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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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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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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01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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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26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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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7화

DUMMY

황호의 시선에는 약간의 분노가 서려 있었지만, 이는 동체(胴體)에 대한 감정이라기보다는 그 주위를 배회하는 흉과 허물에 대한 회한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장중한 침묵은 그의 분노를 더욱 신중한 것으로 바꾸어놓았다.


“미친 짓이었다고나 할까.”


흑석이 뒤늦게 그의 말을 거들었다.


“맞아, 그건 미친 짓이었어. 제 목숨을 챙겨도 모자랄 판국이었는데, 무엇 때문인지도 모를 만큼 그 애는 의심스럽게 행동했던 것이지. 그리고 그 의심이 온전한 의심이 돌 수도 없게끔 수상한 일을 꾸몄던 것이고.”


황호가 힘을 잃어버린 투로 말했다. 그런데도 그는 눈물을 멈추지는 않았다. 마치 눈물이 흐르는 길만이 유일하게 슬픔이라는 감정을 갖고 지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수상했던 건 아니야.”


그와 대비될 만큼 정정을 위한 녹수의 어조는 강했다.


“아니, 내 눈에는 충분히 수상했어. 그 애가 누구를 죽이려고 하고 또 누구를 살리려고 하는 건지 도대체 분간할 수 없었으니까. 심지어는 살고 싶어 하는지 아니면 죽고 싶어 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어. 그 애에게 삶과 죽음은 하나였던 거야. 원래부터······ 원래부터 삶과 죽음은 우리에게 있어 하나였지만. 삶과 죽음이 비유를 넘어서서 정말로 하나가 되었을 때 삶이 죽음이 되고 죽음이 삶이 된다는 것까지 이해할 수는 없었던 것이지. 아니, 이해하기 싫었던 것일 수도 있어. 우리는 여전히 우리들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조차 힘들어하잖아.”


이번에는 자신을 바라보는 황호의 태도에 태강이 깜짝 놀라서 딸꾹질하듯이 이상한 소리를 내고 말았다. 자책과도 같았던 경련은 금방 그쳤고 후회와도 같았던 비명은 얼른 속으로 삼켜버렸기에 누구에게도 방해가 되지 않고 조용히 넘어갈 수 있었다. 한데, 그는 자신이 죽음을 두고 했던 만행이라는 사실까지 숨기려고 들지는 않았다. 태강이 어떤 소리도 내지 않으려고 스스로 입을 막았던 데는 그 어떤 진실도 덮으려고 하지 않은 의도가 있던 것이다.


“그런데 더 중요한 건 나 자신이더군.”


흙을 한 줌 쥐어 보며 황호가 말을 이었다. 그는 누구도 자신의 말에 대꾸하지 않자 허탈하게 웃기까지 했다.


“중요한 건 나 자신이었어. 내가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슬픔을 간직하고 있던 것일까? 난 그걸 잊어버리고 말았어. 시간이 너무 오래 흘러서도 아니야. 너무 많이 슬퍼해서도 아니야. 단지······ 나는 말이지. 단지, 너무 오래 슬퍼했던 것이야. 아주 슬픈 자에게 눈물은 길이 되지만, 너무 오래 슬픈 자에게 눈물은 무덤이 되니까.”


그는 손을 털지 않은 채로 일어났다.


“그렇다면 황호는 단 한 번의 삶을 두고도 수없이 많은 죽음을 겪었을 듯합니다.”


달목이 그에게 외경의 눈길을 던지며 말했다.


“그랬지. 정말로 죽음은 내 삶 그 자체였어.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면 오직 죽음만이 나의 친구가 아니었나 싶어. 비록 죽음은 인간의 감정이 아닌지라 성인도, 인간이라고도 할 수 없지만······ 그걸 뛰어넘는 무언가가 바로 죽음이라고 여기면서 말이야.”

“신 말인가요?”


도진이 이상하게도 나나를 쳐다보며 황호에게 질문을 던졌다.


“······신이라! 신이라고 해도 좋을 테지. 하지만 세계에서 부르는 신의 개념과는 다를 것 같군. 아니면 어리석은 인간들이 부르는 신이라고 해야 할까! 그들이 떠드는 이야기는 들을 만한 건 못 되지만, 우습게도 참고할 만한 건 되거든. 그들은 신과 성인을 구분하지도 않을 테지. 상관은 없어. 어차피 월계는 신을 믿지 않는 자들의 곳이니까. 그러니까 세계의 인간들보다는 더 현명하다고 해야겠지. 적어도 신은 금기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신이 금기라는 건, 신은 피해야 한다는 것인가요?”

