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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유자 님의 서재입니다.

행복의 연금술 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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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녹색유자
작품등록일 :
2021.10.08 16:53
최근연재일 :
2022.01.13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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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31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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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쪽

48화

DUMMY

“이제 막을 내려야 할 때가 왔어요.”


작업실에서, 펠릭스가 히죽거리며 말했다.


“무슨?”


“내일 아침이면, 우린 여길 떠날거에요, 올리버.”


“그러기로 했지.”


“실비아.” 펠릭스는 고개를 돌렸다.


“네?”


“당신은, 언니분과 충분히 회포를 풀었나요?”


“모르겠어요. 풀 만큼은 푼 것 같은데······.”


“저는 내일 아침이면 떠나요. 저를 따라올지 말지, 그 전까지는 정해줘요.”


“마음은, 이미 정했어요. 사실, 처음부터 정해뒀죠.” 실비아가 대답했다.


“다행이군요. 어느쪽이죠?”


“······저는, 언니가 예전과 똑같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언니는, 조금 달라졌어요.”


“제 질문에 대한 적절한 대답이 아니군요.” 펠릭스가 씩 웃으며 말했다.


“비유잖아요! 좀, 알아들어요.”


“남의 농밀한 가족사가 담긴 비유를 제가 어떻게 알아들어요?”


“하여튼! 어쨌든, 저는 언니네 집에 더이상 머무를 수가 없어요. 언니는, 예전같지가 않은 걸요······.”


“예전에는 어땠는데요?”


“그 때는, 순수했어요.” 실비아는 고개를 살짝 위로 들고,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자기 마음을 숨기지 않았어요. 솔직했죠. 그래서 싸우기도 많이 싸웠지만.”


“그럼, 지금은 타락한 거짓말쟁이라는······.”


“펠릭스! 일부러 그러는거죠! 적당히 해요!”


“아, 죄송합니다. 그만, 실수했군요.”


“남의 언니한테, 못 할 말이 없군요! 언니는, 그렇게 타락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입에 거짓말을 달고 살지도 않아요!”


“그럼 예전과 똑같은것 아닌가요?”


다시 실비아가 풀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언니는, 꿈을 잃어버린것 같아요.”


“정말 대단찮은 일이군요.”


“그게, 중요한 사람도 있어요 펠릭스.”


“그런가요? 그렇다면, 저는 평생 그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겠는걸요.”


“그렇겠죠.” 실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아마 이해 못 할걸요.”


실비아의 말에, 펠릭스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이해할 수는 없겠죠. 하지만, 약을 만드는데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아요.”


오히려 당당하게 나오는 펠릭스의 태도를 보고, 실비아는 그에게서 시선을 돌려버렸다.




연금술사 작업실에 걸린 둥근 시계의 짧은 바늘이 오후 아홉 시를 가리키자, 실비아는 알람이라도 맞추어 둔 것처럼 입을 가리고 작게 하품을 했다.


“이제 당신은 그만 돌아가요 실비아.”


“무슨 약을 만들건데요?”


“이건, 에밀리아 콘월의 일이지, 당신의 일이 아니에요 실비아.”


“제 언니인걸요.” 실비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펠릭스와 마주섰다. “언니한테 무슨 일을 벌이려는지, 동생으로서 알 권리가 있다고 봐요.”


“나는, 당신이 제게 무슨 약을 부탁했는지, 당신 언니에게 끝까지 비밀로 지켰어요.” 펠릭스가 대답했다. “당신 언니도, 당신과 같은 권리를 가졌을테죠? 어느쪽으로든지.”


실비아는 잠시 생각하다가, 반박할 말을 찾다가, 금새 포기했다.


“알았어요. 하나만 약속해줘요. 언니한테, 나쁜 약을 만들어 줄 건 아니죠?”


“저는 연금술사에요!” 펠릭스가 말했다. “그것도, 아주 뛰어난 연금술사죠. 그런 제가, 어떻게 나쁜 약을 만들수가 있죠?”


“그러니까, 해를 끼치는 그런 약 말이에요! 다치거나, 죽거나, 뭐 그런······.”


“당신이 할 말은 아닌것 같은데요?”


실비아는 다시 머뭇거리다가, 조금 작게 말했다.


“언니한테 잘 해줘요.”


“저는 일단 받은 손님에게는, 항상 최선을 다합니다.”


“그럼, 다행이고요.”


그리고 실비아는 슬금슬금 일어나더니, 작업실의 문을 닫고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올리버! 당신은 하품 그만하고 저좀 도와줘요.”


“뭘?” 눈을 끔뻑이며 올리버가 말했다. “연금술사의 작업실 안에서, 내가 도울 일이 있어? 나는 들판과 숲, 산, 강과 계곡을 뛰어다니는 사람이지······.”


“약 만드는거 도와달라고 할 거 아니에요.”


“그럼? 내가 뭘 도와?”


“연극에 좀 어울려 달라고요.”


“연극?” 올리버는 손가락으로 자기 자신을 가리키며 다시 말했다. “내가? 연극?”


“네. 도와줄거죠?”


