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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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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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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1.04.25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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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326화

DUMMY

“잠깐만, 내가 뭘 가졌는지 그걸 아직 이야기하지 않았어.”


그런 그녀를 다급하게 붙잡은 황호가 물었다.


“그건 앞으로 네가 할 이야기에서 드러나게 될 거야.”


분노란 안달에 붙잡히는 법이 없었다. 이미 그 자체로 사람을 성급하게 만들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녹수는 황호의 기대를 저버리며 그렇게 그대로 마지막을 그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느닷없이 이른 아침을 맞이한 것처럼 멀뚱히 눈을 깜빡거리는 황호는 사실을 현실과 구분하느라 당분간 어떤 말도 덧붙이지 못했다.


“기다릴 수 있어.”


항복을 외치는 양 두 손바닥을 내보이며 태강이 중간에 외쳤다. 그는 마치 참을성이 없는 이들을 달래려는 듯이 보였지만, 정작 황호의 이야기를 가장 기다리는 사람은 자기 자신뿐인 것 같음을 알아챘다. 왜냐면 모든 이가 그런 기약 없이도 그저 때가 이르기만을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말이 나온 김에 네가 먼저 해야 할 말 좀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흑석이 기다림을 지루하지 않게 만들만 한 이른바 요법을 찾아냈다.


“내가? 내가 뭘 말해야 하는데? 내가 말할 게 있나? 황호가 말하려면 오히려 내가 입을 다물어야 하는 거 아냐?”

“그거야 모르지. 하지만 네가 황호를 다시 심연도에 데려온 이상, 만약 황호가 끝까지 입을 다문다면 너에게도 일정한 책임이 있다는 걸 부정할 순 없을 거야.”

“도대체 왜? 헐, 어이가 없네! 누구라도 어차피 해야 하는 일은 이 태강 님이 드디어 해낸 것을 두고 그 책임까지 나한테 물으려는 거야?”

“당연하지. 네가 황호를 데려온 거잖아.”


어깨를 으쓱거리며 태강은 끝까지 흑석의 강요를 거부하려고 들었다. 자신이 황호의 이야기를 거드는 것은 의무도 아니었거니와, 웬만하면 정말 그를 위해서라도 기다려주고 싶었다. 그러므로 그는 시위를 행사하듯이 입을 굳게 다물고 고개를 격하게 저어도 보았다.


“내 생각엔, 네가 먼저 입을 열어야 황호도 제대로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런데 하필 주화가 발뒤꿈치를 살짝 들면서 은근히 태강이 먼저 나서기를 부추기고 말았다. 모질지 못한 그녀까지 나선 마당에 태강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고민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다가 옆을 돌아서 나나를 바라보았을 때, 나나까지 멀뚱히 서서 자신을 지켜보기만 하니 자신에게 돌파구가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태강은 결국 항복을 선언하는 의미로 자신이 황호 대신에 기꺼이 말머리를 떼기로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좋아. 그런데 뭘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뭘 말해야 할까? 아무 말이나 해도 된다는 거야?”


그러나 처음부터 갈피를 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니, 그럴 필요는 없어. 어차피 내가 말할 거니까.”


그때 황호가 그림자의 위치가 돌연 뒤에서 앞으로 바뀌는 것처럼 나섰다. 태강은 저도 모르게 가슴을 쓸어내리며 평온하게 불안감에 못살게 굴던 입술을 가만히 두기 시작했다.


“우선 내가 이곳에 돌아온 까닭부터 밝혀야겠지. 희한하고도 신기하단 말이야. 내가 못 올 곳에 이른 것도 아닌데, 나는 어디를 가든 언제나 그 목적과 이유가 있을 거라고 여기며 사람들은 내게 해명을 요구하지. 모두가 그래.”


이왕 흐트러진 배열에 황호는 움직이기를 더는 두려워하지 않으며 나무 앞으로 몇 걸음 다가서며 말을 이어나갔다.


“나는 내가 있어야 하는 곳에 있는 것뿐이지. 정녕 그 이유를 모른다고 하더라도, 자기 자신이 슬픔을 모르는 것이기만 한데, 다들 호들갑을 떨면서 슬픔이 자기 자신을 모를 것으로 생각해. 나는 그런 인간들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기 위해서 그들이 직접 눈물을 흘리도록 하지. 많은 이들이 시련이라고 부르는 기회를 말이야. 눈물만이 아니라 콧물까지 쏙 뺀다고들 우습게 떠들고는 하지만, 차라리 그 정도로만 여겨도 다행일 거야. 내 기대와는 다르게 나를 원망하는 인간들이 정말 많으니까.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있어야 할 곳에 있는 것뿐이야.”


그는 쓰러지듯이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럼으로써 더 높아진 하늘에 대고 그는 주저하지 않고 계속 자신의 속마음을 고하려고 작정했다. 구름은 하필 가지로 쳐진 그물 너머에서 서서히 흘러가고 있었다.

