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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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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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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6,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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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6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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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317화

DUMMY

“백면은 백면이겠죠.”

“하얀 면인 건지, 백 개의 면을 이야기하는 건지 모르겠어서 그래.”


이미 자신보다 아주 진지해진 나나의 태도에 홀로 난처하게 된 도진이 한 번 더 머리를 문질렀다.


“원래는 숫자를 뜻하는 백면일 거예요. 그러다가 백면 자신이 원해서 멋대로 바꾸고 다닌 것 같던데요. 저도 들은 거라 정확하지는 않아요. 책을 찾아봐도 표기가 제멋대로거든요. 그중 가장 오래된 건 숫자일 거고, 다른 성인들께 언젠가 한 번 물어봤을 때도 원래는 숫자를 의미하는 거라고 했어요.”


도진이 말했다.


“그럼 원래의 그 백면은 어떤 뜻인데?”


나나가 물었다.


“나나 씨가 말한 대로 백 개의 면(面)이에요. 백 개의 모습이라는 것이죠. 허무란 하나에 지나는 것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것을 의미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아요.”


남자의 변덕에는 그만한 운명이 얽혀 있었던 것이라 수긍하게 된 나나는 뒤이어 더 묻지 않았다. 한참 동안 나나에게서 반응이 없어진 도진이 입꼬리를 조금 비틀었다. 마음이 켕긴 탓이다.


“그런데 이건 왜 물어봐요?”

“둘 중 하나를 저 애의 이름으로 하자고 말하려고 했거든.”

“하얀 면 말이에요?”

“응. 그런데 모르겠어. 난 그 사람 이름이 하얀 면이라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백 개의 면이었다고 하니까 이건 그냥 반려할래.”


나나도 언짢은 구석이 있는지 구긴 얼굴을 펼 줄 몰랐다.


“그럼 이름 이야기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도진이 황당한 감정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우선은 기다려야겠어.”

“뭘 말이에요?”

“어떤 이름이 더 잘 어울릴지 말이야.”

“그럼 여전히 백면(白面)과 백면(百面) 둘 중 하나로 반드시 이름을 정하겠다는 거예요?”

“응.”


하지만 그보다 더, 아주 당황했던 나나의 대답은 그리 길지 않았다. 사색은 시간을 원하지, 언어를 원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저녁 무렵에 나나는 아이를 유모차에 태워 산책을 감행했다. 이는 ‘백나나는 백나나다.’라는 문장보다도 더 옳은 표현일 것이다. 왜냐면 그녀는 정말로 아이를 돌보는 데 재주가 없었으니까. 그런데도 그녀는 그럴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아이가 커서 기억하지 못하는 순간이야말로 아이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영원이나 다름없다며 조이가 강구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얼마 가지 못해서 나나는 지치고 말았다. 아이를 데리고 둘러볼 곳이 마땅치 않아서인지, 여러모로 기운이 솟지 않았다.

결국에는 근처를 배회하다가 호수가 눈에 들어왔고, 날씨가 많이 쌀쌀해져서 그런 건지 비교적 한적한 인파에 그녀는 부교 쪽으로 향했다. 무엇이 시샘을 부린 것인지 삶을 채색한 풍경이 조금씩 벗겨지고 있었다. 아, 달은 그대로였다. 달이 차면 기운다고 하던데 오히려 비뚤어진 것은 오로지 내 마음인 건 아닌지 싶었다.


“아이가 울고 있는데.”


그때 누군가가 배후에서 다가왔다. 늙고 고단해 보이는 목소리였다. 곧 자신에게로 닥쳐올 줄 알았던 그 정체는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나나가 고개를 수그려 시선의 높이를 낮추자 목소리의 본모습이 드러났다.


“누구세요?”


나나가 유모차를 자신 쪽으로 끌어당기며 물었다. 웬 노인이 쭈그리고 앉아서 아이를 향해 속삭이는 게 은근히 섬뜩했다. 두 사람 사이가 정말 가까웠는 데다가 노인은 벙거지모자를 푹 쓰고 있어서 그의 인상을 확인할 겨를도 없었다. 무엇보다 곧 아이가 울음을 터뜨렸다는 점에서 나나는 그를 경계해야 했다.


“소용없을 거야.”


나나가 아이를 품에 안아 달래려고 할 때 노인이 한 말이었다.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는 몰라도 아이는 금방 울음을 그쳤다. 마르지 않은 눈물에 아쉬운 듯이 울먹거리기만 할 뿐이다. 기가 막힌 우연에 나나는 아이를 도로 내려놓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없을 테지.”


노인은 고개를 들지 않은 채로 꿍얼거렸다.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예고에 없던 만남도, 예의가 없는 인사도 모두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나나는 부교를 벗어나기 위해 부리나케 유모차를 밀었다. 하지만 완전히 지나치려는 순간에 노인이 뒤에서 그녀를 불렀다.


“백나나. 세상에는 숨길 수 없는 게 존재해.”


나나는 뒤를 돌아 그를 마주하기도 전에 노인이 어떤 사람일 것임을 이미 짐작하게 되었다.


“그게 뭔데요?”