“왜? 아니, 나는 연기도 잘 못해. 나는, 펠릭스 너나 네 친구처럼 낯짝이 두껍지도 않고······.”


“그냥 좀 도와줘요. 금방 끝나니까.”


“아니, 내 참. 이제 나한테 별걸 다 시키는군. 서커스 무대 위에 한번 올라갔기로서니, 내가 아주 배우라도 된 줄 착각하는거 아냐?”


“그럴리가요! 하지만, 당신밖에 없어서 그래요. 자요. 여기, 벌써 대본은 다 써 놨으니까.”


펠릭스는 언제 쓴 것인지, 올리버에게 글자가 빼곡하게 적힌 종이를 내밀었다.


“어디, 음. 아니, 이게 뭐야?”


“연극이죠.”


“또?” 종이를 읽어내려가던 올리버는, 한숨을 쉬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난, 이런거 자신 없는데.”


“잘 될 거예요. 거 걱정은.”


“그럼, 펠릭스. 넌 뭐할건데?”


“약 만들어야죠.” 시계를 돌아보며 펠릭스가 말했다.


“이 늦은 시간에?”


“한 시간 이내에.” 펠릭스가 웃었다. “에밀리아 콘월이 바랄 만 한, 바로 그 약을 만들어야죠.”


“거 참. 느긋하게 해도 될 걸. 장래에 무슨 마술사라도 되려는 거야? 손님이 오기도 전에 미리 생각을 알아맞히는 마술이라도 부리게?”


“어떤 약을 먹는지 못지 않게, 언제 어떻게 약을 먹는지도 중요하니까요. 극적인 효과를 최대한으로 내려면, 마술같은 기법을 쓰기도 해야죠. 자, 올리버! 이건 속도전이에요. 한 번 만에 실수없이 해치워야 한다고요. 당신도 이제 투정 그만 부리고 대본이나 잘 봐요. 어찌됐든 에밀리아는 큰 손님이고, 그녀에게서 실비아를 쏙 빼오려면 이게 최선같으니까.”


“똑같은 말을 해도, 오해 사기 쉬운 말만 골라서 하는군.”


“뭐 어때요. 달리 듣는 사람도 없는데. 그럼, 시작하죠!”


그리고 펠릭스는 솥 아래 장작을 가득 쌓고 불을 붙였다.




오후 열 시가 조금 넘었을 무렵, 에밀리아는 연금술사의 작업실 문을 살짝 노크했다.


“들어오시죠.”


문이 달칵 열리고, 에밀리아가 조심스레 그 모습을 드러내 보였다. 잠을 자려다가 만 것인지, 아니면 자다 깬 것인지, 아니면 그저 시간이 되어서인지, 그녀는 나이트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늦은 밤에, 죄송해요.”


“괜찮습니다. 저는 시간을 따지는 연금술사는 아니라서. 들어오시죠.”


에밀리아는 휘청이는 등불이 밝혀진 작업대 테이블로 걸어와 앉았다.


“꽤 좋은 작업실을 취미로 갖고 계시더군요.”


“아, 그래요.” 에밀리아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남편이 만들어 줬어요. 무리한 부탁이었을텐데도.”


“남편분은, 참 사려깊은 사람이군요?”


“글쎄요.” 에밀리아가 쓸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어쩌면, 제게 과분한 사람일지도.”


“결혼했으면 그만이죠. 이혼할것도 아니잖아요?”


“그건, 그렇네요.” 에밀리는 잠시 웃었다. “그래서, 선생님. 약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려고 하는데요······.”


“잠깐!” 펠릭스가 말을 자르고 끼어들었다. “그 전에, 부인께 할 말이 있습니다.”


“뭐죠?”


“첫 번째로, 저는 당신이 독살을 계획하고 있었다는 것을 아주 분명하게 확신합니다.”


에밀리아의 안색이 조금 굳었다.


“두 번째도 있나요?”


“네. 물론이죠. 하지만, 그 전에, 첫 번째 먼저 말하고 넘어가죠. 부인.” 펠릭스가 몸을 움직이는 바람에, 그의 옷자락에 걸려 등불의 갓이 조금 움직였다. 그래서, 펠릭스의 얼굴은 조금 어둠에 가리었고, 대신 에밀리아의 얼굴은 조금 빛에 노출되었다.


“말씀하시죠.”


“작업실에서, 실험의 흔적을 찾았습니다.”


“그건, 불가능해요.” 에밀리아가 웃으며 대답했다. “작업실은 항상 깨끗하게 청소하거든요. 하인들을 쓰지도 않고, 그것도 제가 직접.”


“소각로 아래는 청소하셨나요?”


에밀리아가 다시 조금 굳었다. 그러자, 펠릭스가 씩 웃었다.


“땅에 버린다고 쓰레기가 사라지는건 아니죠. 사실, 쓰레기를 처리하는데는 꽤 많은 일손이 필요하답니다.”


“하시고 싶은 말씀이 뭐죠?”


