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녹색유자 님의 서재입니다.

행복의 연금술 가게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녹색유자
작품등록일 :
2021.10.08 16:53
최근연재일 :
2022.01.13 18:00
연재수 :
172 회
조회수 :
6,076
추천수 :
188
글자수 :
1,774,925

작성
21.10.29 18:10
조회
27
추천
1
글자
23쪽

44화

DUMMY

펠릭스와 실비아, 올리버는 여전히 황량한 저택의 복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커튼은 왜 친 거람.”


괜히 툴툴거리며 펠릭스가 마침 옆에 있던 창문의 커튼을 짜증스레 휙 젖혔다. 그러나, 창 밖에서 그를 반겨주는 것이라고는, 마침내 음울하게 드리운 안개가 걷힌, 쓸쓸하고 외로운 가을 해질녘의 햇살을 받아 아련하게 빛나는 밀밭이었다.


“이런 곳에서 살다가는 병이 날게 틀림없어요.”


펠릭스는 도로 짜증스레 커튼을 휙 쳤다.


“무슨 병이요?”


“정신병이요!” 펠릭스가 갑자기 꽥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실비아와 올리버가 깜짝 놀랐다.


“펠릭스. 귀족의 집에서, 할 말이 따로 있지.”


“듣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라 그래요. 내 참. 이 집은 대체 누가 설계한거람. 안에 사는 사람들을 모조리 말려 죽이려고 작정이라도 했나······”


“언니네 집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마요!”


실비아가 항변했다. 그녀는 잔뜩 화가 났다는 뜻으로,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펠릭스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실비아는 그녀가 늦은 아침을 먹은 이후로 아직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것을, 하필 그 때 깨달았다. 그 결과인지, 그녀의 배에서는 다시 꼬르륵 하는 소리가 났고, 그것으로 가벼운 말다툼은 완전히 공중분해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배고프군.”


옆에서 올리버가 중얼거렸다.


“벌써요?”


“배고파. 난, 그 하인들이 먹는 식사가지고는 성에 안 찼거든.”


“하긴.” 펠릭스는 올리버의 커다란 육체를 훑어보며 말했다. “그 수프. 멀겋긴 했죠.”


“그래. 부족했어. 수도승이라면 그정도로 만족했겠지만, 난 수도사가 아니라고. 그래서 말인데, 실비아.” 올리버는 고개를 돌려 실비아를 보며 말했다. 아직까지 조금 당황한 기색이 남아있는채, 실비아는 머뭇거리며 올리버를 올려보았다.


“왜요?”


“식당으로 안내해 줬으면 하는데.”


“지금 간다고, 먹을게 있겠어요?”


옆에서 펠릭스가 끼어들었다.


“뭐라도 있겠지. 먹다 남은 빵조각이나, 하다못해 저장고에 매달아 둔 치즈나 햄 같은거 있잖아. 그런건 따로 요리를 할 필요도 없으니까.”


“아! 아녜요. 저기, 바다 건너에서 온 요리사가 있어요.” 실비아가 손뼉을 짝 치며 말했다.


“그래요?”


“네. 요리를 엄청 잘 하거든요. 새빨간 소스의 파스타랑, 삶은 밤을 으깨서 꿀이랑 섞은 무스도 디저트로 만들어 줬는데, 엄청 맛있어요!” 갑자기 실비아가 신이 나서 말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그 요리사. 몸값이 비쌀 거 아냐. 아무 때나 무턱대고 찾아가서 요리해주십사 한다고 척척 만들어 주나?”


“제가 부탁하면 만들어 주겠죠. 언니 동생인데.”


“민폐 아닌가요?”


“뭐 어때요! 요리하라고 있는게 요리사 아녜요? 가요. 당신들도 한번 먹어봐야 돼요, 그런 음식. 정말, 정말로 맛있다고요.”


“뭐,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가 보죠 올리버.”


