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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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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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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01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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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6,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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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0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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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311화

DUMMY

더는 기대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기대는 실망이라는 이름의 껍질에 불과했다. 아무리 기다리고 기다려도 남자는 돌아오지 않았다. 도진을 부추겨서 심연도의 사정을 파헤치기도 했지만, 애초에 그곳을 떠난 남자가 그 섬으로 돌아간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쌓아둔 그림을 비워낸 방 가운데에 우두커니 서 있으니, 나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을 빼앗긴 것과도 같은 풍경이었다.

남자를 기다리는 동안에 사과는 윗부분이 조금 썩었다. 먹기 위한 사과가 아니었으니 아무래도 좋을 일이었다. 밖으로 나오니 도진의 방문이 열려 있었다. 호기심은 얼마나 좋은 핑곗거리던가. 나나는 까치발로 총총히 걸어서 마침내 그 안으로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뭐 해요?”


그러다가 도진이 자신의 바로 뒤에서 추위를 몰고 오듯이 낮고 서늘하게 속삭이는 바람에 그녀는 기겁하고서 그를 코앞에서 마주쳐야 했다. 도둑은 아니었지만, 오히려 도둑이 아니었기에 억울해서 제대로 눈을 맞출 수 없었다.


“그, 그냥 궁금해서.”


시선 처리가 훌륭하지 못한 탓에 진심마저도 거짓으로 들릴 정도다.


“희한하네요.”

“뭐가?”

“남의 속보다 남의 방이 궁금한 사람은 잘 없잖아요.”


그렇다고 해도 진심은 말로써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기에 이미 나나의 속셈을 알고 있던 도진은 여유롭게 웃었다. 그리고서 먼저 안으로 들어와 나나에게 들어오라는 손짓을 건넸다.


“글을 계속 쓰고 있는 거야?”


안을 제대로 둘러볼 틈도 없이 나나의 주의를 끄는 것은 널찍한 고목나무 책상이었다. 그 위에 널브러진 책은 모두 입을 다물지 못한 채로 겹겹이 포개져 있었다. 그가 글을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는 흔적은 쉬이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산을 이루고 있던 것이다. 그래도 이 많은 종의 책을 한꺼번에 펼쳐놓는 일은 예사롭지 않기에 나나의 질문은 순전히 우발적이라고만 여길 수 없었다.


“아마도요.”


방문을 닫으며 도진이 대답했다.


“아마도라니? 쓰면 쓰는 거고, 아니면 마는 거지.”

“이야기하기 어려워요. 그런 일이 있었던 만큼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거든요.”

“그 사람이 없으면 진실을 말하기 더 쉬워지는 거 아니야?”


왜 갑자기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는지 나나는 알 수 없었다.


“······그럴 줄 알았는데 막상 시간이 흐르고 보니까 아니더라고요.”


도진은 관자놀이를 긁적이면서 자신이 한 대답에 여전히 회의적이었다.


“어째서? 이제 거짓말할 필요는 없는 거잖아.”

“그래서 그게 문제더라고요. 진실이 뭔지 모르거든요.”

“말도 안 돼.”


책 한 권을 든 나나가 그 내용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정말이었다. 무슨 내용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그녀는 먼지를 털어내듯이 책을 도로 내려놓았다.


“정말이에요. 그래서 그분의 따님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게 되어버렸거든요.”


죽은 자의 소식을 들었을 때 우현이 지었던 피 마르는 표정을 떠올리며 도진이 말했다. 나나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자신이 섣불리 생각했다는 것을 깨닫고, 실수를 들키지 않게끔 얼른 자신이 만지작거리던 책을 한 군데에 자연스레 펼쳐놓았다. 도진이 연신 목덜미를 매만지는 통에 다행히 그 수작은 들키지 않았던 듯하다.


“그걸 완전히 잊고 있었네. 전혀 방법이 없는 거야? 뭔가 연락을 주고받고 그러니까 어디에서 지내고 있는 건지도 알 텐데.”

“모르겠어요. 교수님도 단서가 나오면 바로 알려주신다고 했지만······ 완전히 감감무소식이에요.”

“그럼 전혀 가망이 없는 거야?”

“지켜봐야 알겠죠. 그런데 나나 씨도 요즘 오매불망 뭘 기다리는 것 같던데요?”


도진이 화살의 방향을 바꾸자 나나는 당황한 몸짓을 보이며 입을 다물어버렸다.


“내가 말이야?”


자신의 얼굴을 가리키며 나나가 말했다.


“전시회를 기다리는 거예요?”


의구심이라는 것이 일부러 과녁을 빗나가게 두며 도진이 더욱 구체적으로 물었다.


“설마. 그럴 리가. 아니, 기다리는 건 맞는데 말이지. 꼭 기다린다고는 할 수 없어. 들통이 나버릴까 봐 조마조마하거든. 그런데 기다리는 건 맞아.”