“독물에 중독되어 죽은 짐승의 뼛조각을 소각로 관 아래에서 찾았습니다. 이렇게, 시약을 뿌려 지금은 검게 변색됐지만요.” 그러면서 펠릭스는 주머니를 뒤적여 시커먼 뼛조각 몇 개를 테이블 위에 늘어놓았다. “쥐와 토끼. 구하기 쉽고, 우리 연금술사들도 약을 실험할 때 종종 쓰죠.”


에밀리아는 침묵했다.


“두 번째 이야기는 뭐죠?”


“아! 그 전에, 독살을 계획하신 이유에 대해서는 대답해 주시지 않으실 겁니까?”


“그럴 의무는 없어보이네요.”


“사실이긴 하군요.” 펠릭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정말 한 마디도 안 해주실 겁니까?”


“지긋지긋해서 그랬어요. 하지만, 진심으로 죽일 마음은 없었어요. 그냥, 모든게 답답해서 그랬죠.”


펠릭스는 잠시 가만히 있다가, 다시 씩 웃으며 말했다.


“그럼, 두 번째로 넘어가죠. 부인. 마당에 심어진 나무. 어떤 나무인지 아십니까?”


“귀한 나무라고만 알고 있어요.”


“그래요. 이름도 모르는군요?”


“남편이, 멋대로 사온 나무니까요.” 에밀리아가 조금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떨구었다. “아직도 기억해요. 아이가 태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남편은 그 나무를 집으로 가져온 날, 여느 때보다도 행복해 보였어요. 나는, 이렇게 살고 있는데도.”


“이렇게 살고있다, 하심은?”


“지루해요. 지쳤어요.” 에밀리아가 쓸쓸하게 웃었다. “결혼 생활은, 너무 지루하고 평범해요.”


“이해합니다. 다들 그렇게들 말하곤 하죠.”


“당신은 결혼을 해 보았나요?” 에밀리아가 묻자, 펠릭스는 웃으며 대답했다.


“결혼한 손님들은 자주 만나봤죠. 저를 찾아오는 사람중에, 결혼해서 좋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더군요.”


“그렇군요. 아무튼, 그래요. 저는 그렇게 질려버린채로 겨우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는데, 남편은 무슨 어린아이마냥 나무 한 그루를 가져와서는 직접 삽을 들고 마당을 파기까지 하더군요. 그 꼴을 보고 있었으니, 제가 그 나무를 싫어하는것도 이해가 가지 않나요?”


“저는 아무것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래요.”


“뭐, 그럴지도요.” 에밀리아가 다시 시선을 떨구었다. “저를 이해해 주는 사람은 거의 없죠. 실비아 뿐이었는데······.”


“뭘 이해해 주던가요?”


“꿈이요. 실비아도, 저도, 꿈결같은 삶을 살고 싶어했죠. 환상과 낭만. 꿈이 가득한 모험. 그런 모험으로 가득한 삶. 아름답죠. 하지만, 그것들은 전부 거짓말이에요.” 잠시, 추억에 잠겨 말하던 에밀리아는, 단호하게 말을 끝맺었다. “오직, 지루한 현실 뿐이죠.”


“그렇다면, 부인. 이제 그 나무가 무슨 나무였는지, 말씀드려도 될 것 같군요.” 펠릭스는 목을 가다듬고, 대단한 비밀을 말할 때처럼 이렇게 속삭였다. “그건, 황금사과가 열리는 나무랍니다.”




에밀리아는 그의 말을 듣고, 코웃음을 쳤다.


“노란색 열매가 열리는 사과나무 품종을 말하시나요? 그렇다면, 선생님이 잘못 보신게 분명해요. 그 나무는, 전혀 사과나무처럼 생기지 않았거든요.”


“아하! 연금술사를 가르치려 하는군요. 뭐, 이해합니다. 하지만, 저건 분명히 ‘진짜’ 황금사과가 열리는 나무입니다. 약용으로 쓰는 진짜 황금사과에 대해서는, 사실 조그마한 오해가 하나 있거든요.”


“뭐죠?”


“사실, 저 나무는 당연하게도,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뭐, 나무니까 잘 찾아보면 맺기는 맺겠죠. 하지만 황금 사과가 열리는 나무는 아닙니다.”


“그런데요?”


“그런데, 여기서부터 아주 재미난 일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펠릭스가 웃으며 말했다. “황금 사과는, 사실 나무에 기생하는 기생목의 열매입니다.”


“그 커다란 열매가요? 기생하는 나무라고 해 봐야, 그렇게 크지도 않잖아요. 그런데, 그 큰 열매를 맺는다고요? 전에 경매장에서 봤을 때는, 거의 수박 만 한 황금사과도 있던걸요?”


“기생하는 입장이니, 잎도 뿌리도 뭐도 내릴 필요가 없으니까요. 남의 양분으로 자기 열매만 만들면 그만이죠. 아무튼, 그 기생목의 씨앗이 나무에서 싹을 틔워, 그 나무의 양분을 빨아먹고 맺은 열매가 바로 황금사과 입니다. 진짜 황금사과 말이죠. 그리고, 그 나무가 지금 마당에 심어져 있다고요.”


에밀리아는 잠시 생각하다가, 여전히 탐탁찮다는 투로 말했다.