그리하여 세 사람은 왜인지 혼자 들뜬 실비아의 뒤를 따라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부엌에서 사소한 소란이 들린 뒤에, 실비아는 식당으로 돌아왔다. 물론, 그 식당은, 실비아와 에밀리아가 단 둘이서 만찬을 벌였던 그 커다랗고 황량한 곳이었다. 그 식당의 벽 곳곳에 걸린 누군가들의 초상화는 식탁에 앉은 사람들을 쳐다보고 있는 것처럼 그려져, 아무리봐도 그리 기분좋은 식사를 할 만한 곳은 아니었다.


“귀족의 취향이란.”


올리버는 초상화와 눈싸움을 벌이다가, 숫자에서 밀려 결국 눈을 돌리며 퇴각했다.


“일종의 경고인 셈이죠.” 펠릭스도 초상화를 힐끔 돌아보며 말했다.


“무슨?”


“무슨 일이든 간에.” 펠릭스는 손가락을 뻗어 무례하게 초상화를 손가락질 했다. “우리들이 보고있으니, 허튼짓 말라는 경고요.”


“하지만, 그림이잖아.”


“그래요. 그림은 그림일 뿐이죠. 괜히 죄책감을 한번 들쑤셔보는거죠 뭐. 하여튼, 악취미 하고는······”


“좋은 그림이에요!” 실비아가 끼어들었다. “함부로 말하지 마요 펠릭스.”


“좋은 그림 나쁜 그림이 어딨어요? 그림이 다 그림이지.”


그러나 실비아도 그림에 대해서는 조예가 없어서인지, 아니면 흥미가 없어서인지, 또는 그저 배가 고파서인지 언니네 집 식당의 그림까지는 변호하지 않았다.




곧, 하인들이 은접시에 뚜껑을 씌운 음식들을 테이블 위로 날라왔다. 조심스럽게 뚜껑을 들어올리자, 그 안에 갇혀있던 따뜻하고 먹음직스러운 향이 솔솔 피어올랐다. 실비아가 말한 대로, 새빨간 소스에 범벅이 된 파스타였다. 실비아는 아주 만족스럽게 그것을 한입 먹으면서, 어서들 먹어 보라는 뜻으로 펠릭스와 올리버에게 눈짓을 했다.


“맛있죠?”


올리버가 막 한입 입에 넣자마자 실비아가 물었다. 올리버는 그 대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어때요, 펠릭스?”


“바닷가재와 홍합을 이용했군요. 꽤 괜찮은데요.”


“당신, 의외로 미식가군요?”


“아, 뭐. 별건 아녜요. 하지만······”


“하지만?”


“뭐, 아닙니다. 기분탓이겠죠.”


“그래요. 뭐가 됐든 기분탓이겠죠.”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실비아가 말했다. “펠릭스. 당신이 투덜이인건 잘 알지만, 이 요리를 트집잡을 수는 없을 걸요.”


“투덜이라니, 말이 심하군요.”


“그렇잖아요?”


“오늘은, 습기때문에 그런거지, 평소에는 그렇게 투덜거리지 않아요.”


“그쯤 해 펠릭스. 이번에는 네가 졌어.” 옆에서 올리버가 다시 파스타를 한입 먹으며 말했다.


“내가 왜 져요?”


“졌구만뭘. 실비아랑 똑같이 반응하고 있잖아.”


“전 안 저렇거든요!” 펠릭스보다 한 발 빨리, 실비아가 항변했다.


“그렇군요. 올리버, 당신이 맞아요. 내가 졌어요 실비아.”


“전 안저런다니까요!” 오히려 약이 올라 실비아는 씩씩거렸지만, 하인이 다시 조그만 접시에 디저트를 담아오자 금새 해실거리며 웃었다.


“봐요!”


그녀는 보란듯이 디저트 접시의 뚜껑을 열어보였다. 펠릭스는 어차피 차가운 디저트에 뚜껑이 무슨소용인가 잠시 혼자 생각했지만, 귀족들이 그러려니하고 굳이 입 밖으로 그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맛있겠죠?”


그러나 펠릭스의 솔직한 심정으로는, 실비아가 자랑한 그 밤 무스는, 둥글게 파낸 흙더미처럼 보였다.


