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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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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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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6,707

작성
20.06.13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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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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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글자
9쪽

1화

DUMMY

“정말 여길 통과할 수 있다고?”

“못 믿겠으면 내가 먼저 갈까요?”


지금 이 남자에게서 당장 거울을 빼앗아 내던지고 싶다. 나, 백나나. 용기와 욕심이 정직하게 일치하는 인간이 아니던가?

그 일치도가 어느 정도냐면, 어제는 매번 남자친구가 있냐고 묻는 꼴불견 팀장의 서랍에 몰래 죽은 쥐를 넣어두기도 했다. 전날에 동네 고양이 한 마리가 밥을 주러 나온 내게 준 선물이었는데, 한편으로 완벽한 기회였다.

주로 그런 장르의 용기를 발휘해서 그런지 '또라이'라는 세 글자로 주로 불리기는 하지만. 그런데 오늘은 도저히 그럴 수 없다. 그래야 한다는 욕심은 버젓이 있지만, 그럴 용기가 생기지 않는다. 그것이 더더욱 거울이라면.


수상한 이 남자를 만나기 전이다.


동창의 결혼식에 가는 택시 안에서 무의식적으로 잠들어버렸는데, 그 찰나에 아주 이상한 꿈을 꾸고 만 것이다. 사면은 물론, 천장과 바닥까지 온통 거울로만 된 방의 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성모마리아상. 그때까지만 해도 꿈속에서의 나는, ‘착하게 살 테니 지금 당장 내 소원을 들어주세요.’ 식의 거만한 자세로 신을 모독해온 내게 이 꿈은 이제부터는 착하게 살기 위해 종교를 가지라는 신의 뜻인 줄 알았다.

고작 이런 꿈 한 번 꿨다고 종교를 고려할 만큼 마음이 나약한 건 아니다. 평생을 무교로 살아온 내가 갑자기, 그것도 꿈에서 성모마리아를 마주하게 되니 그저 황당하고 어이가 없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먼저 눈살을 찌푸렸고 다음엔 “나가는 문은 어디에 있죠?”라고 물을 참이었다. 그 정도 친절은 베풀어주는 것이 종교의 역할이 아니던가? 서운하게도, 내가 말을 걸기 전에 성모마리아상이 나의 눈길을 먼저 끌었다.


성모마리아의 이마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돌이 갈라지는 소리가 비현실적으로 뒤울렸고 그 소리에 간담이 내려앉을 정도로 놀란 나는 자신도 눈치채지 못할 뒷걸음을 치고 말았다. 그리고 그렇게 도망가는 내 발을 묶어둔 것은 피였다. 피. 이마부터 시작해서 천천히 갈라지는 그녀의 얼굴 사이로 아주 검붉으면서도 아주 선명한 피가 흘러내렸다. 아주 천천히, 아주 흥건히.


순식간에 공포물이 된 꿈에 으아, 비명에 가까운 탄식을 뱉었고 나는 두려우면서도,


“살려주세요.”


내 목숨을 구할 방법을 과감하게 생각해내고 있었다. 백나나, 이런 순간에도 역시 용기와 욕심이 정직하게 일치하는 인간이라는 점에 스스로에게 조금 감탄했다. 생각을 좀 더 해보니 이건 나의 꿈이 아니었던가? 꿈이 얼마나 거창하든, 그건 현실이 아니라는 점이 이토록 다행인 악몽은 이번이 처음이기도 했다.

대답도 없이 그저 붉게 변한 얼굴이 무너지는 성모마리아를 앞에 두고, 이번에는 그녀에게 어떤 말도 걸지 않고 꿈에서 깨어날 궁리를 하게 되었다.


‘깨어나. 깨어나렴.

나나야. 일어나.

이건 꿈이야.

안 일어나? 일어나.

그냥 꿈이라니까? 야!’


오른쪽 벽면을 차지한 거울을 보며 끊임없이 나는 나에게 말을 걸었다. 별 효과가 없는 것 같단 생각이 들 때는, 속으로 외쳐야 하는 건가? 의문이 들어 서둘러 눈을 부릅떴다. 굳은 다짐에, 주먹을 꽉 쥐고 좀 전에 뱉은 말을 속으로 외우자 앞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요.”

“······나요.”


그 말소리의 주인은 성모마리아였다. 그에 나는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어느새 그녀의 뒤에 있는 거울벽까지 무너지기 시작했다. 유리 파편들이 부딪혀 맑은 소음을 만들어냈고 그 사이로 그녀는 이번에는 더 큰 입 모양을 만들어 다시 말했다. 왠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의미심장하게 웃고 있었다.


“일어나요!”


***


힘주어 눈을 뜨니, 그 말소리의 진짜 주인은 택시 기사였다. 식겁하여 눈을 뜨니 되레 자신이 더 겁을 먹은 듯, 기사님은 잠깐 졸기를 그렇게 깊게 자냐며 가볍게 타일렀다. 그리고 목적지에 도착했으니 내리라는 이야기를 했다.

