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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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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최근연재일 :
2021.05.01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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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286,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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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1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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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312화

DUMMY

주변의 지친 표정을 보더니 남자는 더는 지켜만 봐서는 안 된다는 판단에 무릎을 구부려서 초영 앞으로 갔다. 그렇게 해서 눈높이를 맞추어 봤지만, 그럴수록 초영은 더욱 서글퍼했다. 그 앞에서 평소의 그녀를 따라 웃었으나 애달프게도, 미소의 온도는 너무나 달랐다. 이 차이로 인해 서로를 더욱 외면해버린 탓에 남자는 오래도록 웃음기를 머금을 수 없었다. 그 역시 진심에서 지어본 표정은 아니었기에 버틸 힘 같은 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럼 이건 어때?”


힘겹게 태강의 팔에 기대어 쓰러지는 초영을 보며 남자가 최선을 다해 올차게 제안했다.


“뭐 말이야?”


입을 움직일 기운도 없어 보이는 초영의 처량한 자태에 태강이 얼굴을 구기며 대신 반응했다.


“대화를 해보자.”


남자가 곧게 편 두 손을 공중에 정갈하고 힘있게 내려놓으며 말했다.


“지금까지 한 건 대화가 아니었단 말입니까?”


달목이 남자의 등, 혹은 양심을 찌르듯이 가시가 돋친 말로 물었다.


“아니, 대화였지. 하지만 이렇게 다 같이 뭉쳐서 하는 대화 말고 일대일로 진솔한 대화를 나눠보자는 말이야. 그렇게 된다면 초영, 너도 내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거야.”

“이해하지 못해서 이러는 거 아니야. 이해하기 싫어서 그런 거야.”


초영이 애꿎은 태강의 팔을 밀치며 일어섰다.


“그러지 마. 그게 바로 슬픔이라는 거야.”

“기왕 말할 거면 고집이 더 어울리지 않니?”

“그러기도 하겠지. 하지만 고집도 결국에는 널 슬프게 할 뿐이니까.”


남자가 어깨를 연신 으쓱거리며 일어섰다. 자연스레 그를 올려다보게 된 초영은 한동안 그의 무표정을 가만히 구경했다. 그러다가 남자가 처음으로 눈을 감을 즈음에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좋아. 대신 내가 제일 먼저 대화할 거야.”

“좋을 대로. 얼마든지.”

“정말로?”

“오히려 영광이지.”


남자가 보폭을 넓히며 좌우로 걷더니 주화가 자리를 비켜주자 서둘러 초영 옆에 앉았다. 마지막으로 태강이 마음에 차지 않은 듯한지 언짢은 얼굴로 일어날 때까지도 남자는 자신을 다소 두렵게 바라보는 초영을 향해 싱그레 웃었다.


“잘 지냈니?”


모두 시야에서 사라지게 되었을 때는 막상 그 누구도 상대에게 자신을 대어 보지 못하며 망설였다. 그야말로 정적에 휩싸인 때였다. 이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초영이 던진 말에 남자는 민망한지 웃음을 참는 소리를 내었다.


“왜 웃니?”


그제야 그의 얼굴을 다시 똑바로 마주하며 초영이 짜증을 냈다.


“그 말이 웃겨서. 넌 그런 걸 물어볼 필요가 없잖아.”

“그래도 물어보는 건 내 마음이야.”

“왜? 내가 어떻게 지냈는지는 내 기억이 말해줄 텐데.”


남자는 그 짜증의 원인을 알고 싶어서 더욱이 그녀의 신경을 거스를 만한 빈정거리는 말투로 물었다.


“기억이 모든 걸 말해주는 것 같아도 단 한 가지는 말해주지 않아서 그래.”

“그게 뭔데?”


속내를 다 알면서도 사람을 떠보는 쪽은 남자라는 확신이 들자 초영은 대답하기를 망설였다. 일부러 그가 자신을 곤란하게 만들고 있다고 생각해서다.


“지금의 네 생각. 그건 말해주지 않거든.”

“나의 현재가 그렇게 중요한가?”

“중요하지. 나한텐 너의 미래보다 더 중요해.”

“그럼 나의 과거보다도 중요하다고 봐?”


그러나 공세는 지나치리만치 온풍이었기에 바람받이 속에 있으면서도 그녀는 쉬이 투덜거릴 수 없었다.


“모르겠어. 넌 어떻게 생각하는데?”


정답이 하나만 있을까. 가는 방향과 오는 방향을 구분하여도 바람은 바람인 것처럼 말이다. 나는 단지 복수로 처리되는 정답 중에서 네가 어떤 것을 선택했는지 알고 싶은 것이다. 초영의 물음은 반달처럼 반쯤 희미하게 남자에게 다가왔다.


“아무래도 좋을 것 같은데.”

“그건 너무 무성의한 대답 아니니?”

“정말이야. 나는 이전에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없을 테니까 말이야.”

“지금 내 옆에서 버젓이 말하고 있잖아.”


두 사람은 불필요한 언쟁을 줄이기 위해 잠시 감정을 소멸시킬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었다. 그러므로 팔과 팔 사이, 아주 작은 틈은 침묵의 자리였다.