“어, 뭐······”


“그렇죠? 올리버. 어때요?”


올리버는 조그마한 디저트 스푼을 들고 몇 십초 정도 방황하다, 조심스레 무스를 한입 떴다.


“밤 맛인데.”


“그쵸그쵸? 맛있죠? 그렇죠?”


“단 밤 맛이야.”


“별로에요···?


“아니, 맛있어.”


“정말로요?”


실비아는 영 걱정스러운 투로 물었고, 올리버는 말없이 무스를 우물거리기만 했다.


“펠릭스. 당신은요?”


“어디.” 펠릭스도 무스를 한입 떠서 입 안에 넣고 우물거렸다. 그런데, 그는 무스를 맛보자마자 희미하게 씩 웃었다.


“맛있죠?”


“적율이 나아요.”


“네?”


“적율이 더 낫다고요.” 펠릭스는 다시 무스를 한 입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단맛. 단맛이 너무 강해요. 이렇게 달게 만들 거였으면, 차라리 양을 줄이든가. 아니면 쓰디 쓴 차라도 하나 내 오든가 하는게 좋겠군요. 그리고, 너무 달기만 해서 지금 내가 설탕을 먹고 있는 건지, 밤을 먹고 있는건지 헷갈릴 지경이군요.”


“펠릭스! 실력있는 요리사가 만든 거예요. 너무 함부로 말하는 거 아녜요?”


“뭐, 내 입맛에는 그렇다는 거죠.” 펠릭스가 수저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 마침 차가 왔네요. 자, 차랑 같이 들어요.”


하인이 화려하게 반짝이는 찻잔과 찻주전자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잔에 차를 따라주고는 다시 유령처럼 사라졌다.


“홍차네.”


올리버가 차를 한 모금 홀짝이며 말했다.


“좋은 차에요. 잡내도 안 나고, 맛도 좋죠?”


“난 내가 끓인게 더 좋지만.” 올리버가 다시 차를 홀짝였다.


“아니, 올리버. 당신도 트집 잡기에요?”


“그냥, 개인적인 취향이야. 그러고보니, 실비아 너도 사랑초를 넣고 끓인 차를 좋아하지 않았어?”


“그렇기는 했죠. 그래도, 이건 최상품 차인 걸요.”


“최상품이든뭐든, 난 그게 더 좋아.” 올리버는 다시 차를 한 모금 홀짝이고,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다음 입맛을 다셨다. “내가 그걸 더 좋아하는데, 무슨 이유가 더 필요하겠어. 이게 최상품이든 말든 나랑은 상관없지.”


“그건 그렇죠.” 옆에서 펠릭스도 맞장구를 쳤다. “좋고 싫고에 이유가 어딨어요. 좋은게 좋은거고 싫은게 싫은거지 뭐.”


“하여튼. 둘 다 대단들 하군요. 이렇게 좋은 음식들을 앞에 두고 태연하게 품평이라니.”


“누구나 솔직한 자기 소감을 말 할 수는 있어요.”


“그래. 그건 그렇지. 어쨌든, 그래도 그런대로 꽤 맛있었다 실비아.”


“됐어요!” 그 고상한 만찬을, 그런대로 맛있는 식사로 치부당한 실비아는 짜증을 내며 홍차를 한 모금 홀짝였다. 올리버가 말 한대로, 홍차에서 조금 향이 부족하게 느껴져, 실비아는 다시 짜증을 내며 잔을 내려놓고 이번에는 밤 무스를 한입 작게 베어물었다. 그러자 펠릭스 때문에 의도치 않게 먹어보았던 적율의 그 오묘한 풍미가 떠올라, 실비아는 결국 짜증스레 스푼을 테이블 위에 탁 내려놓았다.


“더 안먹어?”


“배불러요.”


“입이 짧군요, 실비아.”


“당신들 때문이잖아요! 기껏 차려줬더니, 투정이나 부리고. 덕분에 입맛이 싹 달아났어요. 하여튼, 둘다 반성해요!”


