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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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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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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6,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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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5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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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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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쪽

316화

DUMMY

시간은 아주 많이 흘렀다. 이 ‘아주’라는 부사를 명심할 필요가 있다. 모든 게 끝나가는 시점에서 하늘에는 오직 달만이 변치 않은 채로 걸려 있는 데다가 여전히 많은 것들이 진행형으로 이어지고 있으니 시간은 그야말로 영원에 견줄 정도로 흐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변한 듯하면서도 변하지 않은 듯한 시점은 끝나지 않는 끝과 같은 것이었다.

나나는 축제를 앞두고 분주해진 조이의 뒤를 이어 아이를 돌보게 되었다. 도진은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몰라도 글 쓰는 일을 아직도 포기하지 않은 것 같았다. 하기야 관둘 이유가 있으면 할 이유가 있는 것도 당연지사 아니겠나. 육아는 체질에 맞지 않는 일이었지만, 당분간은 기다릴 필요가 있었다. 적어도 전시회까지는 기다려볼 참이었다. 남들을 속이는 일이 도덕적으로 어긋나기는 해도 제 그림을 두고 이 월계를 떠나는 일은 어쩐지 있을 수 없는 사건으로 다가왔다. 그래도 돌아갈 여지는 충분했지만, 어쨌거나 그녀는 돌아가지 않았다. 이렇듯이 선택의 이유는 수만 가지일 필요 없이 단 하나여도 충분했다.

품에 안고 다니기에는 아이가 어느 정도 무거워진 바람에 나나는 차차 걷기 시작한 아이와 함께 바닥을 기어 다녀야만 했다. 누군가가 걷기 위해서는 또 다른 이가 엎드려야만 한다는 사실이 묘하게 기괴했다. 아니, 감동이라고 해야 하나. 낮은 시선 속에서 세상은 더 커다랗게 보였고, 같은 거리라 하더라도 더 멀게만 느껴졌다. 좌우간에 심장 부근에 있는 마음이라는 것이 동한 것만은 확실하다.

아이와 눈을 맞추기 위해 거실에 납작 누워 있던 나나는 서둘러 일어났다. 곧 잠들 것처럼 칭얼거리는 준비를 하는 아이를 재우기 위해서다.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이불을 두어 차례 정성스레 덮어주고서 아이의 배를 토닥일 때도 그녀는 그 한 가지를 완전히 잊고 있었다. 그런데 거리를 두고서 방문을 완전히 닫을 때, 그녀는 마침내 그 사실을 떠올려냈다.


“있잖아.”


그래서 도진이 나올 때까지 거실을 지키고 있었다. 그나마 도진이 기대했던 시간 안에 나온 탓에 결린 어깨와 팔에 관한 투정은 넣어둘 수 있었다. 하지만 상대방은 시선만으로 제압하는 나나의 당찬 포부에 기가 눌리고 만 것 같았다.


“왜 놀라?”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는 도진을 보며 나나가 물었다.


“놀라서요.”

“내가 여기 계속 있던 게 하루 이틀도 아니었는데 놀랄 게 뭐가 있어?”

“그야 놀라죠. 나나 씨가 이쪽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던 건 오늘이 처음이잖아요.”


도진이 자신 옆에 앉을 무렵에 나나는 팔짱과 책상다리를 풀며 그에게 어느 정도의 공간을 내어주었다.


“아냐. 난 그쪽을 꽤 자주 봤었어.”


지난날들을 문득 더듬어보며 나나가 우물거렸다. 아마 도진이 가까이에 있지 않았더라면 안 들렸을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예전에도 종종 궁금해서 보곤 했으니까. 나도진 네가 몰랐을 뿐이야.”

“그런가요?”


도진이 뒷머리를 긁적이는 모습을 아주 오랜만에 본다고 생각한 나나는 뒷말을 더하지 않은 채로 고개를 끄덕거리기만 했다.


“궁금한 게 있어서 기다리고 있었어.”


나나가 도진의 얼굴을 또렷이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바로 물어보지 그랬어요?”

“아냐. 나도 생각 좀 할 시간이 필요했거든. 이건 나름의 고민이랄까, 이것 역시 일종의 창작이랄까? 그런 거 있잖아. 예술이라고 부를 수는 없어도 삶이라는 걸 긍정할 수밖에 없어서 더 신중해져야 하는 선택 말이야.”

