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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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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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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01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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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27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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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8화

DUMMY

왜냐면 대개의 말실수가 그러하듯이, 만반의 준비를 기할 만큼 이상적으로 철저했던 계획은 단 한 번의 입놀림만으로 만사휴의(萬事休矣)로 바뀌어버린 것이기 때문이다. 태강은 이에 대한 죗값을 톡톡히 치를 운명이었는지, 이후에 늦은 저녁 무렵이 되어서까지 자신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나나의 끈기에 정작 그 자신은 지혜와 용기 그 어느 쪽도 제대로 발휘해볼 수 없게 되었다.


“어차피 알게 될 건데 왜 그렇게 재촉해?”


그림자를 떨치는 일이 나나를 내쫓은 일보다 훨씬 수월하리라고 판단한 태강은 비로소 백면의 방에 들어서서 자신이 가는 곳마다 쫓아오던 나나의 걸음을 멈춰 세우며 외쳤다. 정작 쫓기는 신세는 자신의 처지였는데, 묘연하게도 상대방을 추궁하는 처지도 자신의 신세라고 생각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어차피 알게 될 거라면서 왜 말을 안 한 건데요?”


나나가 또박또박 말대꾸하며 눈을 부릅떴다.


“그야 네가 나중에 알게 되기를 원했으니까! 그렇다고 해도, 어차피 고작 시 한 편인 건데. 다들 너무 그렇게 호들갑을 떨 필요가 있었을까 싶단 말이야. 그러니까 너도 제발 나한테 자유를 주는 게 어때?”

“그러지 않겠다면요?”

“못하는 것도 아니고, 안 하겠다고까지 하면 나한테도 다른 수가 없어. 널 내쫓을 거야. 내가 누려야 할 건 자유인 것 같아. 아니, 그래. 나는 멋대로 굴 권리가 있어.”

“지금까지 그래왔잖아요.”


그의 속마음을 빌려서 표현하자면, 아주 조금 정확한 지적에 태강은 금방 난처해진 얼굴로 대화를 회피하려고 들었지만, 완전히 그럴 수는 없었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나나가 어떻게 해서든 얼굴을 요리조리 들이밀었기 때문이다.


“그때랑은 완전히 달라. 자유가 언제나 같을 것으로 생각하면 큰 오산이라고. 백나나, 잘 들어. 자유는 늘 변하는 거야.”

“차라리 그냥 변덕이라고 하는 게 어때요? 자유라는 말은 너무 거창하잖아요. 실은 아무것도 아닌 자신을 포장하고 싶어서 자아니 뭐니 떠드는 것처럼 말이에요. 그리고 자유든 변덕이든, 누군가의 마음을 돌릴 정도의 시라면 궁금해하는 게 당연하죠. 그것도 평범한 사람의 마음을 돌리는 것도 아니잖아요.”

“아니, 평범함을 비범함으로 바꾸는 게 가장 힘든 거야. 그러니까 황호의 마음이 바뀌는 건 어쩌면 아주 쉬웠을지도 몰라. 어쨌든 나는 이제 말하지 않을 거야. 네가 돌아가기 전까지는.”


태강은 경고하듯이 삿대질로 나나를 가리키며 그녀가 이곳에서 멀어지기를 은연중에 바라고 있었다.


“좋아요. 그럼 지금 갈래요.”


그를 미지근하게 바라보던 나나가 홧김에 결심하며 태강을 놀라게 했다.


“뭐? 지금 간다고? 진심이야?”

“그거야 사람의 마음을 읽을 줄 아는 성인이 더 잘 아는 거 아니에요?”

“그렇지, 그렇고말고. 그런데 넌 지금 막 마음을 바꾸었잖아.”

“아마도 그게 제 자유인가 보죠.”

“······이건 너무 갑작스러워. 원래 이래서는 안 되는 거야.”


두근거리는 심장 부근의 가슴에 두 손을 맞잡듯이 올린 태강이 긴장한 모습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뭔가 보탬이 될 수 있는 방편을 찾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렇다 할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듯이 희망은 완벽히 손에 쥐고 있는 자의 몫이었다.


“왜요?”


나나가 유리병을 눈높이에 맞게끔 들어서 자세히 관찰하며 물었다. 투명한 그 너머에서 당황하고 있는 태강의 모습이 다소 불투명하게 보였다.


“그야 이건 자유가 아니라 방종이잖아.”

“그럴 게 뭐가 있어요? 그리고 여길 떠나겠다고 한 게 한두 번도 아니었는데요. 어차피 가야 해요. 여기서 한 살씩이나 먹고 싶지는 않아요.”

“왜? 월계도 나쁘지 않아. 오히려 너한테 더 좋을 거야. 넌 이 심연도에 언제나 찾아올 수 있잖아. 여기서 지내는 게 더 좋을 거야. 네가 원하는 그림도 마음껏 그릴 수 있을 테니까. 세계로 돌아가면 걱정해야 할 거리가 얼마나 많겠어? 적어도 여기서는 돈 걱정 같은 건 하지 않아도 돼. 그리고 그 애가 ‘천우’라는 이름으로 떨친 명성을 일부 너한테 주기도 했는데, 오히려 여기서 사는 게 더 편하지 않을까?”

