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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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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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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01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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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6,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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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21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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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322화

DUMMY

“좋아, 대답하기 싫다고 하면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우리가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게 있어. 먼저, 아무도 헐뜯지 말아야 해.”


자신의 메아리조차도 민망해서 울리지 않는 것을 깨닫고는 태강이 중재에 나섰다.


“난 누구를 헐뜯기 위해서 말한 게 아니야. 어쩌다가 궁금한 게 생겨서 지하로 온 건데, 별안간 네 목소리가 들려서 와봤다가 당장에 실험도 못 하게 되었어. 손해를 본 쪽을 따지자면 나라고.”


흑석이 시든 꽃잎이 줄기에 작별을 고하듯이 퍽 맥없이 지껄였다.


“무슨 실험? 여기서 실험할 게 있나?”


태강이 공간의 전체를 감싸는 시늉처럼 두 손을 넓게 펼쳐 보이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잡히는 건 오직 허공뿐이었다.


“모아둔 나무뿌리에 물을 줘보려고 했어.”

“이미 죽은 거나 다름없는데, 뭐 때문에?”

“이미 죽었으니까 되살리는 데 의미가 있는 거지. 살아 있는 것을 살릴 필요가 없잖아. 죽어가는 것의 소생과 죽은 것의 부활 때문에 생명은 더 큰 가치를 얻는 거야.”

“그건 너무 매몰차지 않아? 살아 있는 것도 그 자체로 살아 있느라고 고단할 텐데.”

“살아 있는 것도 어차피 그 소생이나 부활에서 삶의 가치를 찾는 거야. 반드시 삶을 두고 아등바등하는 것만이 살아나는 길이 아니라는 걸 배워야 하니까. 더군다나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온 것도 아니고.”


대화를 끊은 흑석이 태강을 지나쳐서 황호 앞에 섰다. 나나와 도진은 그들에게 자리를 내어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옆으로 비켜섰다. 이에 심기가 불편해진 태강이 오만상을 쓰더니, 성큼성큼 다가와 그들 사이를 반쯤 가로막았다.


“좋은 생각이 있어. 우리 모두 고단하지 않아도 되는 방법 말이야.”


태강이 말했다.


“그게 뭔데?”


의례적인 대답에 지나지 않았던 것인지 흑석의 목소리는 메말랐다.


“소생이나 부활에서 우리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삶의 가치를 배울 수 있는 곳이 있거든. 다시 생각해 보니까 네 말이 옳다는 이야기야. 그러니까 여기는 우리가 모이기에 적절한 장소가 아니라는 거지.”

“네가 얘들을 여기로 데려온 거잖아.”

“맞아. 그런데 그래선 안 되었던 것 같아. 내 실수였어. 왜냐면 이 방은 이제 더는 주인도 없는 데다가 과거나 다름없잖아. 과거에 머물기만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어. 문이 열린 이상 과거는 드나들 수는 있어도, 머물러서는 안 되는 영역이라는 거야.”

“그럼 네가 말하는 대화하기에 최적의 장소는 어딘데?”


이는 묻고 있는 흑석뿐만 아니라 모두가 몹시 궁금해하는 부분이었다. 태강은 이때의 묘미를 놓치지도 않고 오히려 즐기고 있었다. 그는 돌연히 서랍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갖가지 것들을 모조리 뒤적거리는 듯이 요란한 소음을 만들더니, 그중에서 빈 유리병을 찾아냈다. 아무래도 여분의 병인 것처럼 보였다.


“그 전에 네가 하려던 실험도 앞으로 할 수 있다는 걸 명심하도록 하자. 비록 네가 원래 가져온 건 깨지고 말았지만.”


그 병을 공처럼 과감하게 다룬 그는 그대로 병을 흑석 쪽으로 던졌다. 민첩하게 행동했으니 망정이지, 아마 굼뜨게 반응했더라면 간밤의 비명과도 같은 울림이 양심을 자극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뭐야?”


다가온 무리를 보며 굵은 가지 위에서 달목의 등에 기대어 앉아 있던 초영이 물었다. 태강이 네 사람을 이끌고 간 곳은 천일나무 아래였다. 나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만큼 이미 가지는 앙상했고, 이파리는 재채기 같은 보람 없는 바람에도 허망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계절 탓인지, 아니면 생명의 부질없은 운명 탓인지 그 원인을 가늠하기 힘들었다.


“계절 탓이에요.”


나무 줄기를 어루만지고 있던 주화가 손을 떼며 말했다. 나나는 비밀일 것도 없는 제 마음을 들켰다는 사실에 대뜸 부끄러워졌다.


“겉보기에는 모든 게 시드는 계절에 맞게끔 시들어가는 것이기는 해도, 실은 살아나고 있는 거나 다름없어요.”


“내려가고 싶습니다.”


달목이 이 기회를 이용해서 초영을 떼어놓고자 했다.


“안 돼. 쟤네가 여기에 온 이상 우리도 자리를 지켜야지.”


일부러 몸의 무게를 더 실어가며 초영은 그의 기대에 응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녀는 태강에게서 눈을 돌려 다른 먹잇감을 찾은 것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나나의 눈에는 그렇게 비추어졌다.


“백나나, 재밌는 부탁 하나만 해도 돼?”


