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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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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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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01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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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08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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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309화

DUMMY

그림은 여명에게 맡겨두었다. 갖고 가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곳에 두어야만 하는 까닭을 하나 찾았을 때, 나나는 여러 말이 따라붙는 쪽보다 한마디의 설명이면 충분한 쪽을 선택한 것이었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야?”


도진에게서 충격적인 소식을 들은 나나가 옹기종기 모인 화분에 물을 주며 물었다. 이미 많이 시들기도 하여서 되살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우선의 시도는 희망에 의한 것이었다.


“모르겠어요. 영월 님 말씀을 따라서 우선은 가만히 있는 중이에요.”


컵에 물을 따르던 도진이 나나의 행동을 지켜보며 말했다.


“아니, 그 문이 드디어 열렸다며. 그럼 이제 문제는 해결된 거잖아.”

“그렇긴 하겠네요. 그런데 오히려 다른 문제가 생긴 듯하니······ 만사가 해결된 것 같지는 않아요.”

“하긴. 그나저나 전시회는 어떻게 되는 건지 모르겠네.”


분무기를 내려놓으며 나나가 머릿속 고민을 입 밖에 냈다.


“참, 그림은 어떻게 할 거예요?”


입가에 가져간 컵을 도로 내려놓으며 도진이 물었다.


“이제 가서 이야기해야지. 그런데 내 그림을 두고 그 사람 그림이라고 하려니까 솔직히 내키지는 않아.”

“백면도 그걸 원하는 것 같은데요. 나나 씨가 대신 그림을 내거는 걸 말이에요.”

“그래도 내키지 않는 건 내키지 않는 거야. 도덕보다도 양심의 문제라고 해야 하나?”

“도덕과 양심의 차이가 뭔데요?”


대화가 길어질 것을 직감한 도진이 만면에 호기심을 담은 채로 나나가 답하기 이전에 먼저 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그러게. 내가 말한 건데도 좀 어렵네. 그런데 어떻게든 비교하자면 신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아.”

“신이요? 그러니까 더 어려워지기는 하네요.”

“아냐. 오히려 이건 더 쉬운 문제야. 신이라는 게 생각보다 편리한 존재라니까. 그러니까 신이 없으면 살 수 없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신이 있는 상태에는 도덕이 있다면, 신이 없는 상태에는 양심이 있다고 할 수 있겠지. 아, 모르겠네.”


도진의 물컵을 가져다가 벌컥 들이킨 나나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어째서 식사를 해야 할 곳에서 이런 담론이 펼쳐지고 있는 건지, 갑자기 이해할 수 없어졌다. 아니면 너무 오랜만에 신을 언급하는 바람에 양심이 발악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양심이라는 것이 절규한단 말인가?


“우선 가야겠어.”


그래서 돌발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맥락적으로 합리성을 따질 수는 없는 선택이었으나 신을 들먹인 순간부터 모든 것은 비합리적이었다.


“어디를요? 설마 대학에 갈 건 아니죠? 가도 좋을 게 없어요.”

“거긴 안 갈 거야. 내가 뭐 때문에 거길 가?”

“그럼 심연도에 가려는 거예요? 거기도 당장 가서 뭐가 되는 건 아니잖아요.”

“거기도 내가 왜 가? 눈물인지 뭔지 하는 건 12성인이 결정한 일이잖아.”


도진의 만류에도 나나는 조금도 지체함이 없이 바로 나갈 채비를 끝냈다. 사실 준비할 것도 없었다. 그저 자신의 몸만 챙기는 일로 나나는 끝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럼 어디로 간다는 거예요?”


도진이 밖으로 나선 나나를 따라오며 물었다.


“당연히 그 사람 작업실이지. 거길 들렀다가 다음에는 미술관에 갈 거야.”


나나의 이실직고에 도진은 길을 잘못 든 사람처럼 다소 허망하게 서 있었다. 그런 그는 그녀를 쫓는 대신에 머리를 긁적거리며 뒤돌아서야 했다.

한달음에 이른 곳에서 마주한 문은 잠겨 있었다. 심연도에 있는 그의 방문이 열린 대신으로 이곳의 문이 굳게 닫힌 것만 같았다. 더군다나 모든 것은 지난번에 보았던 그대로였다. 엄숙한 기다림도 소용없다고 구경꾼을 향해 외치는 듯했다.


“더는 망설이지 않아서 다행이구나.”


뒤에서 세월의 풍파에 다듬어진 듯한 부드러운 목소리가 나나를 불렀다. 뒤돌아서 직접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유리창에는 안과 밖에 있는 모든 것이 그대로 비치고 있었다.


“누구세요?”


그러므로 나나는 창에 맺힌 상에 대고 그 정체를 물었다.


