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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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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최근연재일 :
2021.05.01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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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286,707

작성
21.04.30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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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331화

DUMMY

“어떻게 생각해?”


이제 다시 나나 옆에 선 남자가 그녀를 뿌듯하게 돌아보며 물었다.


“뭘 말이에요? 아무렇게나 대답하기에는 생각할 게 너무 많은 것 같은데.”

“그동안의 시간에 대해서, 혹은 그동안의 계절에 대해서. 그리고 너무 많이 생각할 필요는 없어. 생각이 고민이 되고, 고민이 우울이 되는 법이거든.”

“하지만 사람은 생각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어요.”

“그렇다면 그건 네가 사는 방식이겠구나.”


남자가 허리를 숙였다. 그러고는 나나와 똑같은 눈높이에서 무표정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그녀와는 다르게 눈을 서글서글하게 휘었다.


“사는 방식이라고요? 살아야 하는 방식이겠죠.”


나나가 퉁명스럽게 그의 얼굴을 밀어냈다.


“뭐가 됐든 좋아. 너는 살아남게 되었으니까. 중요한 건 사는 것도, 살아야 하는 것도 아니지. 살아남는 것이야. 그렇지 않으면 너는 나를 만날 수 없었을 테니까.”


남자가 뒤로 물러난 얼굴로 나나를 되레 자랑스럽게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쳐다봐요?”

“알고 있어? 허무란 것도 결국에는 살아 있는 감정이야.”

“······그렇겠죠. 사람이 느끼는 것이니까.”


나나가 꿋꿋하게 서서 남자의 시선을 피하고자 일부러 정면을 응시했다. 승강기의 문은 닫혀 있었다. 그런데 도대체 몇 층까지 가는 것이지? 이 승강기는 갑자기 또 무엇이며. 난 이곳으로 오기를 바란 적이 없는데.


“괜찮아. 네가 원하는 층에 도착하고, 이 문이 열리면 네가 원하는 곳에 아주 쉽게 이를 수 있을 테니까.”


그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던 남자가 나른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원하는 곳이요? 나는 집에 돌아가려고 했던 거예요.”

“그래, 그런데 너는 집에 이르기 위해서도 이걸 타야만 하잖아.”

“맞아요. 하지만 그거랑은 다르죠. 이건 내가 원하는 곳에 바로 데려다주는 물건이라면서요.”

“그렇지.”


나나가 내보인 손바닥에 남자는 어느새 집중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돌려받아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선뜻 이를 만지지 않았다. 망설이는 것이었을까. 남자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던 나나가 무심코 한 생각이었다.


“나는 망설이는 게 아니야. 망설이는 건 너였어. 기억해 둬. 나는 너를 이끌었지. 그래, 이끌었다는 말이 옳을 거야. 아니면 다스렸다는 말이 더 옳으려나? 알아차렸다고 해야 좋을까? 백나나, 옳은 것과 더 옳은 것을 구분할 줄 알아?”


이에 반발이라도 하듯이 남자가 나나의 손에서 물건을 덥썩 빼앗아 가 버렸다.


“둘 다 옳으면 문제는 없는 거잖아요.”

“아니, 이건 옳고 틀림의 문제가 아니라서 둘 다 옳은 건 아무 의미가 없어. 관점의 문제니까. 같은 사과를 두고 너와 폴 세잔은 너무도 달랐잖아. 하지만 너의 사과도 옳은 것이었고, 세잔의 사과도 옳은 것이었지. 그래, 그 애의 이름처럼 말이야.”

“그 애라고요?”


남자가 머리를 떨구더니 곧 눈만 치켜뜨며 나나를 흘끔 바라보았다.


“영월 말이야. 그 애는 내가 죽는 순간까지 내 곁에 있으려고 했어.”

“둘은 원래 떨어져 있었잖아요.”

“그럴 리가! 도처에 있는 게 바로 꿈이야. 그러니까 걸음을 조심해. 자칫하면 네 꿈을 짓밟는 게 네 자신이 될 수 있으니까. 그건 됐고, 영월의 이름으로 돌아가자. 그 애의 이름이 무슨 뜻인지 알아? 그 애의 이름은 영월(領月)이야. 달을 거느린다고들 하지. 그런데 누군가는 그게 아니라 영월(影月), 달의 그림자일 거라고 말해. 왜냐면 네가 다녀온 심연도에 있는 월영전이 바로 달의 그림자니까. 하지만 그 애는 달라. 달의 그림자 속에서도 마음껏 거느릴 수 있는 자야말로, 달을 다스리는 것이지. 아니면 내가 너를 이끌었나?”


남자는 말하는 도중에 수 차례 감정이 바뀌는 것처럼 얼굴 표정을 몇 번이나 바꾸어 댔다. 차라리 가면을 쓰는 편이 더 한결같았으리라.


“당신 이름은요?”


품위 같은 것을 고려했던 것은 아니다만, 오히려 자신이 체통을 생각하듯이 가만히 있었던 게 다행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나나가 물었다.


“내 이름? 내 이름은 왜?”


남자가 시치미를 떼려는지 고개를 으쓱였다. 그리고 나나의 눈에 더는 보이지 않도록 아예 뒷짐을 진 채 두 팔을 가려버렸다.


“당신의 이름도 여러 가지잖아요.”

“그랬던가?”

“그 뜻이 도대체 뭔지도 모르겠고 말이에요.”

“알 필요가 없어서 그래.”

“······자꾸 없다고만 이야기하네요.”

“있는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하니까.”


