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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투나가 님의 서재입니다.

삼재 든 왕자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한투나가
작품등록일 :
2018.04.10 05:19
최근연재일 :
2018.12.21 15:45
연재수 :
6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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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85,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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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8.02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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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마나의 각인

DUMMY

유산이란 대개 재산이다. 그러나 재산은 금방 사라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보통 땅이나 지위를 물려주고자 한다. 그건 귀족이나 상류층 이야기고 일반 평민들은 대개 재산이 없다. 있던 땅도 흉년이 들면 당장 먹을 것과 바꾸고 만다. 살아 남기 위해. 그래서 평민 중에 생각 있는 사람들은 무형으로 된 것을 물려주고자 한다. 그것은 정신이다. 이 세상에 살아 남기 위해 가져야 하는 정신 자세. 그것이 대대로 이어지면 가훈이 되고, 가문의 신념이 된다.


갑작스런 바라케의 물음에 촌장은 살짝 당황하는 안색을 비쳤지만 곧 정신을 가다듬고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수작이라니요? 그저 술을 많이 드셨을 뿐입니다. 어제 갑자기 부제 님께서 쓰러지시고 곧이어 부제 님을 깨우려고 하시던 기사 님께서도 그대로 정신을 잃으셨다고 했습니다. 식장 주인이 말하길 두 분이서 술독 하나를 다 비우고 두 병째도 거의 반 이상 드셨다고 하더군요. 우리 농꾼들도 그리 많이 마시면 쓰러지지요."

"아니, 황도에선 내가 혼자서 술 세 독을 비우던 주당으로 알아주던 놈인데, 겨우 둘이서 독반으로 내가 쓰러지다니, 도시 이해가 되지 않는단 말이지."

"얼마 전에 약초상이 식당 주인에게 양조 방법에 대해 뭔가 가르쳐 준 모양입니다. 그 때부터 술이 좀 세졌다고 하던데요. 설마 우리 동네 무슨 이득이 있다고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그런가? 아, 그리고 곡물 판 걸 성내까지 배달해 준다고 했다던데, 네, 최근에 탈곡기라는 게 나왔다고 그걸 좀 사서 동네에서 좀 써 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번에 소도 죽고 해서, 소도 여유있게 좀 사려고 합지요. 그래서 돈이 필요해서, 돈 생기는 일이면 다 해보려고 운반일도 하겠다고 했지요."

"그 때 물건 경호할 인력이 필요할 텐데, 우리 병사들이 같이 가도록 배려해 줌세. 병사 넷 정도면 되겠지?"

"아이고,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데, 굳이 그러실 필요까지는 없으실 텐데요. 겨우 사흘만 가면 되는데, 별일 있겠습니까?"

"아, 괜찮네. 수고비도 필요 없고, 우리 병사들이 너무 심심해 해서 그러는 거니 사양 말게. 그게 자네 아들이 우리 부대 들어와 처음 하는 일이 될 테니 말이야. 음? 알았지?"

"아, 아이고 그렇다면 정말 감사드립니다. 제 자식은 이제 기사 님 아래에서 수업 받는 게 맞지요? 허허, 감사드립니다."


촌장은 그제야 돈주머니를 챙겨 넣는 바라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촌장은 속이 시원하다는 듯 손뼉을 한번 짝 치고는 테이블에 놓인 잔에 가득 술을 채웠다.


"기사 님께 감사의 마음을 담았습니다. 기사 님의 앞길에 찬란한 빛이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건배!"


바라케는 촌장과 잔을 마주치고는 한껏 고개를 들어 잔을 비웠다. 일단 어제 일은 촌장이 관여한 건 아니었다고 확신했다. 자기 자식을 맡기면서 그런 위험한 계략에 엮일 자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그 상인이 직접 뭔가를 했거나, 식장 주인이 상인에게 엮여 일을 벌였으리라 짐작할 뿐이었다.


"그런데, 아까 이리 오는 길에 잠시 봤는데, 오늘 상인들과 무슨 일이라도 있었소?"


그 말에 촌장은 안색이 살짝 어두워졌다. 분명 상인과 분명이 무슨 문제가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아침에 저장해 놓은 곡물을 다시 좀 보자해서 창고로 갔는데, 재작년에 거두었던 곡물에 문제가 있다며 가격을 깎으려 들었지요. 우리 동굴 창고는 아주 서늘해 보존성이 좋고 벌레도 없어 여러 해 묵은 곡식도 작년에 수확한 것처럼 말짱하단 말입니다. 최근 십 년 동안 수확량이 좋아 창고에는 다섯 해 지난 곡물도 조금 있을 정도지요."

"오년 묶은 곡식이 있다고요?"

