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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유자 님의 서재입니다.

행복의 연금술 가게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녹색유자
작품등록일 :
2021.10.08 16:53
최근연재일 :
2022.01.13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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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28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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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쪽

42화

DUMMY

펠릭스의 일행과 헤어진 실비아는 다시 황량한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저택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실비아는 열쇠로 잠긴 방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방 안을 가만히 구경하다 나오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처음에는 그저 호기심으로 시작한 일이었지만, 펠릭스와 올리버를 뜻하지 않게 만나게 된 뒤로는, 뒤숭숭한 마음을 달래기 위한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왜인지 신경쓰여, 그녀는 펠릭스와 올리버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 머리 끄트머리만 살짝 내밀어 그들을 훔쳐보았다. 그들과 같이 연금술 가게에 있었을 때는 전혀 느껴보지 못한 어떤 이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일까, 펠릭스가 그녀를 찾았을 때, 그녀는 자기도 이유도 모른채 그저 도망치고 말았다.




실비아는 기억을 떨쳐내기 위해 세차게 고개를 내저으며 또 어느 방의 문을 달칵 열었다.

이곳의 방들은 대부분 객실로 쓰려고 만든 것 같았다. 사람이 머문 흔적이 전혀 없는 방들 뿐이었다. 이방 저방을 드나들던 실비아는, 이제 복도 끝에 단 하나의 방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그녀는 열쇠를 돌려 자물쇠를 풀고, 문 손잡이를 조심스럽게 잡은 다음,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고, 그녀는 감았던 눈을 떴지만, 그곳에 있는 것은 단지 지루할 정도로 평범한 빈 방이었다.




조금 허탈한듯 손을 떨구며, 실비아는 깨달았다. 이 저택 그 어디에서도, 그녀가 가지고 있는 꿈이라든가, 그녀가 찾는 낭만이라든가, 하다못해 언니와의 어린 시절의 추억 조차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을. 실비아는 도로 방문을 닫고 열쇠로 하나하나 잠근 다음, 쓸쓸한 그림자를 남기며 복도 저편으로 걸어갔다.




자기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가만히 걸터앉은 실비아는 다시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추억을 더듬었다. 언니와 같이 동화책을 읽고, 언니가 부모 몰래 가져온 낭만 소설을, 촛불의 희미한 빛에 의지하여 같이 읽었다. 가끔씩은, 그녀보다 나이가 다섯 살이나 많았던 에밀리아가 유모대신 실비아가 잠들 때까지 옆에서 동화책을 읽어주기도 했다. 부모님께 혼난 날 밤이면, 둘이서 몰래 창문 밖으로 집을 빠져나가 근처 숲을 모험했다. 그럴 때면, 앞장서는 것은 항상 실비아였다. 그리고 실비아는 그것을 스스로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그런데, 바로 지금 그녀의 언니는 그 순수한 모험을 위험한 일이었다고 일축하며 실비아의 자랑스러운 기억의 한 장면을 더럽혔다.




그래서 실비아는 온 몸의 기운이 쭉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다시 힘없이 침대위에 벌러덩 드러누워버렸다. 이곳 저택에 온 뒤로, 온 몸의 힘이 계속해서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마치, 사람의 정력을 흡수하는 마귀가 저택의 어느 어두운 그림자 속에 숨어있기라도 한 듯.


“똑똑”


노크소리. 실비아는 귀족으로서의 지체도 무시한 채, 그대로 침대위에 드러누워 있었다.


“실비아?”


역시, 에밀리아였다. 하인을 시켜도 될 것을, 그녀의 언니는 굳이 동생의 방으로 제 발로 찾아왔고, 그리고 그것조차도 실비아에겐 괜히 짜증나는 일이었다.


“안에 있어?”


실비아가 묵묵부답으로 일관하자, 에밀리아가 소리나지 않게 문 손잡이를 슬쩍 돌려 문을 열었다. 그 모습 조차도, 실비아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었다.


“자?”


