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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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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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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4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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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화

DUMMY

을씨년스러운 날씨의 연속은 삶은 끊임없는 상실의 과정이라는 것을 드러내나 보다. 바람은 이역만리를 지나 온 것처럼 말이 통하지 않았고, 미묘하면서도 정교했던 색의 향연도 나뭇가지를 떠나 옛날이라는 땅에 묻어진 뒤였다. 그런 탓에 마음은 더욱 고립되어 가는 건 아닌지 염려스러웠다. 그러나 계절은 모순적이게도 뭔가를 잃으면 잃을수록 더욱이 앞에 놓인 길에 자유를 두었으니, 유달리 텅 빈 거리가 그리 나쁘다고는 말할 노릇도 아니었다.


“이걸 그 애한테 전해 줘.”


이제 작별의 시간이었다. 아마 남자 홀로 그리 여겼을 수도 있겠지만, 모두 그의 생각을 부정하거나 이구동성으로 그의 생각을 변화시키기에는 각자의 처지가 너무도 달랐다. 남자도 이를 모르지는 않았다. 그래서 일부러 초영에게 다가가 흑석에게 받았던 팔찌를 건네기로 한 것이다.


“목걸이를 되찾았어.”


초영이 만에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팔찌를 차며 답했다.


“그래도 이걸 전해 줘.”

“왜?”

“올 때랑 갈 때가 다르면 재밌잖아.”


물론 남자의 말을 곧이곧대로 알아듣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구태여 남자가 참견하지 않더라도 나나는 많은 것을 달리 바라보게 될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너무 오랫동안 밤을 살아왔기에 어느 날에 세계로 돌아왔을 때는 하늘에 해가 뜬 걸 보고 놀랄지도 모른다. 그러니 남자의 말은 아주 가벼운 농담이었다.

울컥거리게 되는 슬픔을 하루 정도 추스린 뒤 초영은 직접 나나를 찾아왔다. 그런데 이제까지 남자에게만 온갖 신경과 정신을 들인 탓에 나나에게 무슨 꿍꿍이가 있을 거라고는 차마 생각하지도 못한 때였다.


“부탁이 있어요.”


팔찌를 받기도 전에 나나는 초영에게 간곡히 청하는 투로 말하면서 자세까지 겸손해 보이도록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난 이제 누구의 부탁도 들어줄 처지가 아니야. 특히 너의 부탁이라면 말이지.”


떨떠름한 채로 수중에 있는 팔찌를 바라보며 초영이 웅얼거리며 말했다. 순간적으로 나나의 기억을 읽은 그녀는, 나나가 남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으로 오해했다.


“왜 제 부탁이면 못 들어주는 건데요?”


나나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귀찮고 불편한 이들은 있기는 했다지만, 12성인 중 그 누구와도 앙금이 남은 사이가 아니었던 그녀에게는 퍽 억울한 일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어. 그 앤 안 돌아올 거니까.”

“세상에, 그럼 이제 두 사람은 다시 못 만난다는 거예요?”

“응, 그렇게 되는 거지.”


대화가 잠시 멎었다. 그리고 초영은 서로가 다른 시간를 가로지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뭐야, 백면 말하는 게 아니었어?”


초영이 허리를 꼿꼿하게 피며 말했다. 항시 반듯할 필요는 없었지만, 깔끔해 보이는 자세는 그녀가 언제나 좋아하는 것이었다.


“아니에요. 그 일은 부탁하고 말고 그럴 것도 없거든요.”

“하지만 그것도 네가 원하는 거잖아. 그 애가 돌아오는 거 말이야.”

“그렇긴 한데 그건 제가 부탁해서 되는 일이 아니잖아요.”


나나는 자신의 발언에 어폐가 있는 것 같은 꺼림한 느낌이 들어서 그만 하던 말을 멈추었다.


“왜 그래?”


백면이 아니라면 나나가 어느 것을 부탁할지, 가장 최근의 기억을 토대로 추측한 초영이 한쪽 눈만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사실 제가 부탁하려는 것도 이거랑 별반 다를 게 없거든요.”

“두 사람의 만남 말이지?”


두 사람이 염두에 둔 두 사람은 어느새 달라져 있었다. 이제 뜻이 통하는 걸 알고 나나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그런데 느닷없이 초영이 휘파람을 불기 시작하는 게 아니던가. 어느새 그녀는 자유는 슬픔으로도 무너뜨릴 수 없는 것처럼 아주 여유로워 보였다.


“왜 그래요?”


이번에는 역으로 나나가 다른 쪽 눈에 힘을 주며 변화의 까닭을 추궁했다.


“네 말이 맞아. 그건 네가 부탁해서 되는 일이 아니야.”

“이것도 그런 걸까요?”


그러고는 아쉬워하며 긴장했던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렇지. 다를 건 또 뭐겠니?”


생각이 헷갈리는 것이 있는지 눈을 잠시 아래로 뜬 나나를 두고 초영이 의젓하면서도 참으로 싱겁게 말했다.


“하지만 그래도 영 없는 건 아니야.”