“그 씨앗은 어디서 오는데요?”


“새가 옮겨요. 새의 깃털에 붙어있던 씨앗이, 나무 위에 떨어지는 거죠. 도깨비바늘 아시죠? 그런 풀과 비슷하다고 보면 돼요.”


“그렇다면, 그 나무는 여전히 쓸모가 없겠네요. 나무에, 새가 둥지를 트는 걸 한 번도 못 봤거든요.”


“실비아는 새의 깃털을, 나무의 옹이에서 찾았답니다.”


에밀리아의 얼굴이 다시 굳었다.


“잘못 봤겠죠.”


“잘못 봤으면 뭐 어떤가요? 부인. 어쨌든, 남편분이 아무 생각도 없이 황금사과가 열리는 나무를 마당에 심었을까요? 듣자하니, 동화책을 잔뜩 쌓아두셨다던데.”


에밀리아의 얼굴이 더욱 굳었다.


“하인이 입을 함부로 놀리던가요?”


“제가 캐물었죠. 아무튼, 그래요. 당신이 꿈에 젖어 사는 사람인줄, 남편이 몰랐을까요? 남몰래 동화책을 읽는줄 몰랐을까요? 결혼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줄 모르고 살았을까요? 다른 나무도 아니고, 바로 그 황금사과 나무를 마당에 심으면서도?”


“남편은, 몰라요.” 에밀리아가 말했다. “그는, 일밖에 관심이 없거든요.”


“그런가요? 나뭇가지에, 지지대를 세워 곧고 굵은 가지를 하나 만들어 둔건 아시나요? 그네를 매달기 좋아 보이더군요. 그러고보니, 그네가 달린 나무가 있는 마당이 그려진 동화책이 제법 많죠. 제가 어릴때까지만 해도요. 혹시, 당신도 그런 동화를 읽고 자랐나요?”


에밀리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녀는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선생님.”


“네.”


“구구절절, 말씀을 많이 하셨지만.” 에밀리아가 눈을 들어올렸다. 그녀의 조금 서글픈 눈에는 눈물이 살짝 맺혀 있었다. “이제는, 별 상관 없을것 같네요.”


펠릭스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약 이야기를 할 때로군요.”


에밀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약을 만들어 드릴까요?”


그리고, 여기서, 펠릭스는 희미한 웃음 뒤에 잔뜩 긴장한 얼굴을 감추고, 에밀리아의 입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저는, 제가 원하는 약은.”


펠릭스의 얼굴이 더욱 극적으로 굳었다.


“저는, 망각의 약을 원해요.”


그 말을 듣자, 펠릭스의 긴장이 해소되었다. 그는 아주 여유로운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럴 줄 알고, 미리 만들어 뒀습니다.”


“그런가요?”


“네.”


“선생님은 마술사 같은 기질이 있군요.”


“제 취미입니다. 해서, 그게 바로 이 약입니다.”


펠릭스는 테이블 아래에서 조금 커다란 약병을 하나 꺼내 올렸다. 그 약병 안에는, 검은 액체에 새하얗게 반짝이는 점들이 알알이 박혀, 느릿하게 움직이고 있어 마치 밤하늘처럼 보였다.


“이게, 망각인가요?’


“그래요. 검고, 짙고, 뻑뻑하고, 끈적하고, 느리지만, 절대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망각입니다.”


“그래도, 안에서 별이 빛나네요.”


“모든 것을 잊어버릴 수는 없는 법이죠.” 펠릭스가 대답하자, 에밀리아는 조금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걸 마시면 되나요?”


“아, 조금 절차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절차는, 올리버가 알려 줄 겁니다. 듣자하니, 올리버와는 이미 술집에서 만난 적도 있었다죠?”


“맞아요. 조금 남자다운 면이 있더군요.”


“그렇다니 다행입니다. 그럼, 올리버가 하는 말을 의심하지 않고, 진심으로 믿을 수도 있겠군요?”


“그렇네요.”


펠릭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올리버를 불러오죠.”


“저기, 잠깐만요.” 막 떠나려는 펠릭스를, 실비아가 붙잡았다.


“뭐죠?”


“이 약을 먹으면, 전부 잊나요?”


“원하는걸 원하는 만큼 잊을 겁니다.”


“그런가요. 부작용은 없나요?”


“없지는 않을 겁니다. 예상 밖의 기억을 잊어버릴 수도 있죠. 기억은, 저만큼 뛰어난 연금술사라 하더라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없으니까요. 인간의 고등한 정신기능에는 미지의 영역이 많아요.”


“그렇군요······.” 에밀리아는 약병을 집어들고 만지다가, 조금 머뭇거리면서 말했다. “저기, 선생님. 혹시나요.”


“네.”


“저도, 갑자기 이게 떠오른 이유를 모르겠는데.” 허탈하게, 조금 서글프게 에밀리아가 웃으며 말했다. “자꾸 생각이 나네요.”


“말씀하시죠.”


“실비아가, 자두를 먹지 않게 된 일이요.” 에밀리아가 말했다. “그 이유를, 아시나요?”


“아, 말해주더군요.”


“뭐죠?”