“언니.” 여전히 드러누워 천장을 올려다보며 실비아가 말했다. “아직도, 소리 안나게 문 여는법 기억하고 있구나.”


“그래. 어릴 때, 몰래 집에서 빠져나가려고 둘이 같이 연습했잖아.”


“소리내지않고 걷는 방법도.”


“그것도 그랬지. 모퉁이 너머를 살짝 훔쳐보거나······.”


“밤에, 몰래 집을 빠져나가 숲 속을 돌아다니는게 좋았어. 반딧불도 가끔 봤잖아.”


“그런 적도 있었지.” 에밀리아가 옛 추억이 떠올라 반갑다는듯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실비아는 갑자기 반항적으로 상체를 벌떡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그랬는데, 왜 갑자기 덜컥 결혼해 버린거야?”


에밀리아는 복잡한 심경이 조금 묻어 나오는, 어딘가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실비아를 바라보았다.


“대답 안 해줘?”


에밀리아는 천천히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언니. 우리 같이 책도 읽었고, 동화도 읽었고, 같이 그랬잖아. 들판에서 꽃으로 왕관도 만들고, 반지도 만들면서, 언젠가 같이 모험도 떠나보고, 왕자님도 기다리자고······.”


“실비아. 동화는 동화일 뿐이야.”


“소설 책도 있어!”


“그것도.” 에밀리아는 목을 가다듬고 다시 말했다. “다 가짜야.”


“그래도!” 실비아가 반항적으로 에밀리아의 눈앞까지 다짜고짜 걸어와 말했다.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 낭만이, 그 꿈이, 어딘가에는, 분명 있을지도 몰랐잖아! 그런데 언니는, 나 혼자 집에 내버려두고, 혼자 결혼 한다고 그대로 가버렸잖아.”


“실비아. 난 너보다 다섯 살 어른이야.” 에밀리아가 조곤조곤 말했다. “어른은, 아이들과 달리 더이상 헛된 꿈을 꾸지 않아.”


“어른이 뭔데?”


에밀리아는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실비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실비아. 식사할 시간이야.”


“아침 늦게 먹어서, 생각없어.”


“시간에 잘 맞춰야지. 우아한 귀족이 되려면.”


“몰라.”


에밀리아는 실비아의 머리를 그만 쓰다듬고, 몸을 돌려 방에서 걸어나가며 말했다.


“하인들한테 네 몫은 따로 준비해 두라고 일러둘게.”


그러나 실비아는 에밀리아가 문을 닫고 방을 나갈 때까지, 고맙다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




“왜 우리가 이런 곳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거죠?”


귀족들이 사용하는 드넓은 식당이 아니라, 하인들과 고용인들이 머무는 조그만 별채에서 부대껴가며 식사를 하던 펠릭스가, 결국 못참겠다는듯 수저를 테이블 위게 세게 내려놓으며 투덜거렸다.


“뭐 어때. 난 여기가 차라리 속 편해. 본채는, 진짜 무슨 유령이라도 나올 것 같은 분위기라고.”


올리버의 말에는 아무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말을 들은 하인들이 일제히 멈칫거린 것으로 보아, 아마 그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듯 싶었다.


“여긴 너무 좁아요. 눅눅하고.”


“저기 불 때고 있구만 뭘.”


올리버가 식당 저쪽에서 지글거리며 타로으는 화덕의 불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자 펠릭스는 잠시 조용히 툴툴거리다가, 그 반대편에 앉아 식사하던 하인에게 슬쩍 말을 붙여 보았다.


“안녕하세요. 반갑네요. 저는 오늘부로 콘월 후작 부인에게 고용된 연금술사인데. 혹시 성함이···?”


그러자 하인은 불편하다는듯, 어색하게 웃으며 순식간에 음식을 먹어치우고는 먼저 일어나버렸다.


“하인 단속 철저하게 하는구만. 겉으로는 웃으면서, 속으로는 아주······”


자기 그릇을 들고 식당을 나가는 하인의 뒤통수에 대고, 펠릭스가 다시 투덜거렸다.