“그래. 신은 피해야만 하는 것이야. 피할 수 있으면 피해야 하는 게 바로 그런 것이라고. 피해야지만 지킬 수 있는 게 절대적인 것이야. 절대적인 개념, 진리라는 것도 피해야지만 비로소 지켜질 수 있지. 죄를 피함으로써 법을 지키는 것처럼. 그건 인간이 상대적인 존재이기 대문이 아니야. 그런데, 그런데 내가 말하려던 건 이게 아니야. 왜냐면 중요한 건 나 자신이었으니까.”


황호는 제 손에 무엇이 묻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래서 도대체 돌아오려고 한 이유가 뭐니?”


초영이 결국에는 앞으로 나와서 그의 손을 함께 들여다보며 물었다.


“그 애의 시였어.”


황호가 낮게 속삭였다.


“시? 시였다고? 그 시집을 말하는 거니?”


이에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초영은 큰 목소리로 한 번 더 물었다.


“아니. 그건 처음 들어보는 시였어. 그리고 기록되지 않은 시였지.”


초영에게서 자신의 손을 감춘 그가 이내 뒷짐을 지며 태강을 바라보았다. 마찬가지로 입을 막음으로써 자연스레 순간을 넘기려고 했던 태강이었지만, 초영의 예리한 눈초리와 성미를 견디지 못하고 지금은 이야기를 술술 불어야 하는 처지에 놓인 그였다.


“그럼 분명히 그 애가 쓴 시겠네?”


태강의 행동 변화에 주시하며 초영이 날카롭게 물었다.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


황호는 기운이 없는 사람처럼 중얼거려서, 도저히 고자질하는 이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이미 알고 있었니?”


이미 질문의 대상은 바뀌어 있었다. 초영이 자신에게 다가오려고 하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는 태강이었어.


“도대체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거니? 아니지, 이걸 물어볼 게 아니야. 왜 너만 알고 있었니? 그리고 왜 우리한테 그 시에 대해서 말하지 않은 거니?”

“그, 그게 말이지.”


말을 더듬는 데도 일정한 양의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생전 처음 느끼는 듯한 생경한 경험이었다.


“말하지 않으려고 한 건 아니야.”


더는 초영이 자신에게 다가오지 못하도록 손을 내저으며 태강이 빠르게 변명했다.


“그럼 뭐니? 말하지 않으려고 했다는 건, 말하려고 했다는 뜻이잖아.”

“응. 그렇지, 그런데, 그러니까 말을 하려고 했었어.”

“그러니까 왜 이때가 되도록 아직도 말하지 않았냐고 묻는 거잖아.”

“그야 때가 아니니까 그렇지.”


태강은 계절만 허락하여 주었더라면 아마 땀을 흘렸을지도 모를 만큼 당황한 눈치였다. 그에 반해 초영은 계절에 완벽히 어울릴 정도로 쌀쌀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실은 태강에게 섭섭한 마음이었지만, 이를 표현하는 과정에서 태강의 입장에서 약간의 왜곡이 더해졌던 셈이다.


“때가 아니라니?”


‘시’의 언급에 흥미롭게 듣고만 있던 흑석이 질문을 덧붙였다.


“아무래도 어떤 때가 또 있을 예정인 것 같군.”


야담이 무심한 혼잣말로 모두의 호기심을 부추겼다.


“아니, 어떤 때가 아니야. 있을 예정이긴 하겠지만, 그렇게 예정이라기보다는 언젠가 오고야 마는 때라고 해야 할까나?”


태강이 자신이 없는 어조로 말했다.


“그럼?”


코앞까지 다가온 초영이 뒤로 몸을 내빼려는 태강의 어깨를 거세게 쥐며 물었다. 그녀는 대답 그 이상의 진실을 강요하고 있었다.


“백나나가 돌아갈 때 말이야. 그때까지 비밀로 두려고 했던 거야.”


태강이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으며 간신히 대답했다.


“제가 돌아갈 때라고요?”


그 누구보다 경청하는 자세를 유지하고 있던 나나가 놀라서 이제는 자신보다 약간 뒤에 서 있는 태강에게 외쳤다.


거의 울먹거리듯이 태강이 대답했다. 그의 파묻힌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무척 일그러져 있을 게 뻔했다.


“아아, 진짜, 이번에는 제대로 해보려고 했는데 말이지.”


그러나 그의 투정이 무색해질 만큼 다른 이들은 상당한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도대체 어떤 것이길래, 고작 문장 몇 개로써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단 말인가. 그것도 슬픔에 잠겨 있던 성인의 마음을 말이다.


“진짜 어쩔 수가 없어. 나는 왜 이 모양인지 모르겠다니까.”


그런데도 태강은 홀로 초연히 투덜거리기만 하며 이제는 때가 다가온 것 같다고 어렴풋이 짐작해보기도 했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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