"네, 보리나 밀은 아니고 기장 같은 것과 붉은 콩은 잘 말려 놓으면 오래 갑니다. 세금을 보통 밀만 내니 우리가 밀이 떨어졌을 때를 대비해 조금씩 짓는 게 있습죠. 이번에 밀값을 기준으로 해서 다 사간다 했는데, 이 핑계, 저 핑계로 깎아대는 통에 성질이 나서 그만 큰소리 좀 냈습죠."

"그래, 어떻게 이야기는 잘 되었는지?"

"성질 같아선 안 판다고 버티려고 했는데, 성주 님 체면도 있고, 해서 밀, 보리만 제값으로 하고, 콩하고 기장 기타 곡식들은 조금 깎아줬지요. 누가 장삿꾼 아니랄까봐. 소 다섯 마리 사려고 했는데, 소 두 마리에 송아지 한 마리밖엔 못 살 것 같습니다. 많이 아쉽습니다."

"아? 아!"


바라케는 입맛이 좀 씁쓸했다. 자신이 받은 돈 정도면 아마 소 한 마리는 사지 않을까 싶었다. 농민들에게 소는 거의 절대적인 재산이니까, 아마도 농가 하나는 자신 때문에 밭일을 며칠 미루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이 돈주머니를 다시 돌려줄 수는 없다. 자신도 촌장의 아들을 돌보는 데 돈이 들 테니까.


"알았소. 아쉽겠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큰 돈이 들어오겠구려. 운송 날짜 정해지면 연락 주시구려. 그리고, 키토스는 이틀 후에 데리러 오겠소. 그 동안 작별 시간을 보내도록 하시고."

"감사합니다. 그러면 이틀 간 준비하겠습니다."


바라케는 일어나 부대로 향했다. 씁쓸하지만 돈도 좀 생겼다. 아직 얼마나 들었는지 세어 보진 않았지만 키토스에게 칼 한 자루 사 주고도 충분히 남을 돈임이 분명했다. 설마, 그 기대를 저버리는 액수라면 키토스는 아마 오래 버티진 못할 것이다.


바르푸넨은 어제 살펴보던 살랍마타의 집으로 다시 향했다. 어제 갑자기 만난 바라케 때문에 채 살펴보지 못한 것이 있었다. 분명 살랍마타의 메모와 그의 실종은 관련이 있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었다. 바라케가 마차에 대해 이야기해 준 정보에 따르면 고급 귀족이 직접 도모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아예 평민이나 상인들, 즉 중층 계급이 꾸민 일이라고 보기엔 꽤 고수들이 동원된 느낌이었다.


다시 어제와 같이 살랍마타의 책상 앞에 앉아 그가 적은 쪽지들을 꺼내 책상 위에 가지런히 펼쳐 놓았다. 하나하나 가만히 읽어 보니 그가 떠오른 생각을 적어 놓은 것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어떤 쪽지에는 쪽수가 적혀 있었고, 어떤 쪽지에는 "드래곤이 말했다." 또는 "드래곤은 이렇게 생각한다고 했다."고 글이 시작한 걸 볼 수 있었다. 즉 드래곤의 예언서에서 중요하게 생각하거나, 좀더 깊게 생각해 볼 여지가 있는 것들을 뽑아서 적어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쪽지를 적힌 문장에 따라 확실하게 쪽수가 적힌 것, 드래곤이 언급한 내용이 확실한 것과 아닌 것들을 분류했고, 평문과 의문문을 구별해서 나누어 보았다. 그렇게 정리했더니 살랍마타가 드래곤의 예언서를 읽으면서 생각해야 했던 것들을 대충 추려낼 수 있었다. 그가 고민했던 것은 마나가 인간에게 각인되는 과정에 대한 것이었다.


마나를 다루는 마법사나 기사, 성직자들은 그저 어느 날 갑자기 마나를 각성하고 그것을 부리는 것을 수련한다. 마법사들은 마나의 정체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해왔지만, 그 목적은 마나를 더 강력하게 마법으로 발휘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마나와 인간에 대한 연구 결과가 세상에 제대로 발표된 적은 없었다.


마탑마다 마법 훈련을 맡은 책임자들은 아마도 그것에 대한 연구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연구 결과가 발표된 적은 없으니 못 밝혀냈다거나, 그저 어떤 마탑마다 나름의 가설을 세우고 거기에 수련론을 발전시켜 왔을 것이다. 살랍마타 역시 자신이 속한 마탑의 가설과 드래곤의 예언서에 적힌 마나의 각인이라 불리는 과정에 대한 실마리에 대해 연구하고 고민했을 것이다. 바바아타의 마나 수련을 훈련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으니.