“잘 모르면서 함부로 말하지마 펠릭스. 그사람이 수줍음이 많았을지도 모르잖아?”


“어련하겠어요. 대체, 무슨 꿍꿍인지 그 에밀리아 콘월은. 사람좋게 서글서글 웃던가, 아니면 악녀처럼 사람들을 휘어잡든가. 둘중 하나만 하기도 벅찰텐데, 둘 다 하려고 애쓰는 꼴이라니.”


“우왕좌왕 하고있는 건지도 모르지.”


“결혼한지 이 년이 넘었는데, 아직까지도 우왕좌왕 하고 있을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펠릭스, 너는 모르겠지만, 평생을 우왕좌왕 하면서 사는 사람도 많아.”


“그 사람들은.” 펠릭스는 빵조각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말했다. “세상 참 피곤하게 사는 사람들이군요.”


“어쩌겠어. 그런 말도 있잖아. ‘갈대같이 흔들리는 것이, 사람 마음이라-’라고.”


“올리버. 얼마전에 술집에 시인이라도 한 명 왔나요?”


“아니, 소식지 사설에서 봤던가, 뭐 아무튼 그랬을거야.”


“그럼 그 사설을 쓴 사람은 한시빨리 직업을 바꾸어야 하겠군요. 남의 말을 베낀것도 모자라서, 원본보다 훨씬 못한 꼴로 만들었으니.”


“그러게. 언젠가 그 사람을 만나게 되면 그 말 꼭 전해줄게.”


“퍽이나요.”


실없는 잡담을 마친 두 사람은 다시 식사에 집중했다. 푸대접과 융숭한 대접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접대를 받으니, 펠릭스는 에밀리아 콘월이 어떤 사람인지 더욱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식사를 마친 펠릭스와 올리버는, 다시 어떤 하인의 안내를 받아 응접실로 들어왔다. 커다랗고 화려한 그림 하나가 벽에 걸려 있었고, 그리고 조그마한 소파 두 개가 낮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형태로 배치되어 있었다.


소파에 앉아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에밀리아 콘월이 응접실 안으로 들어와,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편히 앉으세요.”


다시 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 에밀리아 역시 그들의 맞은편에 가 앉았다.


“해서.” 두 손을 깍지를 낀 채 테이블 위로 올리며 펠릭스가 말했다.


“사업 이야기를 해 볼까요?”


“그래요.”


에밀리아가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펠릭스가 말하기 시작했다.




“일단 저택을 잠시 둘러봤습니다만, 콘월 부인.” 펠릭스가 운을 떼었다.


“네.”


“사실, 제가 보기에는 그리 큰 문제는 없어 보이더군요.”


“그건.” 에밀리아가 웃으며 말했다. “아마, 연금술사 선생님이 제대로 된 곳을 보고있지 않아서 그런 것이겠죠.”


“그럴지도요. 그래서, 정확히 어떤 부분에서 제 도움이 필요하신지 구체적으로 좀 설명해 주시겠어요?”


“글쎄요. 워낙 사소하고 다양한 문제들이 많아서······.”


“그런가요? 그런 것 치고는, 당신은 어떤 약을 필요로 하는지 구체적으로 말 했잖아요? 구충제, 살충제, 제초제, 고엽제, 쥐약까지.”


“그것들은 기본적으로 집 안에 구비해 둬야 하는 물건들이니까요.”


“저택에 쓰던 재고가 없나요?”


“다 썼거든요.”


다 썼다. 그 말을 들은 올리버는 잠시 당황했다. 그 다양한 종류의 약을 다 써버릴 만한 일이 이 저택에서 있었던 것일까? 올리버는 상상이 가지 않았다. 가장 가난해빠진 천민조차도, 마당에 잡초가 무성하며 온 집안에 쥐가 들끓는 그런 천민조차도, 그 많은 약들을 다 써버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터였다.


“다 써버렸으면 새로 약을 구하기는 해야겠군요.”


“이해해주셔서 고마워요.”


