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판타지

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최근연재일 :
2021.05.01 23:55
연재수 :
333 회
조회수 :
14,088
추천수 :
244
글자수 :
1,286,707

작성
21.04.17 23:58
조회
37
추천
1
글자
9쪽

318화

DUMMY

자신보다 더 건장하고 젊은 상대인 태강에게는 비겁하게도 덤비지 않는 황호였다. 그게 몹시 분한지, 다만 무척 붉어진 얼굴로 오래된 선풍기의 늙은 바람처럼 쌕쌕거리는 숨소리를 낼 뿐이다. 계절을 너무 앞서간 것처럼 그 소리는 유독 시리고 거슬렸다.


“말해 봐. 왜 그러는 거냐니까? 넌 이걸 뺏을 이유가 전혀 없잖아.”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야.”


황호는 자신에게 모자를 건네는 태강의 팔을 매정하게 뿌리쳤다.


“상관할 바가 아니긴? 난 누구보다도 상관해야만 하는 존재인데. 그렇지?”


나나가 이 상황에서 동떨어지지 못하도록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기까지 한 태강이 두 사람에게 동시에 말을 걸었다. 나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신경이나 끄는 게 좋겠어.”

“그럴 수야 없지. 신경은 곧 감각이잖아. 감각은 성인에게 기대지 않고서도 인간이 스스로 인생을 헤쳐나갈 수 있는 단서를 주니까 말이야. 신경을 끈다는 건 감각을 없앤다는 것이고, 감각을 없앴다는 건 곧 인간이 인간이기를 포기한다는 거야. 그런데 12성인 중 한 명인 내가 신경이나 끈다고? 그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직무 유기죄라고, 직무 유기죄.”

“흥. 그렇다면 신경을 쓰든 말든 그저 빠지면 될 일이군!”


계속해서 자신이 부린 성질에 요목조목 반박하는 태강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황호가 코웃음을 치며 태강의 이야기를 그대로 흘려버렸다.


“그럴 수는 없지. 네가 한 짓을 곰곰이 생각이나 해 봐.”


정작 도망치지 못하도록 하려는 존재가 황호였던 것인지 태강은 땅에 떨어진 모자를 주어서는 곧장 황호의 코앞까지 갔다. 그리고 그의 머리에 일부러 모자를 푹 씌워 주며 엄포를 놓았다.


“사람을 가지고 노는 게 네 특기인 줄 몰랐어.”


모자에 가려진 황호의 얼굴에 대고 태강이 또박또박 고했다.


“사람을 가지고 노는 건 너겠지. 기적이란 찬란한 대신에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 그 신기루는 청춘과도 같아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것이며 제대로 쓰지도 못한 것이야. 그런데 그걸 가지고 너야말로 기분이 내키는 대로 인간을 이용하고 다녔잖아.”


황호의 입술이 신랄하게 움직였다.


“내가 인간을 이용했다고? 천만에! 인간이 날 이용한 거지. 필요할 때만 나를 찾잖아. 그리고 필요가 없어지면 그 즉시 바로 나를 버리지. 그런데도 나는 숱한 세월을 인간을 위해 살았어.”

“그래서 억울하다는 건가?”


거기다가 보이지 않는 태강의 얼굴에 대고 비웃기까지 했다.


“그럴 리가! 아니, 처음에는 억울했어. 얼마 전까지도 엄청 억울했지. 천규가 죽었을 때도 나에게는 기적을 바랄 존재가 전혀 없었거든. 평범한 인간들이 어찌나 부러웠는지 몰라. 소원을 빌면 들어주는 존재가 있잖아. 그런데 나는?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네가 너를 구원하면 되겠지.”


울분이 담긴 목소리로 외치는 태강이 자신의 가슴팍을 밀칠 기세로 달려들어도 황호는 가려진 시야를 핑계로 전혀 겁먹지 않았다.