그런데, 쪽지에 적힌 살랍마타가 고민한 부분은 바로 마나의 각인이란 허구가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즉 어떤 존재 건 마나를 각인했다고 깨닫는 그 순간은 마나의 각인이 아니라 드래곤 흔적의 각성이라는 것이다. 이 세상에 마나를 각성했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모두 드래곤의 자손이라는 것이다. 뭐 이런 말이 안 되는, 그렇다면 바르푸넨 자신도 드래곤의 자손이라는 말인데, 도저히 믿기지 않는 말이었다.


바르푸넨은 가만히 눈을 감고 등받이에 기대어 자신이 마나를 각인하던 때를 떠올려 보았다. 수련자로서 순종의 계율을 몸에 배도록 수도원 부속 농장에서 혹독한 노동의 나날을 보내던 때, 아주 추운 한겨울이 지나고 딱딱하게 얼었다가 조금씩 풀려가는 밭을 갚아 엎는 중노동을 하고 깊이 잠이 든 새벽, 갑자기 온 몸에서 강한 힘이 솟아나는 듯 하더니 갑자기 온 몸에 힘이 쭉 빠졌다가 다시 기운이 차오르는 희한한 경험을 하고 난 후 며칠 동안 어떤 중노동을 하더라도 기운이 딸리지 않았다. 다만 잠든 새벽녘에 한번씩 일어나 기운이 차올랐다 사라지고 다시 차오르는 것을 매일 반복했을 뿐이었다.


며칠 후, 영적 스승 사제에게 이러한 현상에 대해 물었더니 마나의 각인이라며, 신성 사제로 간택된 것이니 노동은 이제 그만하고 영성 수련 단계로 넘어갔다. 이런 일이 새삼스레 떠오르며, 분명 그것은 내가 어떤 특별한 '각인'을 했다는 느낌은 전혀 아니었다. 그냥 정말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몸 속에서 생겨난 것 뿐이었다. 그렇다. 그것은 그냥 타고난 것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수련을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걸까? 그저 타고 난 것 뿐이라면, 그 많은 신전과 마탑에서 그 많은 수련자들이 마나를 자신에게 각인하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하는데, 다 헛수고일 뿐이다. 그저 신전과 마탑은 그들의 노동력을 수련이란 이름으로 착취하고 있을 뿐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바르푸넨은 눈을 떠 테이블에 펼쳐진 살랍마타의 쪽지들을 훑었다. 마나를 다루는 재능은 타고났을 뿐, 수련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가설은 거짓이라고 믿고 싶었다. 그게 맞다면 모든 이들이 우러르는 단체, 기관들은 모두 힘 없는 어린아이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악한 기관이기 때문이다.


작가의말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불덩이 여름을 잘 견뎌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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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재 든 왕자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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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부정기 연재로 전환합니다. 18.04.19 394 0 -
60 왕세자의 진노 18.12.21 119 0 15쪽
59 마투 자작의 모의 18.11.09 154 0 11쪽
58 베르크 왕국의 갈등 18.10.31 174 0 14쪽
57 폭풍우 속 도주 18.10.16 213 0 12쪽
56 선택과 운명 18.10.12 223 0 12쪽
55 성장한 바바아타 18.09.18 271 0 13쪽
54 바바아타의 실종 18.08.31 277 0 12쪽
53 바바아타의 주체 수련 18.08.22 317 0 11쪽
» 마나의 각인 18.08.02 319 0 10쪽
51 기분 좋은 식사 18.07.26 377 0 7쪽
50 종자의 조건 18.07.25 355 0 13쪽
49 상인과 첩자 18.07.23 348 0 12쪽
48 기사 바라케의 밀당 18.07.18 404 0 12쪽
47 뜻밖의 만남 18.07.17 365 0 15쪽
46 부제 바르푸넨의 고민 18.07.16 407 0 13쪽
45 배신과 두려움 18.06.22 389 0 8쪽
44 차우라 길드의 마스터 18.06.21 379 0 8쪽
43 드래곤의 예언서의 행방 18.06.11 402 0 8쪽
42 납치된 마법사 18.06.08 389 0 7쪽
41 씁쓸한 마나의 맛 18.06.06 403 0 7쪽
40 마법사의 위기 18.06.05 401 0 7쪽
39 연성술의 금기 18.06.04 396 0 8쪽
38 교감의 두려움 18.05.31 442 0 7쪽
37 빙의 술법 18.05.29 440 0 11쪽
36 덫에 걸린 기사 18.05.28 401 0 7쪽
35 깨어난 달달한 마나 18.05.25 456 0 7쪽
34 희망의 씨앗 18.05.24 408 0 9쪽
33 마나의 소용돌이 18.05.23 460 0 9쪽
32 경비대의 심술 18.05.22 442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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