실비아가 씩씩거리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자, 두 사람은 멀뚱히 서로를 쳐다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저기, 실비아.”


토라져 식당 입구에 가만히 서 있던 실비아에게, 올리버가 헛기침을 하며 조심스레 말을 붙여보았다. 그러나 실비아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아까는 우리가 미안했다. 그러니까, 나는 말야. 이제 너랑 조금 더 솔직하게 속마음을 터 놓아도 된다고 생각했거든. 그러니까, 그동안 같이 약재 찾는 여행도 하면서 우린 꽤 친해졌잖아. 서로를 믿을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올리버는 말하면서 실비아의 눈치를 슬쩍 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올리버의 말을 귀담아 듣고있지 않는 것 같았다.


“됐어요, 올리버. 보나마나 삐쳤군요.” 옆에서 펠릭스가 끼어들었다.


“자극하지마 펠릭스. 그래도 실비아는 섬세한 구석이 있잖아.”


“뭐, 하긴 삐칠 만도 하죠. 그래요. 미안해요 실비아. 내가 너무 솔직하게 말한 것 같군요.”


“미안한 줄은 아나요?”


“일단은요.”


“일단은요?” 실비아가 다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 펠릭스를 노려보았다. “나는! 당신들한테 그 음식 먹여주겠다고 얼마나 요리사한테 굽신거렸는데, 당신들은 그것도 모르고 이게 어떻니 저떻니 말만하고······”


실비아가 온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말했다.


“미안해요.”


“미안하면 다예요! 그래요. 올리버 말대로, 우리 그동안 같이 여행도 다녔고, 같이 이런저런 일들도 겪었는데, 그런데도 제 마음을 아직까지도 그렇게나 몰라줘요?”


“그건 어쩔수 없죠. 매일 부대끼며 사는 가족들끼리도 서로 무슨 생각하며 사는지 전혀 모르는데, 하물며 제가 당신 마음속을 어떻게 알아요?”


“좀, 노력이라도 해 보든가요!”


펠릭스는 그녀에게 다시 뭐라고 대답하려는듯 하다가,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다물었다.


“아무튼, 신경써줘서 고마웠어요 실비아. 아, 이건 분명한 진심입니다.”


“진심이든 아니든 관심없어요.”


“아냐, 실비아. 나도 고마웠어.” 올리버도 가세했다. “아까, 점심식사 때는 하인들이 머무는 별채에서 하인들과 부대끼며 같이 식사를 했거든. 그런데, 네 덕분에 고상한 귀족들이 식사하는 식당에도 가 보고. 덕분에 고마웠다 실비아.”


조금이나마, 실비아의 기분이 풀어진 것처럼 보였다.


“하여튼, 미안한줄 알았으면 됐어요. 그것만해도 대단한 발전이긴 하죠.”


“이해해줘서 고맙군요.”


“그래요. 고상한 귀족인 제가 용서해야지, 어쩌겠어요.”


펠릭스와 올리버는 그 말을 듣고 다시 서로를 멀뚱히 쳐다보며 말없이 시선을 교환하고는, 거의 동시에 어깨를 으쓱했다.




세 사람은 다시 연금술사의 작업실에 들어와, 솥 아래에 장작을 쌓고 물을 긷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글거리는 장작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분좋은 열기에 노곤함을 느껴서인지, 조그만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있던 실비아는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여 금새 푹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올리버가 그녀를 들어올려 제대로 된 의자 위에 걸쳐둘 때까지도 그녀는 잠에서 깨지 않았다.


“아주 푹 잠들었는걸.”


덮어줄 담요를 찾지 못해, 자기 겉옷을 벗은 올리버는, 옷을 덮어주려다가 슬쩍 옷 냄새를 맡아보고는 도로 주섬주섬 옷을 입었다.


“그러게요. 아주 유난을 떨어가며 고상한 귀족인 척을 하더니.”


“언니네 집이 불편한가봐.”


“언니네 집이라고 볼 수도 없죠. 어쨌든, 엄밀히 따지자면 여긴 콘훨 후작의 집이니까요.”