“그러면.” 펠릭스는 의자에서 일어나 말했다. “이제 그 문제가 있다는 곳을 제게 직접 알려주시죠, 콘월 부인.”


“좋아요.” 에밀리아도 펠릭스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오세요. 제가 알려드릴테니까.”




“우선 부엌이에요.”


에밀리아 콘월이 부엌의 문을 열자, 안에서 일을 하고 있던 하인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의 주인에게 예를 표했다.


“잠시, 나가줘.”


아무런 이유도 묻지 않고, 그 상태 그대로 하던 일을 멈추고 하인들은 순식간에 부엌을 빠져나갔다. 한 구석에서는, 나무 양동이에 물을 받아 거품을 내어 식기들을 씻고 있었는데, 지금은 거품만 덩그러니 남아 사르륵 하는 소리를 내며 사그라들고 있었다.


“쥐는 안 보이는군요.”


펠릭스는 부엌 안을 잠시 살펴보다가, 누군가의 몫으로 남겨둔 것 같은, 뚜껑을 덮은 은접시를 발견했다.


“그것들은 작고, 잽싸니까요.”


“그래도, 당신 말마따나 쥐가 들끓는다면, 그림자쯤은 보였을 법도 한데 말이죠.”


에밀리아의 눈치를 살피며, 펠릭스는 슬쩍 그 은접시의 뚜껑에 손을 댔다. 그러나 올리버가 그의 손등을 가볍게 찰싹 때려, 펠릭스는 툴툴거리며 손을 거두었다.


“자, 여기에요. 쥐구멍이요. 봐요!”


에밀리아는 그러면서 잘 띄지도 않는 자그마한 구멍을 가리켜보였다.


“쥐구멍이요?”


“그래요. 쥐가 있다는 분명한 증거죠. 그러니, 이제 제게 쥐약을 만들어 줘야 할 필요가 생겼지요?”


“뭐, 봅시다.” 펠릭스는 에밀리아를 잠시 물리고, 두 눈을 찌푸린채 그녀가 가리켜보인 구멍을 살펴보았다. 그는 허공에 대고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무언가를 가늠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올리버. 당신도 한번 봐요. 동물은, 당신 전문이잖아요?”


펠릭스가 자리를 비켜주자, 올리버도 그 구멍을 살펴보다가, 금새 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떤가요?”


“쥐구멍인지는 잘 모르겠는걸.”


“쥐구멍이 틀림없다니까요.” 등 뒤에서 에밀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저게 쥐구멍이든 아니든 간에, 쥐약은 만들어 드릴 겁니다 후작부인. 쥐약 쯤이야 만드는게 어려운것도 아니니까요.”


“그렇다니, 다행이군요. 그럼 다음 장소로 가 볼까요?”


에밀리아가 먼저 부엌을 나서자, 펠릭스와 올리버는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심호흡을 하고, 코를 킁킁거리다가 에밀리아가 다시 그들을 부른 뒤에야 부엌을 빠져나갔다.




“자, 이번에는. 마당으로 가 볼까요.”


그러면서 에밀리아는 저택의 현관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리고 그들은 마당으로 걸어나왔지만, 습한 안개가 아직도 완전히 걷히지 않아 마당은 뿌예보였다.


“마당에 잡초가 웃자라나요?”


“물론이죠. 보세요!”


그러나, 펠릭스도 올리버도 당췌 무엇을 보라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여 눈만 끔뻑였다.


“흉하죠?”


“글쎄요. 제가 보기에는, 그냥 마당 같습니다만······”


“아니에요! 이건, 명백하게 틀려먹은 마당이라고요. 봐요. 잡초가 너무 많이 자랐어요.”


올리버는 잠시 쭈그리고 앉아 마당 가득 자라난 풀을 살펴보았다.


“그렇죠?”


에밀리아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올리버는 어깨를 으쓱하며 도로 일어났다.


“뭐, 어찌됐든 제초제도 만들어 드리긴 할 겁니다, 부인.”