“그래, 맞아. 그러기로 했어. 그래서 난 이제 인간의 마음에 기적 대신에 희망을 심어줄 거야. 그게 더 인간의 마음다운 것일 테니까.”


그새 달관한 것처럼 태강이 차분하게 대꾸했다.


“허, 희망이라고? 방금 희망이라고 했나?”


그리고 그 분노가 옮겨지기라도 했는지 이번에는 황호가 역정을 내기 시작했다. 그가 두 번째로 희망이라는 단어를 언급했을 때, 나나는 움찔거리며 유모차를 이들이 보이지 않는 방향으로 돌려버렸다.


“그래, 희망이라고 했어.”


태강이 마치 처음 듣는 단어를 암기하듯이 대답했다.


“그것도 참 몹쓸 것이로군. 기적보다 더 나쁜 게 희망이야. 기적은 실망을 가져올 뿐이지만, 희망은 절망을 가져오니까. 너도 갈수록 나빠지기만 하는군.”


나나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향하며 황호가 한 말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단정할 수 있는 거야? 넌 희망이랑 관련도 없을 텐데. 그리고 희망이 기적을 가져올 수도 있는 거야. 나도 이제 그렇게 할 거야. 인간들이 일확천금의 기회가 아니라 노력이 가져다주는 성취를 노리도록 할 거거든.”


태강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자신의 포부를 드러냈다.


“그 어느 시절에서도 먹히지 않을 소리를 하는군. 태강, 청춘이 허비되는 것처럼, 너도 네 능력을 낭비하고 있어. 작은 부자는 노력이 만든다고 하지만, 큰 부자는 과연 노력만으로 될 수 있는 것일까?”

“그럼 기적을 일으켜주면 되는 거지.”

“정말로 공평하지 않은 소리야.”


황호가 모자를 바로 쓰며 한숨을 쉬었다.


“노력의 정도가 다른데 그럼 기적의 정도도 달라야 하는 거 아니야?”

“그래, 노력의 정도가 다르지. 아주 다르지. 모두 자신은 아주 노력했다고 생각하겠지만, 우리의 눈에는 보인단 말이야. 어쩌면 인간들의 눈에도 보일지도 몰라. 일부러 외면할 뿐이겠지.”

“그럼 됐네! 문제는 없는 거잖아.”

“그래. 노력과 기적에는 문제가 없어. 희망에만 있지.”


그는 태강의 뒤에서 달아나려고 하는 나나의 뒷모습을 조용히 노려보았다.


“백나나, 가지 마.”


바로 눈치챈 태강이 뒤도 돌아보지 않으며 명령조로 말했다. 이에 나나는 움직이던 몸이 바싹 굳으며 곧 손의 마디 하나를 움직이는 일에도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지금 네가 가버린다고 해도 황호는 널 다시 찾아낼 거야.”


바로 앞에 있는 상대방을 똑똑히 바라보며 그는 여전히 나나에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래도 언젠가 돌아가야 하는 건 맞잖아요.”


나나가 아주 가늘어진 목소리로 핑계를 댔다.


“그게 지금 당장일 필요는 없다는 거잖아.”


단호한 태강의 태도에 기가 눌린 나나가 입술을 불만스럽게 내밀며 몇 걸음 후진했다. 두 성인에게 가까이 다가서지는 않고, 태강의 등 뒤에 숨는 방식을 택한 그녀였다.


“희망에만 문제가 있다고? 어째서?”


그녀가 잠자코 기다리는 것에 안심한 태강이 대화를 다시 이어나갔다.


“희망은 모두를 간절하게 만들거든.”

“그럼 된 거잖아.”


황호는 태강이 철없는 소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전혀! 그것 때문에 더 많은 문제가 생기는 거야. 주제넘게 구는 인간들조차도 마땅히 누려야 할 자들이 가져야 하는 희망을 아주 쉽게 가지거든.”

“이해할 수 없어. 희망은 나쁜 게 아니야.”