그리고 감미를 더하는 말을 비법을 슬쩍 알려주듯이 흘렸다.


“방법이 있는 거예요?”

“아니 없어.”

“방금은 있다면서요?”

“그래, 방법은 없는데 사람은 있다는 뜻이야.”


초영은 계속 자신이 간직해서는 안 될 물건을 나나에게 건넸다. 이제 이야기의 주도권을 그녀가 쥐었다는 생각에 나나는 팔찌를 바로 받을 수밖에 없었다.


“사람이 있다뇨? 사랑을 잘못 말씀하신 거 아니죠?”


팔찌를 바로 차지 않고서 구경하던 나나가 물었다.


“사람이 없으면 사랑에는 방법이 없거든. 사람 자체가 곧 방법이야.”

“무슨 말인지는 알 것 같은데, 그래도 만나지 않으면 모르잖아요.”

“아니, 알게 되어 있어. 그리고 두 사람은 어떤 방식으로든 만나게 될 거야.”

“그럼 제가 나설 필요가 없는 걸까요?”


보다 못한 초영이 그 팔찌를 나나의 손목에 직접 채웠다. 그 순간에 찾아온 고요는 희망으로 넘치는 연말에서나 느낄 수 있을 만큼 안정적이었고, 그래서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아도 기다림의 시간은 전혀 성가시지 않았다.


“아니. 너는 이미 나섰어.”


만족스러워진 초영은 마음의 짐을 하나 덜기라도 한 것처럼 웃어 보였다.


“이미 나섰다고요? 전 직접 도와야겠다고 생각한 날이 고작 어제였어요.”


그 살웃음을 두고 나나가 두 손바닥을 다 펼쳐 보이면서까지 항의했다.


“그래, 그건 그런데 넌 오래 전부터 네가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었단 뜻이야.”

“어떻게요?”

“참 답답하네! 그림을 다 그려놓고도 그런 소리를 하니? 주화도 그렇고 태강도 그렇고, 다들 백나나 너한테 그림을 그리라고 한 건 그게 네가 해야 할 일이라서야.”


그 손바닥을 아프지 않게 찰싹 때리며 초영이 타일렀다.


“그림을 그리는 게 제가 할 일이라고요?”


언젠가부터 꿈이 일이 된 것이었을까. 영문을 모르는 나나가 눈만 감았다가 뜨니 갑갑해진 초영이 재차 나나의 손을 건드렸다.


“네가 할 일은 끝났어.”


하지만 말투는 상냥하기 그지없었다.


“끝났다니요?”


그리고 다정이 무정보다 두려운 것인 만큼 나나가 놀라며 말했다.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돼.”

“뭐를요?”

“돌아가기를 말이야.”


나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근본적인 문제는 하나도 해결이 되지 않았을 텐데, 벌써부터 자신을 놓아주는 이들의 태도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시원하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했지만, 보다 문제는 아무것도 해결된 게 없다는 현실이었다. 하기야 월계에 처음 들어섰을 때도 자신의 삶은 하나도 해결된 게 없는 문제투성이였다. 그래도 그렇지, 이들은 그냥 인간이 아니지 않던가. 기왕 성인이라면 뭔가 제대로 문제를 해결할 줄 알았던 기대는 이따금 실망이라는 감정으로 바뀌었다.


“그렇게 실망하지 마.”


그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난 나나의 얼굴에 대고 초영이 은연중에 그녀를 달랬다.


“적어도 네가 지금 걱정하고 있는 문제는 알아서 해결될 거야.”


장담하듯이 이야기하는 초영의 태도도 의문 중 하나였다.


“서로가 원하지 않는데 어떻게 만나게 되나요?”

“그러게 되어 있어. 사랑은 움직이니까.”

“그건 헤어지거나 누군가를 떠날 때 쓰는 말 아닌가요?”


혹여라도 자신이 또 모르는 월계의 언어가 있는지 싶어 나나가 소극적으로 반응했다.


“아니. 이건 사랑이 제대로 시작될 때 쓰는 말이야.”


역시나 자신의 직감이 맞았다며 나나가 안도할 무렵에 초영은 말을 덧붙인다.


“내가 하는 건 모든 것을 뒤로하고 사람이 진실한 사랑을 위해 한 발 더 내딛도록 돕는 거야. 그러니까 사랑은 움직이는 거지.”

“그럼 사랑이 멈추게 되면요?”


나나가 아무런 악의 없이 꺼낸 질문에 초영은 퍽 고통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현재라는 곳에 이르기까지 길이 되어준 과거를 떨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런 건 없어. 사랑은 멈추지 않거든.”

“그럼 말이 안 맞잖아요.”

“말이 안 맞는 건 사람이야. 사람만이 사랑을 관둬. 그리고 사랑은 버려졌다고 해도 어딘가에서라도 반드시 계속되게 돼. 많은 사람들은 그걸 추억이라고 부를 뿐이지.”


그렇다면 나는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온 것일까. 이 질문만이 모두의 가슴에 남아 심금을 울렸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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