“다행이네요.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이라. 전에 찾아갔던 사람은 이것저것 따지는게 많더군요. 무슨, 위험한 약이니 함부로 줄 수 없다나 뭐라나. 그런것도 다 상술이죠?”


“아뇨. 제가 보기에는, 그 약사인지 연금술사인지는 아주 뛰어난 사람 같네요.”


펠릭스가 원하는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이 분명한데도, 에밀리아 콘월의 얼굴에는 여전히 흠 하나 없는 미소가 걸려있었다.


“그렇군요. 저는, 약이라든가, 연금술 같은 것에 대해서는 잘 몰라서요.”


“뭐, 그럼 제초제 다음은 뭐죠? 구충제가 먼저인가요? 아니면 살충제? 고엽제? 어디부터 가는게 좋을까요?”


“글쎄요. 어디든 상관없지만, 저라면 구충제 쪽을 먼저 살피겠어요.”


“그 이유는?”


“그야. 축사에 마지막으로 방문하게 되면, 저녁 식사 시간 내내 축사에 들어갔던 기억밖에 나지 않을 테니까요.”


펠릭스와 올리버는 가만히 그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일리있는 말이로군. 펠릭스. 축사 먼저 들어가지.”


“좋아요. 나야 뭐 어딜 먼저 들어가든 상관없으니까. 어디든 가 보죠.”


“따라오세요.”


펠릭스는 에밀리아가 등을 돌리자마자, 잽싸게 바닥에 붙어 잡초를 한 움큼 집어들어 되는대로 뽑아낸 다음, 빈 주머니에 쑤셔넣고 짐짓 모른척하며 그녀를 뒤따랐다.




당연하게도, 축사는 저택을 둘러싼 거대한 영지 저쪽에 있었기 때문에, 세 사람은 다시 마차를 타고 거기까지 가야 했다. 작은 마차에 타기에는 올리버의 덩치가 너무 컸기 때문에 에밀리아는 저택 밖에서 마부를 부르겠다고 했지만, 마부가 올 때 까지 기다리고 싶지 않았던 펠릭스와 올리버는 잠시 머리를 맞대고 생각하여, 올리버가 직접 마부가 되어 마차를 끌기로 합의를 보았다.


“생각보다 괜찮죠?”


전에 한번 몰아본 것이 다라고 하는 것 치고는, 올리버가 모는 마차는 썩 괜찮은 편이었다.


“바퀴를 얼마전에 새걸로 갈았거든요.”


“아, 뭐 그러시다면야.”


그러나 에밀리아는 올리버의 운전이 그리 마음에 들지는 않는 듯했다.


“그래서. 축사에서는 뭘 키우죠?”


“돼지랑 소요. 전에 말씀드렸는데요.”


“아, 죄송합니다. 잊어버렸네요. 그래서, 기생충이 있다고요?”


“아마도요.”


“의심하시게 된 계기는?”


“직접 보시면, 아마 저와 같은 결론을 내리실 거예요. 기생충에 감염되었다고.”


“참 궁금하군요.”


전혀 흥미롭지 않다는 듯한 말투로 펠릭스가 말하자, 에밀리아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영지 저편에 나무로 만든 커다란 가축의 축사가 보였다. 그러나, 축사에서 마땅히 났어야 할 그 더러운 냄새는, 정작 축사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뒤에도 희미하게밖에 나질 않았다.


“냄새가 심하죠?”


“그러게요.”


“그래? 사실, 이정도면 꽤 깨끗한 편 같은데.” 올리버는 어느 우리 속으로 무례하게 손을 쑥 집어넣어, 돼지가 놀라는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 바닥에 깔린 짚을 손으로 슬슬 비벼보았다. “지푸라기도 막 새로 갈았군.”


“그렇지만, 여긴 너무 냄새가 심하답니다.”


“예민한 코를 가졌나봅니다, 후작 부인.”


“어쩌면요. 자, 그래서.” 에밀리아는 이제 충분히 돌아보지 않았냐는 뜻으로, 펠릭스를 돌아보며 말했다. “선생님이 보시기에도, 구충제가 필요해 보이죠?”


