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앨리스는 토끼를 따라 굴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상한 나라에서 환상의 모험을 겪었다.
초등학생 때의 이야기다.
그때 나는 앨리스가 토끼를 따라가는 장면을 보고 그녀가 너무 불쌍하다고 느꼈는데, 그건 굴속으로 들어가 버린 그녀가 만약에 돌아오지 못한다면, 햇빛을 보지 못한 탓에 앨리스가 제대로 크지 못할까 봐 걱정돼서였다.
과학 시간에 배운 식물의 광합성 작용이 사람에게도 꼭 필요한 것인 줄 알았던 시절이다. 태양에 관련해서 아는 과학지식이 막연하게 광합성밖에 없으니 그저 광합성, 광합성 하던 것이기도 하다.
이와 상관없게 앨리스를 향한 감정은 결국 노파심이었던 것으로 결론 났지만.
지금에 와서 나는 차라리 그러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그녀와 다르게 나는 굴 밖으로 던져졌으니까. 내가 살고 있던 이 세계가 굴속이었다고 치자. 굴속에서 사는 게 지겨웠던 게 아니냐고? 아니다. 혈액형을 나누는 것만큼 의미는 없지만 그래도 혈액형을 나누는 것만큼 재미는 있는 게 인생이었거든.
아무튼, 삶에 대해 그럭저럭 만족했다는 소리다. 무엇보다 앨리스를 걱정했을 때처럼 햇빛이 있을지 없을지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나름 괜찮은 굴속이니까.
정말로 걱정해야 했던 건 굴속이 아니라 굴 밖이었다. 굴속에서 햇볕을 쬘 수 있었다면, 굴 밖에서는 그럴 수 없게 될 확률이 아주 높다. 그렇다면 제대로 크지 못하는 것은 굴 밖의 사람들이 된다.
불쌍한 앨리스, 아니, 불쌍한 백나나.
다시 생각해보면 이런 고뇌는 의미가 없게 된다.
사실 어느 쪽이 더 나은지는 생각할 필요도 없는 것 같다. 앨리스가 굴속으로 토끼를 따라간 바람에 이상한 나라를 발견했다지만, 나중의 이야기라 하더라도 결국 거울 속으로 빨려 들어가서도 이상한 나라에 들어가지 않았던가? '거울 나라'도 결국 '이상한 나라'의 한 모습인 것이다.
책의 제목을 본 순간, 문득 나는 거울 속에선 충분히 햇볕을 쬘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모든 게 다 반대라고 해도, 태양의 모양이 다를지언정 태양이 없게 되는 것은 아닐 테니까. 그렇기에 해가 있고 없고는 논제거리가 아니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럼 나는 무엇을 그렇게 곰곰이 생각하였던 거지?
그렇다면 앨리스는 필히 그 이상한 나라로 들어갔어야 할 운명이었다. 경로가 중요한 것은 아니었단 말이 된다. 나의 경우는? 나는 필히 굴 밖으로 던져졌어야 할 운명이었을까? 굴 밖으로든 세계 밖으로든 나는 던져졌어야 하는 운명을 가진 걸까? 경로는 나에게도 문제가 되지 않을까? 애석하게도, 이건 더는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만약 문제로 삼아야 했던 것이 경로라고 친다면, 지금 내게 문제가 되는 것은 오로지, 결론이다.
결론.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으로는 두 가지가 있다. 이상한 나라에서든 이상하지 않은 나라에서든 앨리스는 필히 앨리스여야만 한다는 것이 그 첫 번째다. 어디에 있어도 앨리스는 앨리스다. 앨리스가 아닌 앨리스는 말도 안 된다. 나는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나에게도 앨리스는 어디까지나 앨리스니까.
그리고 두 번째이자 허무하게도 마지막으로 확실한 것은, 백나나는 굴속에서든 굴 밖에서든 필히 백나나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 어느 곳에서든. 정녕 백나나가 백나나이기를 바란다고 해도.
그럼 시작은 어땠지?
나는 나 자신이 죽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것도 무려, 나 자신에게서. 그렇지만, 그 이야기가 만약 실현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자살이 아니다. 명백한 타살이다.
왜냐고?
그야, 백나나는 백나나가 아니니까. 백나나는 백나나를 사랑해도 백나나가 백나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설령 백나나가 백나나를 원망해도 그건, 백나나가 백나나를 원망하는 것이 아니다. 이건 아주 간단하면서도 정말 복잡한 명제가 된다.
다시 처음을 생각해보는 거야.
그래, 앨리스부터.
나는 앨리스가 아니다. 백나나는 앨리스가 아니니까.
앨리스도 백나나가 아니다. 앨리스는 앨리스이며, 백나나는 백나나다.
타인으로부터의 분리,
그 다음은 백나나다.
백나나는 백나나다.
그렇지만 백나나가 곧 백나나인 것은 아니다.
때로 백나나는 백나나가 아니다.
그러나 백나나는 백나나 같기도 하다.
그렇다고 백나나와 백나나가 같은 사람은 아니다.
그래도 백나나는 백나나가 된다.
그래서 백나나와 백나나는 다른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백나나는 백나나가 아니기도 하다.
결국 백나나는······.
아주 거짓된 명제도 없다.
아주 참된 명제도 없다.
그저 나 자신, 백나나 한 명만이 있다.
나는 나 자신이 죽으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것도 무려, 나 자신에게서. 그렇지만, 그 이야기가 실현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진심이 아니다. 명백한 욕심이다.
왜냐고?
나는 여전히 태양에 대해 특별히 아는 게 없다. 내 꿈은 과학자가 아니었기에 특별히 태양이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양에 대해 새로 안 것이 하나 있지만. 그것은 지식의 범주에도 들지 못할 어떤 한 개인의 소견에 불과하다.
그것은 내가 너무 오랫동안 햇빛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제 나는, 내가 제대로 크지 못할 것을 걱정한다.
햇빛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앨리스가 아니다.
그래서 지금 나의 이 걱정이 결국 노파심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없다.
누군가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본다면 앨리스와 나의 상황은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렇지만 누군가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본다면 앨리스와 나의 상황은 너무도 다르다.
여전히 내가 누군가임은 변함이 없지만,
그래도 달라지는 것이 내가 누군가 하는 문제다.
“오랜만이에요.”
초등학생 때의 이야기다.
그때 나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거울 나라의 앨리스》를 다 읽은 후, 그 두 권의 책을 책장의 가장 위쪽에 꽂았다. 아직 키가 다 자라지 않았던 나였기에, 꺼내기 가장 편한 곳은 아니었지만, 경관을 고려한다면 그 자리에 있는 책이 언제나 눈에 잘 들어왔기 때문이다.
과학 시간에는 광합성에 대해 배운 기억이 난다. 이산화탄소와 물, 그리고 햇빛에너지를 이용하는 것이 바로 식물의 광합성 원리였다. 그러면 뒤에 무언가가 만들어진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건 기억에 잘 없다.
지금에 와서야 기억이 나는 것은 하나 있다. 그때 나는 그 단 한 가지를 제대로 머리에 담아두지 못했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아니었지만, 눈치채기에는 어려운 것이었다.
나는 왜 그것을 기억하려고 하지 않았을까?
광합성에 필요한 것은 특정한 빛이 아니라, 빛의 에너지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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