“뭔가 이상해요.”


나나가 한쪽 눈썹을 치켜뜨며 유리병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불안하고 초조해하는 태강 앞으로 도로 돌아왔다.


“제가 돌아갈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말했으면서, 갑자기 왜 말을 바꾸는 거예요? 마치 제가 월계에 평생 머물기를 바라는 것인 양 말이에요.”


누군가가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눈길을 마주칠 길이 없어지자 차선책으로 나나가 태강의 속눈썹 끝을 날카롭게 겨누며 물었다.


“네가 후회할까 봐 그래.”


태강이 우물거리는 목소리로 마지못해 대답했다.


“제가요? 왜 후회를 한다는 거예요? 당연히 돌아가야 하는 건데.”

“그러니까 후회할지도 모르는 거야.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이 더 당연하지 않으니까. 당연하게 원하는 것들을 가지지 못했을 때, 인간은 구차해져. 넌 분명히 돌아가서 너만의 인생을 살아가기 시작하겠지.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일들이 다시 벌어지는 날에, 너는 어떻게 할까? 나는 그게 두려워서 너를 조금 더 붙잡아두려는 거야. 넌 돌아가야 해. 하지만,”


이제야 나나와 마주 보게 된 태강이 애가 타는 듯한 마른 눈동자에 의심과 확신이라는 물기를 한꺼번에 담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모든 게 네가 원하는 방향으로만 나아지지는 않을 거야. 난 지금도 듣고 있거든. 희망을 마음에 품은 사람들이 마침내 희망을 포기하면서 마음껏 나를 미워하고 욕하는 소리를 말이야. 난 이제 내 멋대로 그 사람들에게 기적을 선물하지 않으려고 하니까, 그걸 다 견뎌내야만 해. 그리고 그 사람들도 마땅한 좌절을 인내해야만 하겠지.”

“하지만 아까는 자유를 누려야 한다면서요.”

“그래. 견뎌야 할 걸 견뎠기 때문에 자유를 누리려는 거니까. 그리고 그 자유는 방종이 아니야. 절대로 아니야. 내가 그동안 망나니처럼 군 건 아니잖아. 단지, 내 자유에 무엇이 따르는지에 대해 잘 몰랐던 것뿐이었어. 그리고 그 애와 마지막으로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생전 처음 겪는 것을 내 삶의 마지막인 것처럼 참아내야만 했거든. 중요한 건 말이지, 그건 너한테도 일어날 거야. 그런데도 정말 지금 돌아가겠다고?”


태강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불평에 신중했으며 짜증에 엄격했다. 정말로 그의 언동은 점잖았다. 그리고 나나는 그것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을 만큼 태강의 얼굴에서 성장과 성숙의 차이를 천천히 구분해내었다.


“······돌아갈 거예요.”


그러므로 그녀의 대답은 아주 느렸다.


“네가 그린 그림이 미술관에 걸린 것도 구경도 못하고 가겠다는 거야?”

“상관없어요.”

“네가 그동안 함께했던 조이의 공연도 못 보고 갈 거야? 넌 지금 심연도에 있어서 잘 모르겠지만, 이제 막 축제는 시작되었단 말이야.”

“아쉽지만 어쩔 수 없어요.”

“그럼 도진이의 책은?”

“다 썼는지도 모르잖아요. 그러니까 제가 결정할 수 없어요.”

“그렇다면 다른 내생들은? 다른 두 명은? 네가 이름을 정해주려고 했던 그 아이는?”


나나는 갈수록 자신을 곤궁으로 몰아놓는 태강의 자세를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심지어 태강은 자신과의 이별보다도 다른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맞아.”


그녀의 속내를 잠자코 듣고 있던 태강이 고개를 끄덕인다.


“저는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요.”


나나가 둘 사이에 오해가 있는 것 같아서 이를 바로잡고자 조심히 말을 뱉었다.


“네 생각이 맞다고. 난 네가 떠나는 것보다 더 두려워하는 게 있어. 그것 때문에 그래. 정말 괜찮을 줄 같았는데! 막상 이렇게 당장이라고 생각하니까 그게 너무 견디기 힘들어. 자유보다 가장 견디기 힘든 게 뭔 줄 알아?”

“······모르겠어요.”

“실은 나도 몰라. 이젠 알 필요도 없고. 네가 가면 아주 영영 가는 거니까.”

“제가요?”

“아니, 백면이 말이야.”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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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9 318화 21.04.17 37 1 9쪽
318 317화 21.04.16 33 1 9쪽
317 316화 21.04.15 36 1 8쪽
316 315화 21.04.14 32 1 9쪽
315 314화 21.04.13 37 1 9쪽
314 313화 21.04.12 70 1 9쪽
313 312화 21.04.11 36 1 9쪽
312 311화 21.04.10 32 1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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