림자 +1 15.04.08 267 3 11쪽
3 추적 15.04.07 292 3 12쪽
2 자백 +1 15.04.06 311 3 12쪽
» 기억 15.04.05 343 4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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