펠릭스는 눈을 끔뻑이며 혓바닥을 날름거리던 소를 잠시 살펴보고, 우리 구석에 팔자좋게 퍼져있는 돼지들도 살펴본 다음, 씩 웃으며 돌아왔다.


“구충제 정도야. 얼마든지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그렇군요. 일처리가 빨라서 좋네요. 자, 빨리 나가죠. 이런 곳에는, 단 일 초도 더 있고싶지 않으니까.”


적어도, 그 부분에 있어서는 세 사람의 생각이 일치했는지, 굳이 에밀리아가 등을 떠밀지 않았는데도 그들은 너나 할것없이 순식간에 축사를 빠져나왔다.




“마침, 나온 김에 밀밭을 보여드릴게요. 보세요. 저 아래, 들판에 자란 것이 모두 밀이랍니다.”


축사에서 빠져나와 신선한 공기를 충분히 들이마신 다음, 에밀리아가 축사 근처에 펼쳐진 하얀 밭들을 가리켰다.


“소와 돼지를 키우는 목초지는 없나요?”


“야생 잡초들을 어떻게 믿고 먹이겠어요? 저는, 시장에서 만든 사료만 써요.”


“사료라······”


올리버가 무언가를 말하려는듯 했지만, 펠릭스가 그의 말을 자르며 끼어들었다.


“해서, 살충제가 필요한가요? 제가 보기에, 밀밭에 고엽제를 쓸 필요는 없어 보이는군요.”


“아, 맞아요. 메뚜기. 메뚜기가 너무 많아요.” 에밀리아는 큰 비극이라도 닥쳐온 사람처럼, 망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너무 많아요. 벌레들이, 밀알을 갉아먹는 걸로도 모자라, 밀의 줄기와 잎사귀까지 모조리 먹어치워버려요······”


그러나 어느새 밀밭 안으로 슬금슬금 들어간 올리버가 팔을 휘적이며 밀밭을 헤쳐도, 뛰어다니는 메뚜기는 한두 마리가 전부였다.


“그런가요? 다른 벌레는?”


“몰라요. 저는 농부가 아니니까요. 하지만, 메뚜기가 너무 많아요.”


“그렇다면야. 뭐, 살충제 만드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요. 올리버! 그만 놀고 돌아와요.”


막 거인을 피해 폴짝 뛰어 달아나던 메뚜기를 솜씨좋게 낚아챈 올리버는, 그놈을 가만히 살펴보다가, 펠릭스의 말을 듣고 메뚜기를 어디론가 휙 던져버렸다.


“저런!” 그러자 에밀리아가 가볍게 소리쳤다. “메뚜기를 죽였어야 하는건데······”


“어이쿠, 죄송합니다 후작 부인.”


“아니에요. 그럴 것 까지는 없어요.”


올리버가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자 에밀리아는 선뜻 그 사과를 받아주었다. 하지만, 펠릭스는 그렇게 말하는 에밀리아의 얼굴 표정이 마치 인형의 그것처럼 굳어있는 것을 보았다.


“고엽제만 남았나요?”


“벌써 그렇게 되었군요. 과수원은 조금 더 멀리에 있어요. 저기···...”


“올리버입니다.”


에밀리아가 다시 웃는 얼굴로 말했다.


“올리버. 우리들을 위해, 마차를 몰아주겠어요?”


“얼마든지.”


올리버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마차를 탄 세 사람은 왔던 길을 되돌아가, 축사 반대편에 자리잡은 복숭아 과수원을 향해 달려갔다.


“과수원이 큰가요?”


“그럭저럭해요. 일 년에, 그러니까. 커다란 나무 상자로 오십 개를 채우던가? 많은 양은 아니죠.”


“그렇군요. 그런데, 고엽제는 어디에 쓰시려고 그러시는건지?”


“복숭아 나무 사이에, 잡목들이 너무 많이 자라있어요.”


“잡목이요?” 펠릭스는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과수원 안에, 잡목이?”