“무슨 소린지는 모르겠지만, 나나 씨가 무슨 이야기를 하든 부정할 수 없는 것 같은 예감이 드는데요.”


퍽 진지해 보이는 나나의 표정에 대고 도진은 얼떨결에 그녀의 의견에 동의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맞아. 이건 이름에 대한 거니까.”


나나가 검지를 치켜들며 ‘이름’이라는 단어를 강조했다.


“이름이요? 어떤 이름이요?”

“몰라.”

“이름을 모르는데 이름에 대해서 뭘 이야기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 이름을 정해야 한다는 거지.”


그러자 도진은 입을 아주 크게 벌리며 감탄했다. 손뼉을 치기도 했던 것 같지만, 나나는 그에게 집중하기보다는 여전히 새로운 개념의 탄생에 몰두하고 있었다.


“아직 이름을 정하지 않았어요. 조이가 아이를 데리고 밖에 다니기는 했어도 최근엔 다들 바빠서 이름을 부를 틈도 없었을 거예요.”


도진이 관련된 일화를 꺼낼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나나는 그의 말을 신중하게 듣기 시작했다.


“그런데 정말 아직도 이름이 없단 말이야?”


아주 쓴 것을 뱉는 양 나나가 얼굴을 구기며 말했다.


“그럴 수도 있죠.”

“왜? 사람은 이름이 있어야 부를 수 있잖아.”

“어쩌면 사람은 어릴수록 이름이 필요 없는지도 몰라요.”

“말도 안 돼!”


다음에는 아주 당황하면서 도진을 쳐다보았다.


“정말이에요. 이름을 갖는 일이 예술은 아니고 예술적인 행위에 그친다고 해도 말이에요. 이름을 붙이는 일은 비평적은 아니더라도 확실하게 비평이니까요. 어린애를 비평하고 싶어 한다면 좋은 어른, 좋은 인간이라고 할 수 없을 거예요. 그러니까 오히려 저 아이한테는 다행일지도 몰라요.”


도진의 해명은 반면에 아주 시큰둥했다.


“그럼 난 이 말을 하면 안 되는 건가?”


또, 그와 다르게 나나는 감정이 아주 요동치는 사람처럼 도진의 눈치를 살폈다.


“어차피 비유적인 표현이었어요. 비유가 아니더라도 말이죠. 그래서 나나 씨가 하려는 말이 뭔데요?”

“······내가 이름을 지어주려고 했어.”


용기가 많이 요구되었던 것과 다르게 도진은 나나의 선언을 아주 덤덤하게 받아들이기까지 했다.


“그거 좋은데요?”


게다가 좀 전보다 더 여유로워 보이기까지 할 정도로 태평하게 떠들었다.


“좋다니? 비평이니 뭐니 뭐라고 말했잖아. 그렇게 따지면 나는 나쁜 사람인 것 같잖아.”

“나나 씨가 나쁜 게 아니에요. 오히려 좋은 사람인 거죠.”

“나도진, 네 이야기랑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데도?”

“그럼요. 이야기의 앞뒤가 맞기를 바라는 건 비평을 하는 사람이지, 예술을 하는 사람이 아닌걸요, 화가 님.”


나나가 낯간지러워하는 호칭을 뒤에 덧붙이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도진의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어차피 이름은 있어야 해요. 살아보니까, 부모는 없어도 이름은 있어야 하는 게 사람의 인생이더라고요. 비록 얼마 살지는 않았지만요.”


일부러 나나의 시선을 피하며 도진이 말을 이었다. 그 때문에 나나는 그가 이번에도 농담을 던져본 것인지, 하나밖에 없을 진심을 들려준 것인지 쉬이 분간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자신이 더 선호하는 쪽으로 생각하며 대답해야만 했다.


“맞는 것 같아. 부모는 내 곁에 항상 있어주지는 않지만, 내 이름은 언제나 나를 따라다니잖아. 그림자보다 더해. 죽으면 그림자는 사라지는데, 죽어서도 나를 따르는 게 내 이름일 테니까. 그 반대일 수도 있겠지. 내가 내 이름에 끌려다닐 확률도 있으니까.”

“그럴까요?”

“응. 그런데 그동안 잊고 있던 게 하나 더 떠올랐어. 그걸 물어도 돼?”

“얼마든지요.”


도진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나나는 대화를 아주 무겁게 만들기로 작정했다.


“백면의 이름은 도대체 뭐야?”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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