“미안해.”


더는 자존심을 내세우고 싶지 않던 초영이 자신이 졌다는 얼굴로 말했다.


“뭐가?”


반면에 남자는 그 말의 근원지를 찾을 수 없다는 듯이 매우 당황했다.


“그때 너의 사랑을 알아주지 못해서 말이야.”


하지만 단 하나, 없는 자존심보다도 더 들키기 싫은 건 수치심이었다. 지레 표정에 힘을 들인 초영이 가까스로 얼굴에서 부끄러운 감정을 거두며 대답했다.


“아냐, 난 널 원망하지 않아.”

“내가 나를 원망해서 그래. 내가 그때 너희를 도와주기만 했어도 모든 게 달라졌을 거잖아. 그게 내내 마음에 걸렸어. 아니, 목구멍에 걸렸다고 하는 게 좋으려나? 무슨 말을 하려면 그 기억이 되살아나서 함부로 말을 할 수 없게 되었거든.”


자신의 긴 목을 쓰다듬으며 초영이 무조건 앞쪽을 바라만 보았다. 남자의 오롯한 시선이 느껴지기에 일부러라도 뻣뻣하게 행동하고자 결심한 듯하다.


“이상해. 너답지 않으니까 그러지 마. 네가 과거를 보는 건 그간의 감정을 확인하기 위해서지, 그 안에서 감정을 느끼기 위해서가 아니잖아. 뒤를 뒤돌아보더라도 시간을 뒤돌아가지는 마.”


남자가 진심으로 걱정되는 양 사뭇 낮은 목소리로 당부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어. 사랑이니 뭐니 떠들어놓고 정작 나는 누군가의 진심을 알아주지도 않았잖아.”

“그럴 수밖에 없지. 사랑은 늘 진심일 수밖에 없으니까. 삶에 있어 진실한 것 단 하나를 찾으라고 한다면 나는 사랑을 꼽을 거야. 진심이야. 사랑은 결과가 아니잖아. 그렇지? 그래서 나는 초영, 너를 탓하지 않아. 한때는 그랬겠지. 그런데 이제는 아냐.”

“정말이야?”


남자가 당찬 고갯짓을 보였다.


“그러면 왜 그런 선택을 하려는 거야? 난 정말로 너를 모르겠어.”


초영이 그와는 다른 각도로 느릿하게 남자의 두 볼을 자신의 손바닥으로 감쌌다.


“선택한 게 아니야. 나는 그렇게 태어난 거야.”

“그렇게 태어났다니? 너는 허무를 다스릴 뿐이지, 허무 그 자체가 아니잖아.”

“아냐. 그게 말이 안 되는 거야. 허무는 다스릴 수도 없는 허무 자체여야 해.”

“그래서 정말로 죽겠다는 거니?”


이윽고 눈물이 터지려고 하길래 초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가 손을 떼어 자신의 얼굴로 가져가기도 전에 반대편에 있던 남자가 재빨리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응. 그러니까 나를 놓아줄래?”

“그건 널 도와주는 게 아니잖아.”

“말도 안 돼. 그거야말로 날 도와주는 길인데!”


남자는 빛에 반사되어 반짝거리는 제 손의 눈물을 보며 감탄했다.


“어째서? 너야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잖아.”


침을 삼킨 건지 눈물을 삼킨 건지 모를 만큼 초영이 벅차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 난 그대로 있을 테니까.”

“네가 어떻게 그대로 있을 거라는 거야?”

“초영.”


아직 마르지 않은 눈물을 제 얼굴에 조금 묻히며 남자가 초영을 불렀다.


“난 없는 것 자체로 있는 것이야.”

“그게 뭔데?”

“바로 허무지, 뭐긴 뭐야.”


그러자 그는 곧 우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제발, 넌 허무가 아니라니까.”

“알아. 그래서 허무를 느끼는 인간들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도우려는 거야.”

“네가 살아서 도와야지, 어떻게 죽어서 돕겠다는 거니?”

“걱정하지 마. 난 그대로 있을 거라니까.”


어쩌면 울음을 참고 있었는지 남자는 갑자기 초영을 끌어안으며 그녀를 달래기 시작했다.


“어떻게 그대로 있는데?”


그 품을 뿌리치지 않은 채 초영이 물었다.


“나다운 나, 나답지 않은 나, 나일 수가 없는 나, 나일 수밖에 없는 나, 나를 사랑하는 나, 그리고 나를 두려워하는 나······ 그렇게 나는 나를 남겨두었거든.”

“네 내생을 말하는 거야?”

“그래. 그러니까 나를 놓아줘야 해. 그게 초영 네가 할 일이야.”

“내가 왜 그래야 하는 거니?”


포옹을 끝내며 초영이 남자의 가슴팍을 밀쳤다.


“그게 사랑이니까.”


아아, 사랑이여. 너는 오기를 거부하면서 늘 가기만을 반복하는구나. 하루가 꼭 그러하듯이, 세월이 그러하듯이 사랑아 너는 늘 가기만을 하는구나. 그러니 기억은 나의 몫이겠지. 초영은 최대한 울지 않으려고 눈을 감아버렸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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