“어느 여름 날에, 자두를 먹다가 안에서 벌레가 나왔대요. 그 뒤로는, 자두에는 손도 못 대겠다더군요. 어때요? 어린아이다운, 귀여운 이유죠?”


펠릭스의 대답을 들은 에밀리아는, 그대로 어안이 벙벙한채 굳어버렸다가, 갑자기, 몇 십 년동안 웃음을 참았던 것처럼 웃음을 터트렸다. 거기에는 귀족의 고상함도, 우아함도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다만 소녀의 순수한 웃음 뿐이었다.


“세상에. 그게, 사실인가요?”


“그래요. 실비아는 제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정말, 어이없는 이유네요.” 조금 진정하며 에밀리아가 말했다. “저는, 그런 줄도 모르고. 저는, 그게 항상 눈에 밟혔어요. 저는, 이맘때 결혼을 했거든요. 아시다시피, 이 시기에 자두는 구하기 힘들어요. 그렇지만, 저는 무리를 해서라도, 부모님과 싸우고 남편이 힘들어 하는걸 알면서도, 자두 파이를 만들어 냈어요. 피로연 자리에, 오직, 실비아를 위해서. 약속을 깨고 먼저 결혼하게 되어 미안하다고, 사과의 뜻으로서. 그런데, 실비아는 파이에 손도 안 대더군요.”


“그렇게 된 일이었군요.”


“그래요. 그랬어요. 그 뒤로는, 남편도 곱게 보이지 않더군요. 내 속도 몰라주고, 마당에 나무나 심고있는 꼴이라니. 실비아와도 예전처럼 지낼 수가 없었어요. 자꾸 미안한 생각이 들더군요. 그런데, 그게, 그 모든 일들이, 제 사소한 착각과 오해에서 생긴 일이라니······. 정말, 정말이지······.”


에밀리아는 약병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이걸 마시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요?”


“잊어버리고 다시 해 볼 수는 있겠죠. 하지만, 무슨 수를 쓰더라도 시간을 돌리지는 못할 겁니다.”


“아니오. 그만하면 충분해요. 결국, 제가 불행했던건, 저 때문이었군요. 다른 누구도 아니고. 그러니, 저만 달라지면 그만이죠. 안 그런가요?”


펠릭스는, 씩 웃으며 말했다.


“올리버를 불러오죠.”


에밀리아는 고개를 끄덕였고, 펠릭스는 작업실 밖으로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선생님.”


펠릭스가 우뚝 멈춰섰다.


“정말, 고마워요. 약을 만들어 줘서.”


“뭘요. 연금술사니까, 당연한 제 일입니다.”


"저기, 그리고 고엽제 말이에요."


펠릭스는 에밀리아를 돌아보았다.


"나무를, 살리는 쪽으로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펠릭스는 작업실을 걸어나가, 대기하고 있던 올리버를 불렀다.


“연습한 대로만 해요.”


“그래. 어휴, 살 떨려.”


“긴장하지는 말고요.”


“노력은 해 볼게.”


그리고 올리버는 작업실 안으로 들어가, 가볍게 헛기침을 하며 에밀리아에게 인사를 했다.




“반가워요, 올리버.”


“저도 반갑습니다, 부인.”


테이블에 마주앉으며 올리버가 말했다. 그는, 펠릭스가 가져온건지 뭔지 귀족의 멋스러운 신사복을 빼어입고 있었다.


“옷을 달리 입으니, 인상이 달라 보이네요.”


“옷이 날개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그렇네요. 그래서.” 에밀리아는 약병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제게, 약을 먹는 방법을 알려주신다고요?”


“그렇습니다. 이제부터, 제가 시키는대로 하시면 됩니다. 우선, 온 몸의 긴장을 풀어보죠. 자,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는 겁니다.”


“이렇게요?”


에밀리아는 두 눈을 살짝 감았다.


“잘 하고 있습니다.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숫자를 세어 보십시오. 하나, 둘, 셋, 그리고 다시 내쉬고. 다시 숫자를 세고······”


올리버는 에밀리아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 계속 곁눈질하며 살폈다.


“자, 충분히 긴장이 풀린 것 같군요.”


“그렇네요.”


여전히 눈을 감은채, 에밀리아가 말했다.


“이제, 몸을 조금 편안하게 의자에 기대 보세요.”


“했어요.”


“그리고, 하나하나 기억을 떠올려 봅니다. 자, 지우고 싶었던 순간들을 천천히 떠올려 보세요. 그것들은 하나같이 위험하고, 수치스럽거나, 무시무시한 기억일지도 모릅니다만. 제가 당신과 함께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하고 있어요.”


“그리고, 이제 커다란 붓을 들어 기억 위를 덧칠하는 상상을 해 보세요. 새하얀 종이처럼 하얀 물감을, 기억 위를 천천히 덮어 씌우는 겁니다.”


에밀리아의 손가락 끝이 살짝 떨렸다.


“계속 지우는 겁니다. 서두를 필요도 없고, 겁먹을 필요도 없어요.”


다시 에밀리아의 손가락이 떨렸다.


“기억이 지워졌나요?”


