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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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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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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06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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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307화

DUMMY

벤치에 앉아 해를 바라보는 것도 이제 지겨워졌다. 해는 나의 것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가장 어두운 곳으로 숨어버리는 게 제격 아니겠는가.


“그때 말이야. 네가 우리를 바다에 빠뜨렸을 때······ 당연히 기억하겠지? 모른다고는 하면 안 돼. 그러면 무지하게 서운할 것 같거든.”


그래서 과거를 회상하며 태강은 남자의 팔꿈치를 자신의 것으로 건드렸다. 정답게 투닥거리는 것으로 보이기는 해도 남자는 무관심할 뿐이었다.


“그래, 기억하지.”

“그건 너의 짓이었어?”

“내가 아니라 네가 기억을 못 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럼 내가 아니라 누가 했다는 거야? 그땐 내생이고 뭐고 없고, 나 혼자였을 때야.”

“아니지. 내 말은 정말 네가 그렇게 홧김에 했냐는 말이야.”

“여전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네.”


그대로 태강의 팔을 가격한 남자가 가여운 태강이 앓는 소리를 무참히 뒤로한 채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는 해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하늘이 저물기를 바라는 것인지, 아니면 낮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것인지 알 길은 없었다. 그는 그저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있는 상태였으니.


“그런데 왜 하필 황호인 거야?”


당한 것이 있으니 있는 대로 성질을 부리며 태강이 남자의 귀에 대고 소리쳤다.


“뭐가?”


그렇게 큰 소리를 들었음에도 남자는 태연하게 대처하였으리니, 태강의 분한 감정은 가라앉을 줄을 몰랐다.


“네가 그렇게 서러워서 난리를 칠 거라면, 황호가 아니라 녹수여야 되는 거 아닌가 싶어서. 인간에게 슬픔보다 무서운 게 분노 아닌가?”


화를 풀 곳이 마땅치 않으므로 태강은 얼굴에 온통 잔주름을 그려가며 성난 감정을 드러냈다.


“분노는 살아 있음의 증거야.”

“그럼 슬픔은? 슬픔은 죽어가고 있음의 증거인가?”

“생각하기 나름이지.”

“그럼 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거야?”


남자는 한결같이 귀찮은 존재를 떨쳐내기 위해서라도 대답에 결실을 맺어야만 했다. 그래도 심심한 것보다야 귀찮은 것이 더 나을 거라며, 그는 태강을 대하는 태도를 진심을 다해 바꾼 다음에 입을 열었다.


“사람은 오래 화를 낼 수 없어. 네가 그렇게 듣기 싫어하는 초영의 잔소리가 그 순간엔 긴 것 같아도, 지나고 보면 옛날의 일인 것처럼 멀게 느껴지듯이 분노는 슬픔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슬픔이 고인 물이라면, 분노는 흐르는 물이거든. 눈물을 짜내는 건 둘 다 똑같아도, 분노는 그 눈물이 흘러버리도록 두는 반면에 슬픔은 눈물을 계속해서 간직하려고 하지.”

“뭐 때문에 간직한다는 거야?”

“······그건 나도 모르겠네. 궁금하면 황호에게 직접 물어 봐.”


태강은 남자의 충고에 따라 시선을 바깥으로 돌렸다. 꾸지람을 들은 것처럼 약간 시무룩해 보이기는 했으나, 결과적으로 쓴 약을 삼키고 몸이 좋아지는 이치와 같이 그는 남자의 이야기로부터 어떤 도움을 얻은 듯했다.


“그렇게 놓고 보면 이제야 이해가 되네.”


태강이 사람을 맞이하듯이 바람을 맞으며 웅얼거렸다.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네.”

“내가 뭘 이해했는 줄 알고 다행이라고 하는 거야?”

“글쎄. 그래도 뭐든 이해하게 되는 건 좋은 거야.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내가 아닌 것들을 이해할 필요가 있어. 내가 더는 나 자신으로서 남을 수 없게 될 때, 그때의 나를 자신의 그림자 속에 숨겨줄 존재가 있으면 어쨌든 좋거든.”


갑작스러운 설교에 태강은 귀가 따가워져 더는 집중하지 않으려고 했으나, 남자가 곧 말을 마치는 바람에 어색하게 넘겨듣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내가 말한 건 녹수의 이름이었어. 그 애의 이름을 지금에 와서야 이해하게 되었다고. 정말 신기하다니까.”


공중에 대고 태강은 녹수의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움직이는 팔은 종이 위에 어떤 얼룩도 남기지 않겠다는 의지처럼 빠르고 정확했다. 완성된 이름은 녹수(熝水)였으나, 남자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탓에 금방 분해되고 말았다.


“물을 단련한다는 뜻이니까. 그럼 분노는 눈물을 다스린다는 건가?”


이에 개의치 않고서 태강은 연신 혼잣말을 이어가며 녹수의 이름을 하염없이 떠올리고 있었다.