그 하얀 풍경에도 엄연히 색이라는 것이 존재해서 더 흰 부분이 있는가 하면 희끄무레해서 눈앞을 지나가고 있는지 잘 확인할 수 없을 만큼 희미한 부분도 있었다. 그의 시선이 어느 쪽에 닿았을지는 직접 묻기 전에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그동안 켜켜이 쌓인 먼지와도 같았던 겹설움이 하나둘씩 순리에 맞게 풀어져서 그곳에 이르기를 바라는 마음은 천일나무를 둘러싼 이들이 모두 갖고 있었다.


“아, 나는 이제 너무 늙었어. 하필 내가 너무 늙을 때! 내가 조금만 더 젊었어도, 내가 조금만 더 슬프지만 않았어도!”


황호는 애원하듯이 혹은 원망하듯이 땅을 쳤다.


“하지만 난 슬플 수밖에 없는 운명이야. 그래서 나는 이곳에 내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걸 알았어. 그래, 이건 백면이 먼저 느낀 것이겠지. 그 애는 심연도에 계속 머무르다가는 이곳 전체를, 월계 전체를 망가뜨리게 될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어서 자발적으로 떠난 거였어. 그래서 난 꾹 참고 또 참다가 결국에는 백면을 따라나서게 되었지. 그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슬픔이었으니까. 존재보다도 견디기 버거운 것이 존재의 슬픔이라니까! 존재는 덧없어. 하지만 더 허무한 건 그 슬픔이었어. 그 여자가 느꼈던 그 상실감은 난 고스란히 전해 받았고, 내 뼈가 내 살을 대신하려고 밖으로 나오는 것 같은 고통을 느껴야만 했지. 그건 억지였어. 억지! 뼈는 살이 될 수 없고, 살도 뼈가 될 수 없지. 하지만 그 억지만큼 분한 것도 없고, 그 억지만큼 서러운 것도 없었지.”


이내 그는 바닥에 주저앉더니 조금씩 눈물을 흘린다.


“그 세월을 어떻게 다 정리해서 말할 수 있을까? 인간은 시간을 정리하려고 하지만, 끝끝내 자기 마음 하나도 제대로 치울 수 없는 존재라니까. 그래도 나는 떠나야 했지. 백면이 떠나야 했던 것처럼! 무엇도 치울 수 없다면 나 자신을 치워버리면 되는 일이야. 그 누구도 그런 결정을 두고 희생이라 불러주지는 않지만, 뭐가 되었든 좋았을 거야. 백면 역시 그렇게 생각했겠지.”


황호는 눈물을 전혀 닦지 않았다. 턱에서 맴돌던 눈물 몇 방울이 손등에 떨어져도 그는 가만히 있었다.


“억울하기도 해라. 그렇지, 억장이 무너지도록 억울할 수밖에! 살기 위해서 죽는 인간들을 너희가 과연 이해할 수 있을까? 아마도 없을 거야. 그래, 전혀 없을 거라고. 왜냐면 너희는 삶을 위한 감정을 위해서 존재하니까. 하지만 나는 죽음을 위한 감정을 위해서 존재하지. 그리고 그 감정이 나야. 나는 슬픔과 나를 분리할 수 없어. 슬픔이 곧 나니까. 그러니까 난 곧 죽음과도 다를 바가 없었지. 죽을 수 없는 고통! 그것만이 진정한 죽음이라는 걸 알고 있을까? 그러니까 두려워할 건 죽음이 아니었지. 두려워해야 하는 건 견딜 수 없는 삶일 테니까.”


이제 정말로 그는 울고 있었다.


“그래도 난 이해하려고 노력했어. 백면이, 그리고 그 여자가 왜 그렇게까지 비극적인 결말 속에서 서로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했지. 나는 백면을 구해내고 싶었을 뿐이야. 그 애가 이제 평범한 인간에 가까워졌을 때도, 그 애를 노력하기 위해서 시집을 구하고 또 구하고 다녔지. 그 안에 해답이 있을 거라고! 그래도 노력이 헛되기만은 하지 않더군. 몇 가지 정보를 어느 정도 얻기도 했지. 하지만 그게 다였어. 왜냐면 그 애는 여전히 멋대로 행동하고 다녔으니까. 자기 처지는 생각하지도 못하고 말이야. 그러더니 자기 내생을 조금씩 챙기고 그러더군.”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황호는 도진과 나나가 있는 쪽을 눈물로 얼룩진 얼굴과 다르게 또렷한 시선으로 겨눴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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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8 317화 21.04.16 33 1 9쪽
317 316화 21.04.15 37 1 8쪽
316 315화 21.04.14 33 1 9쪽
315 314화 21.04.13 38 1 9쪽
314 313화 21.04.12 72 1 9쪽
313 312화 21.04.11 37 1 9쪽
312 311화 21.04.10 33 1 9쪽
311 310화 21.04.09 85 1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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