“너의 친구라고 할 수 있겠지.”

“저는 할머니 같은 분을 친구로 둔 적이 없는데요.”


농담의 의도는 없었다고 해도 녹수는 나나의 담백한 의심을 인자하면서도 가볍게 웃어넘겼다. 그녀는 나나와 자신이 되도록 나란히 서도록 한 발자국 앞으로 옮겼다.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단다.”

“그렇다고들 하더라고요.”

“그래, 너의 꿈이 그러한 것처럼 말이지.”


나나는 만나기도 전에 자신을 잘 알고 있는 말투를 한두 번 접한 것이 아니었다. 이로써 이 나이든 여인이 성인 중 한 명이라는 것을 그녀는 깨닫게 되었다.


“왜 저를 찾아오신 거예요? 이제 상관없을 텐데.”

“눈물은 이제 쓰지 않을 거야.”

“어째서요? 천일나무를 살려야 한다면서요. 그간에 죽은 사람도 많은데 말이에요. 더 늦기 전에 해야 하지 않을까요?”

“하나밖에 없는 눈물을 고작 목숨을 부지하자고 쓸 수는 없는 법이지. 그 애는 이제 더는 예전과 같지 않아. 너희들이 삶을 얻은 대신에, 백면은 삶을 잃었다고 해도 틀린 소리는 아니거든. 그리고 더 가치 있는 일을 위해서 우리는 백면의 눈물을 아껴둘 거야.”


이젤에 놓인 여인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말은 창에 어른거리는 사람들의 몫인 것처럼, 그녀는 너무 말이 없었다. 제 귀에 꽂히는 이야기가 과연 누구의 입으로부터 나온 것인지 나나는 한 번 더 의심해야 했다.


“그런가요?”


자신 역시 말할 수 있는 존재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나나가 대꾸했다.


“그래. 나는 녹수야. 어렴풋이 알아챈 것 같구나.”

“네. 그래도 그 전에 다른 성인들은 만났으니까, 가려내기만 하면 누구지 금방 알 수 있게 되거든요.”

“그러니? 그런가 보구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올곧은 자세와 기품이 느껴지는 녹수의 모습에서 나나는 문득 지나치지 못하는 질문 하나에 걸려들고 말았다.


“그런데 어째서 분노를 다스리시는 거예요?”

“인간은 화를 내는 존재니까.”

“아뇨, 그런 게 아니에요. 화를 낼 것 같지 않게 보이시는데 어째서 사람들의 나쁜 감정을 다스리는지 궁금해서 물어본 거였어요.”


나나는 제 시선이 너머에 있는 그림의 여인에 더는 닿지 못하도록 직접 고개를 돌렸다. 녹수도 그 행동을 따라 한 탓에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게 되었다.


“화를 내지 않는 사람만이 화를 다스리는 거란다.”

“화를 낼 줄 모르면 화가 난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잖아요.”

“그렇지 않아. 화를 낸다는 건, 이미 타인의 마음은 안중에도 없이 자기 자신의 마음만을 제일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이거든.”

“사람이 이기적이라서 그런 건가요?”

“때로는 너무 이타적이라서 화를 내기도 하지.”


헤아려야 할 별이 너무도 많은 것처럼 녹수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 달, 저 달이 중심에 선 곳에 속이 타들어가는 것들이 주변부를 이루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그 모든 존재를 가련히 여기는 듯이 보였다.


“그리고 이제 그 누구도 화를 낼 필요는 없어.”


중력을 거스리지 않는 것인 양 녹수의 시선이 다시 나나에게로 돌아왔다.


“어째서요?”

“너 자신부터가 화를 내고 있지 않잖아. 여전히 백면을 모르면서도 말이야.”

“알고 싶지 않아서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아. 넌 반드시 알게 되어 있어.”

“그럼 저는 왜 화가 나지 않는 걸까요?”


나나가 땀이 흐르는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알고 싶지 않아도 알아야 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배워서 그렇겠지.”

“도대체 그게 뭔데요?”

“알고 싶지 않았던 너의 모습 말이야. 하지만 네가 가장 잘 알 수밖에 없는 너의 모습이기도 하지.”


나나는 그 주먹을 두고 그 무엇도 칠 수 없었다. 심지어 이 주먹만으로는 자기 자신도 때릴 수 없을 것 같았다. 쓸모없는 주먹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폭력을 위해서 쥔 주먹만큼은 아니었다.


“네가 되고 싶은 너의 모습이란다.”


녹수의 대답에 그녀는 화를 낼 수 없었다. 단지, 조금 서러웠을 뿐이었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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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3 312화 21.04.11 37 1 9쪽
312 311화 21.04.10 33 1 9쪽
311 310화 21.04.09 85 1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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