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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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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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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6,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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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2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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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313화

DUMMY

“미안합니다.”


송구해야 할 처지가 아님에도 우현은 적극적으로 사죄에 나섰다. 그는 가슴에 별이 달리기라고 한 것처럼 유달리 숭고하게 행동하면서도 여전히 겸손했다. 따라서 그가 고개를 땅에 파묻듯이 수그릴 때는 그 누구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사과할 사람은 이미 없는걸요.”


도진을 따라 공손하게 굴면서도 어딘가 퉁명스러운 구석이 남아 있는 나나가 지껄였다.


“그래도 미안한 건 진심입니다.”

“그렇게 사과하실 필요는 없다니까요.”


매 순간 감정이 벅찬 듯한 나나가 적극적으로 사양하는데도 우현은 몇 번이고 머리를 조아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래도 진심입니다. 젊은이들의 소중한 시간을 낭비했으니, 반성하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남은 시간을 제대로 살아갈 수 없겠지요.”


가장 쓰리고 시린 날씨를 명약으로 삼키며 모든 것이 시들 무렵의 계절을 맞이한 우현은 보다 초연했으며, 반응에는 느렸으나 적응에는 탁월한 면모를 보였다. 자칫하면 무안해질 수도 있는 상황에서 그는 여전히 자신을 수그리기로 다짐한 것이다.


“따님을 못 찾아드려서 어쩌죠?”


미완결의 과제가 있다면 완전한 해결에 도달하기 전까지 명성과 부가 가져다주는 환상에도 아랑곳하지 않을 만큼 완고하게 근심하며 도진이 물었다. 구슬비가 약간 스치기는 했으나 안으로 쳐들어오지는 않았으므로, 약간의 우울은 오히려 용납되어야 했다.

미닫이문이 벌어진 사이로 마당을 내다보며 우현은 잠시 수심에 잠기는 듯했다. 말이 없는 그를 두고 나나가 도진에게 말을 걸어보려고 했으나, 밖에 던져진 우현의 시선이 튀겨지듯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바람에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다.


“아집이 꺾이고 세월을 받아들이고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보니, 어딘가에서 잘 지내고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존재가 바로 부모가 아닐지 싶군요.”


둘 중 누구와 먼저 눈을 맞추는지 제대로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우현은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는 모습으로써 자신을 낮추고자 그 누구도 하대하지 않았다.


“그래도 소식을 모른다면 슬프지 않을까요?”


그에게 공감하고 싶어도 공감할 수 없던 두 사람이었다. 이는 어쩌면 아직 시간이 그들에게 새로운 자격을 건네주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며, 때로는 기억이 그들에게 몰랐던 시점의 이야기를 상기시켜주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도진이 이 질문을 건넸을 때, 두 사람은 마치 서로가 하나가 되는 듯한 공감대를 형성했다.


“그래서 그동안 많이 괴로웠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듣지 못하는 것보다 더 괴로운 고통이 있다는 것을 이번 일로 깨닫게 되었으니······ 뒷말을 덧붙여봐도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을지 그런 회의감이 듭니다.”


말을 하지 못하는 고통이라면 꿈에서라도 느껴본 적이 있는 나나가 점차 우현을 향해 안쓰러운 눈길을 던졌다. 무릎을 굽히고 앉아 있었기에 다리가 점점 저리는 마당에 그녀로서는 그것이 최선의 위로였다.


“이번 일로 깨달으신 더 큰 고통이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


도진이 직설적으로 물을 때, 나나는 제 발바닥을 연신 누르고 있었다.


“이야기를 할 수 없는 고통입니다.”

“그분이 없더라도 계속해서 작품활동을 이어나가실 수 있는 것 아니었나요?”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고통은 꼭 자신의 경험만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만이 유일한 행운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분을 동정하고 계시는군요.”


도진이 어느 때보다 쌀쌀맞게 발언의 기회를 붙잡자, 우현은 그제야 괴로운 심정을 겉으로 드러냈다.


“그 반대입니다. 나 자신을 동정해야 하는 상황이니까요.”

“과거의 모습 말인가요?”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이건 시간의 문제가 아닙니다.”


동정은 미래를 위한 것이어야 하며 걱정은 과거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애정은 과거를 위하여야만 할지니, 우현은 도진의 가설을 완강히 부정했다.


“자세의 문제입니다.”


그가 뒷말을 덧붙일 적에 나나가 마침 발에서 손을 떼며 앞을 바라보았다.


“한때의 친구를 동정하시는 거라면, 그러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친구라는 관계도 완벽할 수는 없을 테니까요.”