제 옆에서 연신 눈알을 굴리고만 있는 나나에게 태강이 바짝 붙어 귓속말로 물었다.


“뭘 말이에요?”


부탁이란 귀찮고 성가시기만 한 것이 아니었는지 의문이 든 나나가 눈살을 찌푸리며 반문했다.


“이제 더는 화를 내지 않겠다고 다짐해 봐.”

“왜 그래야 하는데요?”

“그야 재밌을 테니까. 대신 진심을 다해서 다짐해야 해.”


왜 갑자기 그런 마음을 먹어야 하는지 나나는 이해할 수 없었고, 무엇보다도 그의 말에 따르기 싫었다. 화를 낼 거리도 없는 데다가 그래야만 하는 이유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 앞에서 얼굴을 치우지도 않고 이전처럼 깐족거리며 눈을 줄곧 맞추어오는 태강의 태도에 그녀의 인내심도 슬슬 한계를 향해 치닫게 된다.


“그래, 이제 화를 참아보는 거야.”

“왜, 왜요?”


태강은 아무래도 나나의 감정을 구슬리고 있는 듯이 보였다. 이 광경을 모두 지켜보고도 말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가잠 점잖고 양심적이라고 여겼던 달목까지도 태평성대를 맞이한 것처럼 아주 평온해 보였다. 오직 도진만이 나서야 할지 말아야 할지 발을 굴리고 있었다.


“이건 일종의 연습이야. 더 나은 결정을 위한 연습. 화를 내지 않으려고 할 때, 넌 비로소 화를 내는 거거든. 화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화가 바로 그런 화야. 교육을 제대로 받은 사람처럼 다스려진 화만이 제대로 써먹을 수 있는 화라는 말이지. 써먹지 못할 화는 끝내 그 화가 너 자신을 이용하게 되니까.”


태강은 동굴 쪽을 바라보며 웃었다.


“네가 화를 이용할 수 있을 때, 그 화는 실체를 드러내는 거지.”


그리고 나나가 그쪽으로 시선을 돌릴 수 있도록 직접 그녀의 몸을 그 방향으로 틀어주었다. 이윽고 나나는 남자의 화실 앞에서 보았던 그 얼굴을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굳은 인내로 길을 걸어오는 녹수의 모습에서 연륜으로 드러나는 자비를 찾을 수 있었다. 비단 노화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나, 눈에 보이는 것을 속일 수 없다는 것을 떳떳하게 인정해야 한다는 듯이 그녀는 늙어 있었다.


“저렇게 말이야.”


태강이 마지막으로 속삭이며 나나에게서 멀어졌다.


“그럼 이제 도진이 너한테 부탁을 해볼까? 재미는 장담할 수 없어도, 볼만은 할 거야. 구경할 수 있다는 건 떳떳하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그러면서 바로 옆에 있는 도진의 옆에 붙는 태강이었다. 긴장한 도진이 반사적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너는, 음······ 그래, 도진이 너 자신을 두려워하는 거야.”

“제가 저를 말입니까?”


난처해진 도진이 손가락질로 자신을 가리키며 대꾸했다.


“그래. 넌 남을 더 두려워하니까. 그런데 너 자신을 두려워할 때 더 확실해지는 게 있거든.”


이번에도 도진이 자신의 말에 따르기 전까지는 절대 떨어지지 않으려는 듯이 그는 도진의 목덜미 부분에서 숨을 쉬고, 말을 하며, 기다렸다.


“저는 저 자신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마치 죄를 감면해달라는 듯이 도진이 말했다.


“그래, 두려움이 일어나 가장 좋은 조건이잖아.”

“어째서 그렇죠? 저는 이해하고 싶은 것투성이지, 두려워하고 싶은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게 바로 두려움이라는 거야.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도저히 그냥 내버려 두지 못하잖아. 가끔은 그런 것이 있게끔 둬야 해. 하지만, 그게 너 자신이어서는 안 되는 거고. 넌 지금까지 거꾸로 행동하고 있었어. 남을 이해하려고 들었고, 너 자신을 이해하려는 시간은 보내지 않았으니까. 이해하고 싶은 게 있다면 그게 너 자신이 되도록 해야지. 자, 잡담은 이쯤에서 끝내고 너도 너 자신에 대해 집중해 봐.”


말을 마침과 동시에 태강은 자신의 손바닥으로 도진의 시야를 가려버렸다. 나나는 자신을 향해서 잔잔한 미소를 보내는 녹수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탓에, 그를 구출해낼 생각 같은 건 할 수 없는 처지였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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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5 324화 21.04.23 46 1 9쪽
324 323화 21.04.22 39 1 9쪽
» 322화 21.04.21 42 1 9쪽
322 321화 21.04.20 42 1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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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9 318화 21.04.17 38 1 9쪽
318 317화 21.04.16 33 1 9쪽
317 316화 21.04.15 38 1 8쪽
316 315화 21.04.14 33 1 9쪽
315 314화 21.04.13 39 1 9쪽
314 313화 21.04.12 72 1 9쪽
313 312화 21.04.11 37 1 9쪽
312 311화 21.04.10 33 1 9쪽
311 310화 21.04.09 85 1 9쪽
310 309화 21.04.08 38 1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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