그때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그건 정녕 이상한 소리는 아니었다. 누군가가 그토록 원했던 층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전하는 승강기 자체의 알림이었다.


“위를 쳐다보지 마.”


몇 층인지 알기 위해서 나나가 고개를 들려고 하니 남자는 아까 나나가 눈을 뜨려고 했던 노력이 무색하리만치 어색하게 그녀의 눈을 가려버렸다.


“몇 층인지 알아야 할 거 아니에요.”


자신을 가로막는 팔을 붙잡으며 나나가 말했다.


“아무리 고개를 떳떳하게 든다고 한들, 그런 눈길이 닿는 곳은 네가 갈 길이 아니야. 너는 눈이 아니라 다리로 길을 걸어야 할 테니까.”


남자가 팔에 힘을 주며 외쳤다. 그는 나나가 포기하는 심정으로 고개를 숙일 무렵이나 되어서야 그녀에게 시야를 돌려주었다.


“문이 열리잖아요.”


나나가 앞을 가리키자맞 남자는 닫힘 버튼을 찾아서 그대로 문을 닫아버렸다.


“다리가 없다면 어떻게 할 거 같아?”


남자가 대뜸 질문을 던졌다.


“왜 갑자기 그런 걸 물어요?”

“길을 걸어야 할 다리가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 같아?”

“······못 걷는 거잖아요.”

“아니, 걸을 수 있는 방법은 틀림없이 있어. 틀림이 ‘없이’ 방법이 ‘있다’는 거야.”


남자는 버튼이 보이는 곳을 가려버리고 아무렇게나 다른 버튼을 눌러버렸다. 곧이어 승강기가 위로 향하는 듯한 느낌을 받은 나나가 당황해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런 그녀와 상반되도록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무슨 뜬금없는 소리예요?”

“아, 뜬금은 ‘없이’ 소리는 ‘있다’는 거구나.”

“말장난이나 하자는 게 아니에요.”

“그래. 장난은 ‘없이’ 사실은 ‘있다’는 거였지, 내 말은.”


남자의 감시에 나나는 함부로 눈을 위로 뜰 수도 없었다. 그저 그 무엇에서도 벗어날 수 없는 상황에서 오로지 남자의 시선만을 스스로 감당해내야만 했다.


“뭐라고요?”


우직한 것 같은 기계 밖의 소음에 나나가 얼굴을 찡그리며 물었다.


“아무 말도 아니야. 아무 말도······.”


남자가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말이야. 너의 ‘사계절’은 어땠지?”


그리고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무슨 사계절이요?”

“너의 ‘사계절’ 말이야.”

“그거야······ 별로였죠.”

“별로였다고?”

“누군가의 《사계절》을 그대로 따라서 그리는 게 어렵더라고요. 그리고 그게 세잔의 대표적인 작품은 아니잖아요. 나름대로 재해석을 시도했는데, 잘 모르겠어요.”


나나가 뒤로 발을 떼어 놓으며 승강기 구석으로 갔다. 남자와 조금 멀어졌다. 그런데 그는 변한 게 없었다. 왜지? 자세가 그대로이기 때문일까? 분명히 변한 게 있을 텐데. 나나는 그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나는 너의 ‘사계절’을 묻고 있는 거야. 누군가의 《사계절》이 아니라. 월계에서의 시간이 어땠냐니까?”

“······월계에서는 사계절을 보낸 적이 없는데요.”


나나가 정색하며 자신을 노려보자 남자는 그 시선이 곤란한 사람처럼 눈을 가늘게 뜨는 대신에 입술은 불만스럽게 벌렸다.


“별로인 《사계절》을 두고 너는 너의 ‘사계절’마저 별로라고 하는구나.”


그것은 곧장 그의 불평이 되었다.


“뭐라고요?”


이번에는 똑똑히 그의 말을 들었으나 말귀는 아직 못 알아들은 나나가 물었다.


“하지만 이것도 기억해. 그 《사계절》이란 것도 결국에는 누군가의 ‘사계절’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았을 거라는 걸. 넌 참 기억할 게 투성인 아이구나. 그래, 너는 경이를 꿈꾸는 아이니까 그럴 수밖에.”

“나는 아이가 아니에요.”

“하지만 내 눈에는 그래. 네가 아무리 나이가 들었다고 해도, 나처럼 오랜 세월을 살지는 않았으니까. 뭐, 상관은 없지. 시간과 삶은 별개의 것이니까. 단지 둘의 사이가 좋을 뿐.”


남자가 다시 나나 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너는 왜 나를 두려워하지? 나는 오히려 네가 두려운데.”


그는 허공에 감정을 매달고 떠나온 듯이 공허하게 나나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왜 두렵다는 거예요?”

“그야 두렵지. 너는 해를 넘본 나의 일부분이었잖아.”

“해를 넘본다고요?”

“달에 만족하지 않고, 해를 넘보는 아이. 그게 나의 너야. 그렇게 너는 슬픔에 빠져 있던 나에게서 가장 먼저 떨어져서 해가 있는 곳으로 달아나버렸지. 하지만 괜찮아. 너로 인해서 나는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게 되었으니까.”


남자가 나나의 귀 뒤로 흘러내린 잔머리를 넘겨주며 가만히 속삭였다.


“당신은 죽을 거라면서요.”


나나도 그에 맞게 소리를 죽였다.


“그래. 이제 너희에게는 너희만이 삶이 있게 되었으니까.”


남자는 그 이야기를 살리려는 듯이 목소리를 조금 더 키웠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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