“네. 거의 다 한 것 같아요.”


“그러면, 다시 심호흡을 해 봅시다. 이제, 기억에서 빠져나와, 기나긴 통로를 지나 현실로 돌아와 봅시다.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하나, 둘, 셋······”


그리고 올리버는 몇 번 정도 심호흡을 더 반복한 뒤에, 마침내 에밀리아에게 눈을 뜨라고 했다.


“자, 이제 완전히 돌아왔나요?”


“네. 완전히 눈을 떴네요.”


“그러면, 그 약을 마시세요. 다시 눈을 감고, 뚜껑을 열고, 망각을 음미하며 천천히 마시세요. 아까 하얀 물감으로 지워버린 기억 위에, 조그마한 안개를 드리운다고 생각하며, 약을 마시세요······”


에밀리아는 약병의 뚜껑을 열어, 밤하늘과 같은 약을 마시기 시작했다.


“다 마셨어요.”


“이제, 됐습니다.”


“끝인가요?”


올리버는 손뼉을 짝 치며 이렇게 말했다.


“이제, 끝났습니다. 현실로 돌아왔습니다.”


“그래요. 그런 것 같네요.”


“그럼, 부인. 이제 부인이 하실 일은 단 하나 뿐입니다.”


“뭐죠?”


“푹 잠드는것.”


에밀리아는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고하셨어요, 올리버.”


“수고하셨습니다, 부인. 그럼. 편안한 잠자리 되시길.”


에밀리아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작업실을 빠져나와 그녀의 방으로 돌아갔다.




다시 아침의 밝은 태양이 대지를 비추기 시작하자, 콘월 후작의 저택에 잠들어 있던 사람들도 하나둘씩 잠자리에서 깨어났다. 오늘따라, 저택에 흔히 끼곤 하던 안개가 드리우지 않은 것이 그저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하며, 그들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좋은아침.”


황량한 식당에서, 먼저 일어난 실비아가 펠릭스와 올리버를 맞이해 주었다.


“저는 오늘 돌아가요.”


“알아요. 저도 따라갈 거예요.”


“언니에게, 더이상 미련은 없나요?”


“아마도요.” 실비아는 조금 퉁명스레 대답했다.


“사실, 아예 미련이 없을 수는 없지.” 올리버가 옆에서 끼어들며 말했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잖아?”


“뭐, 그렇기는 하죠. 그러고보니, 실비아.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뭐가요?”


“세상에, 똑같은 사람이 존재할까요?”


실비아는 빵을 우물거리던 입을 멈추었다.


“그게 무슨 질문이에요?”


“그냥요. 어떻게 생각하죠?”


실비아는 다시 빵을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예전에는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없나봐요.”


“어른이 되었군.”


“네?” 실비아가 올리버를 돌아보았다. “갑자기, 무슨 말이에요?”


“자기 고집을 꺾는다는게, 어른이 되었다는 증거야.” 올리버가 다시 말하며 실비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정말, 제멋대로인 기준이군요. 그러면, 펠릭스는 평생 어린아이 겠어요?”


“왜 날 걸고 넘어져요?”


“그렇잖아요. 언제, 당신이 자기 고집 꺾은적 있어요?”


“그러게. 이번에는 실비아의 말에 일리가 있는걸.”


“올리버! 하여튼, 하룻밤사이에 최면술좀 가르쳐 줬기로서니, 갑자기 재담꾼의 꿈이라도 꾸게 되었나요? 그런 거면, 관둬요. 솔직히, 당신 말솜씨 진짜 없어요.”


“아니, 펠릭스. 도와줬더니, 그렇게 나오기야?”


“둘 다, 적당히 하고 아침이나 먹어요. 봐요!” 살짝 열린 식당 문틈을, 실비아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하인들이 짐 싣고 있잖아요. 하루종일 짐마차를 문 밖에 세워둘 생각인가요?”


“그렇기는 하네. 자, 펠릭스. 어서 먹자고.”




아침식사를 끝마칠 즈음, 식당으로 에밀리아가 걸어 들어왔다. 그러나, 그것은 어딘가 음울한 기색이 드리운 후작 저택의 주인 에밀리아 콘월이라기 보다는, 동화와 낭만을 좋아하는 실비아의 친언니 에밀리아 로즈베리에 가까워 보였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부인.”


“그렇네요.” 에밀리아가 웃으며 대답했다.


“어딘가,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나요?”


“아, 연금술사 선생님. 글쎄요. 잘 기억은 안 나는데, 뭔가 오늘따라 상쾌하네요.” 에밀리아가 대답했다. 그러자, 펠릭스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마저 식사를 했다.


“실비아. 너도 좋은 아침.”


“언니. 나 말야.” 그리고 실비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에밀리아와 마주 섰다. “나는, 아직. 어른이 되고싶지 않아.”


“그래? 그럼, 네 마음대로 하면 돼.” 에밀리아는, 아주 친절하게 웃으며 실비아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어 주었다. 하루사이에 변화한 언니의 태도에, 실비아는 잠시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내 마음대로 해?”