별안간 식은땀까지 흘려 맥이 빠진 나는 기사님이 신용카드를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가져가고 다시 돌려줄 동안에도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하고 차에서 내렸다. 재수 없는 인간을 만나려고 그러나? 몇몇 인간이 떠오르긴 한다. 단지 느낌이지만, 이만큼 불길한 흉몽도 없는 것 같다.


‘그냥 가지 말까?’


승강기 앞에 서자 나는 도망치고 싶어졌다. 문 앞으로 흐트러지고 사나워진 내 모습이 비쳤다. 요즘 승강기는 거의 다 거울이 설치되어 있던데. 여기를 봐도 저기를 봐도 다 거울이면 어떡하지. 공포심을 조성하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냥 걸어갈까? 몇 층이었지? 17층? 미쳤어 진짜. 이제 곧 식 시작할 텐데.’


살면서 그런 미스터리한 꿈은 정말 처음이었는지라 일생 처음 겪어보는 공포에 나는 정신적으로 상당히 허약해진 상태다.

내적 갈등에 결론은 안 보이고 조바심만 나자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렇게 몇 번을 더 고갯짓하고 나니, 사람들이 승강기를 기다리기 위해 주위로 몰려들었다.


이대로라면 괜찮을지 모른다. 어쨌든 많은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이고, 이 중 몇 사람은 17층보다 더 높은 곳에 내릴 테고, 그리고 또 몇 사람은 나와 함께 17층에서 내릴 확률이 높다.


나는 용기를 내어 안심했고 다시 침착해졌다.


승강기 안은 뒷면에만 거울이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일행으로 보이는 세 사람의 무리가 작게 이야기를 나누며 거울을 가로막았다. 살면서 타인에게 흡족해 보는 몇 안 되는 경험 중 하나다. 17층에 도착하기 전까지 네다섯 사람이 두 번에 걸쳐 내렸고, 14층에 이르자 거울을 막고 있던 무리가 내렸다. 다시 불안해졌다. 그래도 다행히 곧 17층에 도착하며 승강기 안에 나 혼자만 있는 게 아니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바로 내리기 위해 문 가까이에 붙어 있는 나의 위치에서 대각선 방향으로, 내 또래로 보이는 한 젊은 남자가 서 있었다. 정장을 입은 모습으로 보아하니, 어쩌면 저 사람도 하객으로 왔는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무렴. 제발 무사히 17층에나 도착했으면.’


서두르는 마음에 나는 천장 바로 아래 달린 LED 화면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15라는 숫자가 표시되어있었다. 눈을 한 번 깜빡이고 나니 15는 16으로 바뀌었다.


“후-.”


짧게 내쉬는 한숨. 안도의 의미였다. 개꿈이었길, 개꿈이었길, 개꿈었길. 간절한 소원을 빠르게 되뇌고 다시 위를 쳐다봤다. 16. 곧 바뀌겠지.


그렇지만 조바심은 숨길 수 없는지 눈은 바닥을 한 번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구두를 신고 나왔었지. 그야 결혼식에 가는 거니까. 다시 위를 쳐다보았다.


16.


버튼을 누른 층에 도착하였다는 짧은 알림음조차 들리지 않는다. 불길함은 불안감이 되었다. 나는 괜히 뒤를 돌아 내 뒤에 있던 남자를 한 번 쳐다보았다. 분명히 저 사람도 이상하다고 느꼈겠지?


그렇게 뒤돌아보니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렇다. 나만 이상하다고 생각한 게 아닌가 보다. 타인의 존재만으로도 조금 안심이 된다니, 더불어 사는 삶을 이런 식으로도 실천하게 되네.


이런 엉뚱한 잡생각을 하며 머리를 굴리니 비상호출 버튼이 눈에 들어왔다. 체감상으로는 2분은 지난 것 같은데. 혹시 몰라 다시 화면을 보았지만, 숫자는 여전히 16에 멈추어 있다. 결국 나는 비상호출 버튼을 누르려 손을 뻗었다.


“오랜만이에요.”


뒤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던 남자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태연하게 말을 건다. 덤으로, 비상호출 버튼을 누르려는 날 저지하려는 듯이 내 손목을 잡으면서.


정신 나간 놈인가? 그럼 더 위험한데.


슬며시 버튼을 몰래 누르려고 하니, 내 손목을 놓은 남자는 아예 자신의 손으로 버튼을 가렸다. 헉. 범죄자인가? 역시 그 꿈은 지금의 일을 내다본 예지몽이었던 건가? 금방 전에 구두를 신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기에, 나는 슬그머니 왼쪽 구두를 벗었다.


여차하면 머리를 찍어버려야지.


그러자 남자는 머쓱하게 웃으며 남은 손으로 뒷머리를 매만졌다. 이거 안 되겠네. 머리가 아니라 눈을 찍어버려야겠어. 내가 구두를 손에 들고 경계태세를 취하니 남자는 순수한 의미인지 저의가 담긴 건지 모를, 항복의 뜻으로 두 손을 들었다. 그러곤 상황에 맞지 않은 서글한 미소를 짓더니 말한다.


“아, 미안해요, 규칙이라서.”

“뭐요?”

“백나나 씨 맞죠? 반가워요. 미안한데, 나랑 지금 이 세계를 떠날래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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