“그래요. 도무지, 하인들이란.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 것이 틀림없어요.”


“제가보기에는. 다들 성실하던데요.” 펠릭스가 슬쩍 말해보았다.


“하나같이 게으름뱅이 뿐이에요. 시키는대로 할 뿐이고, 시키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하죠. 실에 묶인 나무인형만도 못한 사람들이에요. 상상력이라든가, 창조적인 생각이라고는 전혀 할 줄 모르죠. 세상에, 그걸 사람이라고 부를 수는 있을까요?”


“뭐, 글쎄요. 저는 철학자는 아닌지라.”


“아, 제가 괜한 말을 했네요. 미안해요.”


“아닙니다. 그래도 나름대로 흥미로운 이야기였습니다, 후작부인.”


그러자 에밀리아는 생긋 웃더니, 잠시 주변을 슬슬 두리번거리며 펠릭스에게 조용히 물었다.


“혹시, 사람들이 말 잘 듣게 하는 약은 없을까요?”


“없습니다, 죄송하지만.”


“아쉽네요.”


위험천만한 약을 아무렇지도 않게 부탁하는 에밀리아를 보고, 펠릭스는 속으로 혀를 찼다.




수확철이 모조리 지나버린 복숭아 과수원은, 조금이었지만 황량해 보였다. 그러나 펠릭스는 그 가지런히 정돈된 과수원 어디에서도, 제멋대로 자라난 잡목을 찾을 수는 없었다.


“잡목이 안 보이는데요.”


“저기, 있잖아요!”


에밀리아가 가리킨 것은, 누가봐도 과수원의 보이지 않는 울타리 너머에서 제멋대로 비비 꼬여 자라난 나무였다.


“저기까지 과수원인가요?”


“그래요. 보기보다 땅이 넓거든요. 하지만, 일을 부릴 만 한 사람도 없고, 복숭아가 그렇게 잘 팔리는것도 아니라서 그냥 방치해 두던 곳이죠.”


“빈 땅을 그냥 놀리면 아깝지 않은가요? 남들은 갖고 싶어도 못 가지는게 땅인데.”


“그러니까요. 그래서, 이 기회에 한번 어떻게 정리해볼까 생각중이랍니다.”


“저기에는 뭘 심을거죠?”


“꽃이요.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꽃들. 계절에 따라 피는 꽃들을 다르게 심는거죠. 그러면, 일년 내내 아름다운 꽃밭이 되어 줄 거예요······”


에밀리아는 잠시 혼자만의 세상에 빠져 있다가, 뒤늦게 빠져나와 겸연쩍게 웃었다.


“괜한 말을 했네요.”


“아니, 뭐 괜찮은 꿈이네요. 꽃밭이라. 좋죠. 그런데, 콘월 후작도 꽃을 좋아하나요?”


“남편은, 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에밀리아의 목소리에서, 방금전까지 느껴졌던 생기가 사라졌다. 어느 연극 무대에 올라 대사를 읊는 초보 배우처럼, 그녀의 목소리는 산뜻했지만 아무 감정도 담겨있지 않았다.


“유감이군요.”


다시 마차를 타고 본채로 돌아오는 길에, 펠릭스도 에밀리아도 아무런 말을 꺼내지 않았다.


마침내 마차가 멈춰 서자, 두 사람은 마차에서 내려 서로 인사를 나누며 말했다.


“약은, 잘 부탁드려요.”


“아무렴요. 최고의 약을 만들어 드리지요. 그래서 말인데, 이제 제게 작업실을 보여주지 않겠어요?”


“작업실이요······. 알겠습니다. 따라오세요.”


어딘가 못마땅한듯, 아니면 무언가 켕기는게 있는듯, 에밀리아는 말을 마치기도 전에 몸을 돌린 다음, 안개에 반쯤 감춰진 콘월 저택의 현관문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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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53화 21.11.03 28 1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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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28화 21.10.21 28 1 16쪽
27 27화 21.10.21 28 1 30쪽
26 26화 21.10.20 30 1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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