“그래, 실비아. 그러고보니, 연금술사와 모험을 하고 있다고 그랬지? 잘 됐어. 그러면, 꿈결같은 모험이 가득한 삶을 살고 있는거 아냐?”


“뭐, 응. 사실, 그렇기는 하지······.”


“잘 됐다.” 다시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에밀리아가 말했다. “네 꿈이었잖아. 그렇게, 동화처럼 살아가는거.”


“아, 응. 그래. 그럼, 언니. 나, 저 사람들이랑 같은 마차 타고 갈게.”


“그래. 가서도 건강해야 한다, 실비아.”


“응.” 실비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기 짐을 챙기려 방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몇 번이나 에밀리아를 뒤돌아 보았다.


“잘 됐네요.”


“그렇네요. 그런데, 뭔가 허전하기도 해요.”


“뭐가요?”


“음. 글쎄요.” 에밀리아가 고개를 살짝 위로 들어올리고, 눈을 깜빡이며 생각했다. “뭔가, 잊어버린 기분이에요.”


“사소한 일이었겠죠. 정말 중요한 일을, 잊어버릴 리 없잖아요?”


“하긴, 그렇네요. 아, 그러고보니. 정산을 했던가요?”


“아직 안 했습니다.”


“이런, 죄송해요. 그럼 약값에 대해 이야기를 해 볼까요?”


“아침식사 시간인데요? 예의에 어긋나지 않나요?”


에밀리아는 주변을 살짝 둘러보고는, 개구쟁이처럼 웃으며 대답했다.


“뭐 어때요. 우리들 뿐인데.”


“하긴. 그럼, 어디.”




정산을 마치고, 짐을 도로 챙긴 펠릭스와 올리버는 큼직한 짐마차에 타고 실비아가 오기를 기다렸다.


“나 두고 가지마요!”


곧, 현관문이 열리며 실비아가 호들갑스럽게 나타났다.


“안 가요. 걱정은.”


“그럼, 좀 내려서 기다려주지. 먼저 가는줄 알았잖아요.”


마차에 짐을 실으며 실비아가 투덜거렸다. 그러는 사이, 현관문이 열리더니 에밀리아가 웃으며 이쪽으로 걸어왔다.


“언니. 나, 진짜 가 볼게.”


에밀리아는 말없이 실비아를 끌어안아, 등을 두어번 토닥여 주었다.


“실비아. 종종 놀러와.”


“아, 응······”


“자두나무, 심어둘게. 과수원에 자리가 조금 있거든.”


“나, 자두 더 안 먹어.”


그러자, 에밀리아는 주머니에서 자두를 하나 꺼내, 소매로 슥슥 닦은 다음 한 입 베어물었다.


“뭐해?”


“봐, 실비아.” 베어문 자두를 실비아에게 내밀며, 에밀리아가 말했다. “벌레 없어, 여기에는. 이제 안심하고 먹을 수 있겠지?”


실비아는 그 말을 듣더니, 깜짝 놀랐다가, 당황했다가, 머뭇거리며 자두를 한 입 베어물었다.


“맛있지?”


“응. 맛있다. 고마워 언니.”


“그래. 실비아. 나중에 또 놀러와. 연금술사 선생님도, 조수분도 같이 데려와도 돼.”


“저 사람들은 없는 편이 나아.”


에밀리아는 농담을 하는 실비아에게 웃어주었고, 실비아도 더이상 아무런 미련도 남지 않은 것처럼 가볍게 마차에 올라탔다. 마부가 채찍을 휘두르며 말을 몰자, 마차는 금새 도로 위를 달려갔다.




“잘 됐네.”


올리버가 운을 뗐다.


“그러게요.”


실비아도 대답했다.


“정말이지······.”


펠릭스가 운을 떼자, 두 사람이 그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지긋지긋했어요!”


“펠릭스! 우리 언니네 집에서 이틀이나 공짜로 묵어놓고서는, 그게 할 말이에요?”


그녀의 외침에, 마부조차 깜짝 놀랄 지경이었다.


“뭐 어때요! 저를 고용하고 대접한건 당신 언니인걸. 제가 대접해 달라 했나요?”


“그건, 그렇네요.”


“하여튼, 지긋지긋했어요! 귀족들이란, 하나같이 어렵고 복잡하며 귀찮은 일만 떠맡긴다고요. 가령, 이런 식이죠. ‘이봐, 연금술사. 혹시, 고철더미를 금으로 바꾸는 약 없나? 아, 물론, 경비대에 흔적을 들키지도 않고, 세무서에서 낌새를 잡지도 못할 만큼 비밀스러운 것으로.’ 따위의 부탁이나 하죠. 어휴, 하나같이. 세상 어려운 줄을 모른다니까.”


“그러게 말야. 그렇게 속편한 약이 어딨어?”


올리버가 헛웃음을 지으며 말하자, 펠릭스의 얼굴이 조금 굳었다.


“있어?”


“아무튼.” 펠릭스가 말을 돌리려 하자, 다시 올리버가 캐물었다.


“그런 약이, 혹시라도. 진짜 있는거야, 펠릭스?”


“남한테 만들어 준 적은 없어요. 걱정마요.”