“분노로는 눈물을 다스릴 수 없어.”


남자가 태강이 등진 곳을 향해 일부러 외쳤다.


“그럼 뭘로 다스린다는 거야? 녹수의 이름이 애당초 이런데 말이지.”


태강이 그곳을 따라서 가리키며 받아쳤다.


“눈물은 눈물로 다스리는 거야.”

 “그런 게 어디에 있어?”

“근처에 있을 거야. 내 생각이 맞다면, 분명히 그렇겠지. 그리고 그걸 바로 위로라고 하는 거야. 알겠어?”

“위로라고?”


주시하고 있던 곳을 향해 남자가 느닷없이 달려가버렸다. 순식간의 일이었기에, 태강에게는 그를 쫓고자 생각할 겨를도 충분하지 않았다. 남자를 놓쳐버려서는 안 되는 일이었으므로 태강은 재빨리 그가 있는 곳에 닿았다.


“그래, 우리가 여기서 빈둥거리며 서로에게 해주고 있던 것 말이야. 그게 위로야.”


이미 얼굴에서부터 드러나는 궁금증에 굳이 다시금 물어볼 필요는 없을 정도로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태강을 향해 남자가 가쁜 숨으로 답했다.


“난 눈물을 흘렸다고 한 적이 없어. 그런데 그게 어떻게 위로라는 거야?”


보폭을 늘려 남자가 뛰는 동안에 보다 느긋하게 걷게 된 태강이 물었다.


“내가 말했잖아. 눈물을 간직하려고 하는 게 슬픔의 습성이라니까. 눈물을 있는 그대로 흘리는 건 오히려 분노에 가까워.”

“도대체 뭐가 그렇게 복잡한 거야? 슬픔이 원래 그런 거야? 그래서 황호가 이렇게 삐뚤어진 건가?”

“틀렸어. 우리 모두가 복잡해. 왜냐면 인간의 감정이 복잡하기 때문이지. 너 역시 기적을 모르는 인간에게는 그 어떤 감정보다도 더 난해한 존재일 거야. 나 역시 그렇겠지. 그리고 난 나를 가장 잘 이해해주었던 이와 사랑에 빠졌던 것이고······.”


두 사람이 이른 곳은 공원의 입구였다. 여러 사람이 오가는 시간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간간이 지나는 사람들이 있기는 마련이었는데 그중에서도 눈에 확연히 들어오는 존재 몇몇이 이쪽을 냉큼 쳐다보고 있었다.


“뭐야, 녹수는 없잖아?”


인사 대시에 태강이 그들의 머릿수를 살피며 꺼낸 말이었다.


“그래서 불만이니?”


초영이 야단하는 어조로 제일 먼저 대꾸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의외라 이거지. 아까까지 위로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거든. 그렇지?”


옆에 있는 남자의 팔을 툭툭 쳐보았으나 태강은 기대에 걸맞은 동조를 얻을 수 없었다. 그 반대에 더 가까웠다. 남자는 짐짓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즉 그가 표현했던 것처럼 빈둥거리기만 했다는 것을 암시하듯이 무척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도대체 우린 어떻게 찾은 거야?”


아쉬운 대로 태강은 화제를 바꾸어야만 했다.


“그거야 쉽지. 우리 중에 누군가는 마음을 그대로 들켜버리게 되니까.”


초영이 가장 앞으로 나와 남자의 얼굴을 조용히 쓰다듬었다. 상한 곳이 없는지 살피는 듯했다. 그런데 그 누구도 그녀의 의도를 이해할 수는 있어도 막상 행동을 쉽게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남자는 이중에서도 가장 깔끔한 차림새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올곧게 넘긴 머리만 하더라도 그 어떤 계절풍이 들이닥치더라도 항상 단정할 것만 같았다.


“그래도 난 변한 게 없어, 초영.”


남자가 비릿한 미소를 걸치며 그녀의 손길을 그대로 두었다.


“그러니? 우리를 속이느라고 무척 힘들었을 텐데.”

“그렇지 않아. 언제나 진실로 살기만 하면 되더라고. 그러면 남은 속이기 쉽고, 나 자신은 속일 수 없어져. 꽤 재밌는 여정이었어.”

“더 이어갈 생각이 이제 안 들었던 거니?”

“그렇지 않아. 정반대야. 영원했으면 좋겠거든.”


듣지 말아야 할 말을 들은 모양인지 초영은 금방 정색했다. 그러고는 남자의 뺨에서 손을 거두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니까 나를 좀 도와줘.”


남자가 자신을 찾아온 무리를 향해 수줍게 웃으며 빌었다.


“뭘 도와달라는 말이야?”


여전히 초영만 그와의 거리를 좁히며 대답할 뿐이었다.


“내가 슬픔에 갇힌 사람들을 구할 수 있도록 말이야.”


아, 눈을 감으면 마음 안에 머문 모든 것이 나와 가장 가까우니 남자는 기꺼이 눈을 감으며 말했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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