“그래, 희망은 나쁜 게 아니야······ 결코 나쁜 게 아니지. 희망은 나쁠 수가 없어, 그렇고말고. 희망이 절망이 되기 전까지는······. 너는 절망을 몰라. 절망이 가져오는 우울과 슬픔, 눈물과 비극. 그 모든 것에 대해서 너는 너무 몰라. 인간 삶의 가장 꼭대기에 올라선 너는 알 수가 없지.”


황호는 태강의 두 다리 뒤로 보이는 나나의 다리를 유심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난 그런 적 없어.”


태강이 억울한 감정을 토로했다.


“그래, 그러겠지. 머리 위에 올라앉은 자는 자신이 눌러앉은 바닥이 모든 바닥의 전부인 줄 아는 법. 제 발이 닿지 않는 탓인 줄도 모르고 그 밑에는 어떤 것들이 인간의 몸통을 이루고 있는지도 모르지.”

“그래서 내가 부족하다는 거야?”

“그럴 리가! 부족한 건 인간이지. 늘 부족한 건 인간이었어. 인간이 없다면 세상은 넘쳐나는 것투성일 텐데.”


황호가 곧 기괴한 미소를 지으려는 것처럼 입꼬리를 히죽거렸다.


“그래서 죽인 거야? 그 인간을 말이야.”


태강이 그를 못마땅하게 지켜보며 물었다.


“누구를 말이지?”


가장 좋은 순간을 놓친 황호가 지나치게 정색했다.


“그 교수 말이야. 죄를 지었으니까 죽인 거야? 부족하긴 한 인간이었잖아. 도덕성이든 양심이든, 뭐든 간에.”

“천만에!”


황호가 갑자기 팔짱을 차며 기세등등하게 자세를 바꿨다.


“그럼? 도대체 왜 죽인 건데? 너 때문이라는 건 이미 우리 모두 알고 있었어. 도진이가 이야기해줬거든. 유서에 대해서 말이야.”

“그 반대야. 그 인간, 인간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인간은 자기 자신을 견디지 못해서 죽은 거야. 내가 죽인 게 아니지.”

“네가 죽이지 않았다면?”

“그 인간이 나를 죽이려고 했던 것이지. 자기 자신의 슬픔 말이야.”


어느새 황호는 아주 철저하게 웃고 있었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달이 만든 세계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후원금 감사드립니다. +2 21.04.28 45 0 -
공지 후원금 감사드립니다. 21.03.05 174 0 -
공지 후원금 감사드립니다. 20.10.20 156 0 -
공지 후원금 감사드립니다! +2 20.09.29 278 0 -
333 332화 (완) +1 21.05.01 30 2 11쪽
332 331화 21.04.30 24 1 10쪽
331 330화 21.04.29 30 1 10쪽
330 329화 21.04.28 32 1 11쪽
329 328화 21.04.27 29 1 9쪽
328 327화 21.04.26 34 1 9쪽
327 326화 21.04.25 45 1 9쪽
326 325화 21.04.24 37 1 9쪽
325 324화 21.04.23 45 1 9쪽
324 323화 21.04.22 37 1 9쪽
323 322화 21.04.21 41 1 9쪽
322 321화 21.04.20 42 1 9쪽
321 320화 21.04.19 55 1 13쪽
320 319화(수정) 21.04.18 48 1 9쪽
» 318화 21.04.17 38 1 9쪽
318 317화 21.04.16 33 1 9쪽
317 316화 21.04.15 36 1 8쪽
316 315화 21.04.14 32 1 9쪽
315 314화 21.04.13 37 1 9쪽
314 313화 21.04.12 70 1 9쪽
313 312화 21.04.11 36 1 9쪽
312 311화 21.04.10 32 1 9쪽
311 310화 21.04.09 85 1 9쪽
310 309화 21.04.08 36 1 9쪽
309 308화 21.04.07 35 1 9쪽
308 307화 21.04.06 38 1 9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