“네가 만들어 쓴 적은 있어?”


“있어요?” 실비아까지 가세했다.


“없어요, 없어! 내 참. 바랄 걸 바라야지. 나는, 아주 성실한 왕국의 시민이라고요. 연금술사들 숲에서, 대스승님이랑 몰래 장난으로 만든 적은 있었어요. 녹슨 호미던가, 괭이던가를 약에 담갔는데······”


“팔았어?”


“안 팔았어요! 어휴. 그만 좀 물어봐···.”


“어어!”


마차 앞쪽에서, 마부의 불길한 비명이 들리더니, 우당탕 소리를 내며 마차가 부서질듯 흔들렸다. 금방 진동이 멎고, 마차도 움직임을 멈추자, 세 사람은 당황하여 서로를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죠?”


“아이쿠, 죄송합니다요 선생님들!” 마부가 멋쩍게 뒤통수를 긁으며 마차 문을 열어주었다.


“뭐요?”


“아니, 도로가 조금 좁다보니. 맞은 편에서 오던 마차랑 바퀴가 스쳤습니다. 바퀴를 갈아야 하겠는데······.”


“아, 뭐. 그럼 기다리고 있죠. 우린 바쁠거 없으니까.”


“감사합니다요, 선생님들!”




펠릭스와 올리버, 실비아는 마차에서 폴짝 뛰어내려, 도롯가의 풀밭 위에 섰다. 그리고, 이들이 탄 짐마차와 부딪혔단 맞은편의 이인승 마차에서도, 마부가 문을 열어주니 누군가 우아하게 내렸다. 신사복, 구두, 모자. 그야말로, 신사의 전형같은 남자였다.


“죄송합니다. 다치신 곳은 없습니까?”


누구의 잘못인지 불분명한 상황에서도, 그는 먼저 고개를 숙이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우린 다들 멀쩡합니다. 그보다, 선생님께서는 다치신 곳은 없으신지요?”


“저도 괜찮습니다. 이래뵈도, 저는 배를 자주 타다보니. 건강하거든요.”


신사가 고개를 들었다. 햇볕과 바닷바람에 거뭇하게 그을린 잘생긴 그의 얼굴이 보기 좋았다.


“그나저나, 짐은 멀쩡하십니까?”


“아, 뭐 괜찮을 겁니다. 거의 연금술 약재거든요. 풀이나 벌레, 또는 열매와 씨앗을 말리거나 볶거나 태우거나 한 것들이요.”


“연금술이라!” 남자가 놀라운 목소리로 말했다. “돌아가시는 길입니까?”


“그래요.”


“조금 아쉽군요. 아내가 알았다면, 좋아했을 텐데.”


“아내분이 연금술에 흥미가 있나요?”


“그렇습니다. 언젠가, 제게 작업실을 만들어 달라고 해서. 제일가는 건축가들과 연금술 가게를 뒤져가며 작업실을 만들어 주었거든요.”


“부인 사랑이 지극하시네요.”


“아내는, 정말 우아하고, 곱고, 아름다운 사람이거든요. 꼭, 동화에서 금방 나온 공주님처럼. 저같이, 몰락해가는 가문의 귀족과 결혼해 준게 기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렇군요.” 펠릭스는 실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슬쩍 고개를 돌리다가, 그가 타고온 마차의 열린 문 너머로 보이는 새하얀 꽃다발을 발견했다.


“꽃다발이군요?”


“아, 그렇습니다.” 조금 멋쩍다는듯, 그가 웃었다. “아내는, 꽃을 좋아하거든요. 그런데, 결혼한 뒤로 꽃을 가져간 적이 없어서 말입니다.”


“왕국에 흔히 피는 꽃처럼 보이지는 않네요.”


“바다 건너에서, 덜 자란 것을 가져와 배 위에서 직접 길러 피운 꽃입니다.”


“대단한 열정이군요. 오직, 부인 분을 위해서?”


“그렇습니다.” 조금 부끄럽다는듯, 그가 다시 웃었다.


“대단하군요.”


펠릭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열심히 바퀴를 갈던 마부가 외쳤다.


“다 고쳤습니다요!”


“이만 헤어질 시간이군요. 잠깐이었지만, 반가웠습니다.”


그러자, 그 남자는 펠릭스에게 대뜸 손을 내밀었다.


“마테오 콘월입니다.”


“펠릭스. 행복의 연금술 가게의 주인입니다. 반가웠습니다.”


“인연이 닿는다면, 다시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때는, 아내에게 연금술이라도 조금 가르쳐 줬으면 합니다.”


“충분한 비용만 지불한다면, 얼마든지.”


그러자 콘월 후작은 웃으며 자신의 마차로 올라탔고, 펠릭스도 먼저 마차에 타 있던 실비아와 올리버의 곁으로 돌아갔다.


“뭐하는 사람이래? 둘이 계속 떠들더만.”


“뭐, 괜찮은 사람이네요.”


“뭐가요?”


“그냥요.” 다시 마부의 채찍질과 함께, 힘찬 이럇 소리가 들리며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펠릭스는 마차의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하여튼, 귀족들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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