이런 말을 도진이 발설했다는 것에 퍽 놀란 나나가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한때는 친구였지요.”


어딘가에 떠다니고 있을 지난 시절을 부여잡으려는 아련한 눈길을 어딘가에 두며 우현이 막연한 그리움을 음미했다. 언젠가 도진이 승강기에서 죄의식도 없이 떼서 가져온 종이가 그의 옆에 자리하고 있었다. 바람이 강하지 않은 것은 이를 그의 옆에 두기 위한 탓인 것처럼 홍보지는 산들거리면서도 결코 흔들리지는 않았다.


“그런데 친구란 영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부스러기를 쓸어 담듯이 그것을 든 우현이 말을 이었다. “서로에게 서로가 영원할지라도, 관계는 삶을 따라는 편으로 영원할 수가 없지요.”


홍보지에는 두 사람의 이름이 바랜 글씨로 쓰여 있었다. 창작 동아리의 회장이자 부회장이었던 그들은 이제 그 자리를 후대에 물려주었듯이, 친구라는 관계조차 남은 이들을 위해 양보한 듯했다. 그만큼 많은 것이 변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일까, 변색으로 얼룩진 종이는 사연을 간직한 것처럼 글자 하나하나가 그렇게 읽기 힘겨웠다.


“그러니까 이제는 나를 찾아오지 않아도 됩니다.”


두 사람의 가운데를 겨누며 우현이 말했다.


“괜찮으시겠어요?”


정작 그림을 그리는 동안에 그를 찾아온 적 없던 자신이 주제넘게 할 말은 아니라는 것을 안 나나가 입을 틀어막았다.


“괜찮고 말고요. 혼자가 되는 길만이 사는 길이기도 한데 두려울 게 뭐가 있고 어려울 건 또 뭐란 말입니까?”


우현이 짐짓 너털거리며 웃었다.


“그래도 그간의 누명을 벗겨드리는 일은 끝까지 협조하고 싶습니다.”


도진이 두 무릎 위에 주먹을 쥔 손을 가지런히 올려놓으며 말했다.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처음부터 눈치차린 것은 아니다만, 근래에 와서 나를 찾아온 이들이 순전히 그 목적 때문에 나를 찾아오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으니까.”


우현이 나나나 건넨 홍보지를 조심히 접으며 대답했다.


“저, 정말요?”


기존의 소유물을 뺏기기라도 한 것처럼 무척 겁을 내며 나나가 말을 더듬었다.


“안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만, 이 친구가 이런 결정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보다 확신하게 되었지요. 생각보다 복잡한 문제라는 건 알기 쉽습니다. 쉬운 문제라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것이지요.”


그런 나나를 향해 우현이 인자하게 웃어 보였다.


“그런데 왜 가만히 계셨던 거예요?”


나나가 몹시 다급하게 물었다.


“꿈이 있기 때문입니다.”

“꿈이요?”

“꿈을 꾸는 자는 먼저 잠을 청해야 하듯이, 이루고자 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견뎌야 했습니다.”

“그게 뭔데요?”


그런데 우현은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느린 속도로 반응한다.


“딸아이의 안녕이겠지요. 그 애가 기댈 구석이 있다면, 그게 내가 아니더라도 좋을 것 같단 생각을 이번에 처음 가지게 되었습니다. 내가 이토록 어리석었다는 걸 진작 알았으면 좋았겠지만, 그렇게 욕심을 따지다가 보면 끝이 없을 테지요.”

“그럼 이번엔 욕심을 버리신 거예요?”

“예, 그 아이가 그렇게 좋아하던 그림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하니 이제는 인정해야만 합니다.”

“뭐를요?”

“그 아이에게도 꿈이 있다는 걸 말입니다.”


중요한 건 빠르기가 아니었다. 비로소 핵심이 되는 것은 깊이였다. 얼마나 깊은 잠을 잤는가. 그것이 바로 수면의 질을 결정하듯이.


“그림을 사랑하는 아이였으니 이 단어를 빼놓고 말할 수 없겠군요.”

“그림을 그리려고 했던 건가요?”

“한때는 그랬지요. 하지만 이제는 모릅니다. 계속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으로 들리기는 했지만, 그리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게 그림에 대한 꿈이라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왜 그런데요?”

“글 역시 그렇기 때문이지요. 비록 듣는 것, 읽는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으나 그래도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간절한 꿈이지요. 높은 곳을 바라볼 엄두를 내지도 않으면서, 높은 곳의 경지를 잘 알고 있으니.”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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