언제든 달아나기 위해서 손잡이를 붙들며 나나가 물었다. 그 인내에 대한 보답인 것인지 노인은 모자를 벗으며 자신의 얼굴을 온전히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진실이지. 진실은 숨길 수가 없어. 다만 인간이 유혹에 충성하듯이 진실에 충성하지 않을 뿐이지. 어리석은 인간들이야. 정복을 위해 서로를 겨누기까지 하면서 은밀하게 내면에서는 자신을 향한 끝없는 굴복을 즐기잖나. 그러면서도 모든 걸 가졌다고 생각하지.” 노인이 몇 발자국 더 다가와서 애써 떨어놓았던 거리감은 제자리로 돌아왔다. “모든 걸 가진 대신에 단 한 가지를 못 가졌다는 걸 알면서도! 참 뻔뻔한 인간들이야. 그러고서는 그 진실 하나를 가지려면 자신이 누렸던 모든 걸 포기해야 한다는 걸 알게 돼. 하지만 그런 선택을 하는 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넌 달이 차면 기운다고 생각했지? 천만에! 달은 애초부터 기운 적이 없다는 걸 넌 알아야 해.”


노인은 화가 많이 나 보였다. 스스로 내는 흥분에도 견디지 못해서 입술을 잘근 씹거나 눈을 파르르 떨기도 했다.


“그게 진실이랑 무슨 상관이에요?”


나나가 어깨를 움츠리며 방어적인 자세를 취했다.


“너희는 진실을 숨기려고 하고 있잖아. 그래서 내가 말하는 거야.”


혹여 그림에 대한 이야기일까? 그렇지만 표절을 한 건 남자였다. 나나 역시 떳떳한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표절의 문제는 남자의 것이었다. 황호는 이 모든 생각을 들을 수 있으면서도 이에 대해서는 일언도 더하지 않았다. 반대로 나나가 자신에게 무언가를 물어봐주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그래서 그 진실이 뭔데요?”


어쩔 수 없이 나나가 이에 응하고 말았다.


“슬픔이야. 너희는 왜 슬픔을 느낄 수밖에 없는 존재면서, 왜······ 왜, 슬픔은 처음부터 있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굴고 그렇게 너희 자신을 속이고 슬픔을 외면하려고 하지?”

“저는 외면한 적이 없어요.”


자신의 두 팔을 붙잡고 매달리는 황호를 뿌리치기 위해 나나가 외쳤다.


“거짓말하지 마. 너도 여전히 슬픔을 외면하고 있구나! 그리고 난 알고 있어. 네가 지금까지 물감을 섞을 수 없었던 것도 다 그 때문이잖아. 네 눈물과 섞였을 때의 그 물감이 제 색깔을 낼 수 없을 거라는 걸 넌 알고 있던 거야.”


하지만 아무리 떨쳐내도 황호는 다시금 그림자처럼 달라붙었다.


“어차피 순간의 감정밖에 읽지 못하면서 뭘 다 안다고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견디다 못한 나나가 더 크게 소리쳤다. 황호는 그 순간에 눈을 크게 뜨더니 소름이 끼칠 정도로 잔웃음을 지어 보였다. 폭풍을 머금고 있어 아주 고요한 미소인 듯했다.


“그래, 순간의 감정이지. 모든 게 순간이야. 그렇지. 그렇다면 이제 더는 참을 필요도 없겠어.”


황호가 덥썩 나나의 손목을 채갔다.


“이게 그거지? 다 알고 있어. 목걸이를 대신하는 게 팔찌라니.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다 알 수 있으니까. 어서 이걸 가지고 백면한테로 가자. 그 녀석한테 이걸 전하고 아주 중요하게 할 말이 있으니까.”

“말도 안 돼요! 지금 여기 애도 있는데 뭐 하시는 거예요?”


나나는 팔찌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팔을 뒤로 감추며 반대했다.


“상관없어. 모든 게 가짜니까. 나는 진짜와 대화해야겠어. 그러니까 그 팔찌를 줘. 목걸이는 돌려줘야만 했거든. 네가 가지 않는다면 나라도 가야겠어.”


황호는 어디든 쫓아갈 기세로 나나의 팔찌를 약탈하려고 들었다. 잠시 난리가 있은 후에도 그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집념 하나만으로 결국에 물리적으로 지친 나나에게서 팔찌를 빼앗을 무렵에 황호는 승리한 얼굴로 그것을 달의 테두리인 양 하늘에 두며 성공을 만끽했다.


“내놔요!”


그 틈을 노리고 나나가 팔을 죽 뻗어 팔찌를 되찾아 오려고 했다.


“어림도 없지.”


그러나 황호가 팔을 뻗은 방향을 바꾸는 바람에 나나는 공중에서 제대로 허탕을 치고 말았다.


“돌려달라니까요!”

“그럴 수 없어.”


후회를 모르는 파렴치한 도둑을 노려보기도 잠시, 나나는 어떻게 팔찌를 되찾을지 새로운 방법을 궁리할 필요도 없이 금세 뒤바뀐 황호의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다. 뒤에서 태강이 나타난 것이다.


“황호, 넌 이게 없어도 세계로 갈 수 있는데 왜 뺏으려는 거야?”


황호의 모자가 바람에 날아가지 못하도록 발로 짓밟은 그는 아주 간단하게 팔찌를 황호의 손에서 가져오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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