한 번의 말에 몇 번의 부정이 있었는지, 그리고 그에 걸맞게 긍정은 몇 번이나 있었는지 추측도 할 수 없어진 나나가 고개를 몇 번이나 흔들며 답했다.


“말이 안 되는 말은 나나 씨가 한 것 같은데요.” 책상 뒤에 놓인 의자에 앉으며 도진이 말을 이었다. “그렇게 숨길 필요는 없어요. 나나 씨가 백면을 기다린다고 해서 이상하게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요.”


나나는 그가 있는 곳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면서도 옹졸한 불안을 쉽게 떨칠 수 없었다.


“그리고 아마 백면이 안 오는 데는 이유가 있을 거예요.”


나나가 건드렸던 책을 정확히 집으며 도진이 말했다.


“어째서?”


자신이 수습했던 장을 아무렇지 않게 넘기고서는, 본래 펼쳐져 있던 장으로 제대로 돌아가는 도진의 손놀림을 지켜보며 나나가 물었다.


“나나 씨가 무엇 때문에 백면을 기다리는지는 나도 대충 짐작할 수 있다지만, 백면이라면 보다 정확하게 나나 씨의 생각을 다 읽을 수 있을 거 아니에요.”

“그렇네.”

“그런데도 오지 않는 건, 본인의 선택이겠죠.”


의문을 해결해낸 도진이 호방한 미소를 보이며 책을 공중에 들었다.


“궁금하면 읽어줄까요?”


나나는 도진이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것을 단번에 눈치챘다.


“전혀.”


이제 이 방에 궁금한 건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러니 머물 이유가 없다고 여긴 그녀는 자신의 거절이 도진의 귀에 제대로 꽂히기도 전에 자리를 뜨려고 발을 움직였다.


***


울음이 터진 곳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은 분수대를 지나칠 때마다 끌려가는 시선을 제어하지 못하듯이, 모두 이따금 무리가 있는 곳을 쳐다보며 지나갔다. 멈춰 서서 상황을 지켜보는 이들까지 있었으나 다큰 어른이 울고 있는지라 나중에는 더욱 궁금해하는 얼굴로 돌아서서 떠났다.


“그만 좀 울어.”


제 옷가지를 가져다가 눈물이며 콧물이며 닦고 있는 초영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며 태강이 말했다. 떨어지려고 하면 더 격렬하게 들러붙는 찰거머리 같은 그녀의 행동에 백기를 든 그는 이번에도 거리를 두는 데 실패하며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애원해 보았다.


“넌 지금 안 울게 생겼어?”


태강의 소매로 눈물을 닦다 말고 초영은 터지는 분통에 또 울먹거리며 성을 냈다.


“아니, 너도 울고 주화도 울고 나도 울고 다 울었는데······ 너만 지금 계속 울고 있잖아. 너무 많이, 너무 오래 말이야. 천일나무가 만약 네 눈물을 요구한다면 우린 앞으로 만 년은 거뜬하게 살 수 있었을지도 몰라. 초영, 너 지금까지 엄청 울었다니까.”


막상 초영의 붉은 눈가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자니 다시금 쩔쩔매고 마는 태강이었다.


“난 한 번도 안 울었는데.”


불구경꾼처럼 남자가 싱글벙글거리며 이에 끼어들었다.


“따지려고 들면 야담도 안 울었어. 피도 눈물도 없는 놈.”


마저 눈가를 문지르며 초영이 말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피는 있다.”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 가장 멀찍이 떨어져 있던 야담이 조용히 반박했다.


“그래, 너 잘났어. 지금 나만 슬픈 거지? 너희는 어쩜 이렇게 매정하니? 그런 말을 듣고도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가 있어? 저 녀석을 가두든가 어디에 묶어두든가 해야지!”


남자는 어느새 ‘저 애’에서 ‘저 녀석’으로 전락해 있었다. 그 강등이 나쁘지만은 않은지, 남자는 연시 실실 웃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다른 방법을 찾아볼 수도 있어.”


초영의 반대쪽에서 그녀의 등을 줄곧 토닥이던 주화가 서 있는 남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괜찮아.”

“우리가 안 괜찮아서 그래.”

“아니, 너희도 괜찮을 거야.”


남자는 그 누구의 눈길이 자신을 관통한다고 해도 두려울 것이 없어 보였다.


“지금 안 괜찮은데도?”


걱정은 짐이 되었고, 짐은 곧 마음이 되어 근심을 숨길 수 없어진 주화가 여전히 회유를 포기하지 않으며 남자에게 물었다.


“당연하지. 괜찮을 거야. 내가 없어도 너희는 괜찮을 거야.”


남자의 대답에 갑자기 초영이 더 목청껏 울기 시작했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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