펠릭스는 솥 안에 담긴 물이 끓기를 기다리며 멍하니 앉아 중얼거렸다.


“실비아말야. 언니랑 사이가 나쁜걸까?”


“당사자가 바로 옆에서 쿨쿨 자고 있는데, 겁도 없나보군요 올리버.”


“너한테 그런 말을 듣는 날이 다 오고.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군.”


“그러게요.” 펠릭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계속 느낀건데, 실비아가 어딘가 계속 어색해 보이기도 하고. 뭔가 무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해. 언니랑 사이가 나쁜걸까?”


“모르죠. 굳이 언니 때문이 아닐 수도 있고, 달리 무슨 복잡한 사정이 있는 걸지도 모르고.”


조금 걱정스런 표정으로 새근새근 자고있는 실비아를 슬쩍 곁눈질하는 올리버와 달리, 펠릭스는 팔자좋게 솥 앞에 앉아 솥이 끓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넌 별로 걱정 안 돼?”


“제 앞가림정도는 할 수 있을만큼 똑똑한 아가씨니까요.”


“그렇기야 하다만. 사람 인생이라는게, 꼭 그렇지만도 않잖아. 특히나, 똑똑한 사람일수록, 감정에 한번 휘둘리면 크게 데이곤 하니까.”


“경험담인가요? 아니면, 또 술꾼의 주정?”


올리버는 잠시 생각하다가, 쓴웃음을 지었다.


“술집에 적당히 다녀야겠는걸.”


“그러게요. 차라리 당신도 약에 대해 좀 배워보는게 어때요?”


“난 무리야.” 바로 난색을 표하며 올리버가 손을 내저었다. “머리가 굳어서, 힘들다고.”


“하긴. 그럴 나이긴 하죠.”


실비아가 몸을 잠깐 뒤척이자, 두 사람은 동시에 말이 없어졌다.


“이대로 돌아오지 않으면 어쩌지?”


“실비아한테 그렇게 정이 들었으면, 그녀 밑에 사냥꾼으로라도 들어가던지요.”


“아니, 그정도는 아니야.” 올리버는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하지만, 조금 걱정이 되기는 해.”


“뭐가요? 그녀가 이대로 언니네 집에 눌러앉아, 귀족으로서의 자기 본분을 다하러 간다고 해도, 나나 당신이나 크게 손해볼 건 없잖아요.”


“그래. 그렇기는 한데······.”


올리버는 다시 실비아를 흘깃 돌아보았다. 그러다가 작업실의 문에서 노크소리가 들리자, 그는 답지않게 깜짝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쪽으로 걸어갔다.


“누구지?”


“아, 저, 식사시간입니다.” 아마 하인인듯 했다.


“지금 한창 약을 만들고 있는데.”


“아, 저기. 마님께서 꼭 같이 식사하고 싶으시다고······”


올리버는 펠릭스를 흘끔 돌아보았다. 그는 펠릭스와 시선을 교환하고 문 밖에 대고 말했다.


“한 시간쯤 기다려 줄 수 있나?”


“저기······”


“벌써 끓는 물에 약재를 넣어버렸어. 여기서 멈추면, 아까운 약재만 버리는 꼴에다가, 처음부터 다시 약을 쑤어야 해.”


“그러면. 알겠습니다. 여쭤보고 오겠습니다.”


말소리가 멈추고 잠시 시간이 흐른 뒤에 올리버는 펠릭스에게 돌아왔다.


“약재는 넣지도 않았는데.”


“제초제는 금방 만들거든요. 한 시간이면 충분하죠.”


“그나저나. 왜 거짓말 했어? 아직 맹물이잖아. 지금 바로 먹으러 가도 될 걸.”


“방금 식사했잖아요?”


“그렇긴 하지. 하지만, 그걸로 성에 차?”


펠릭스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도.”


“그냥. 속을 좀 떠보고 싶어서요.”


“속을 떠? 누구? 에밀리아 콘월의?”


“그래요.” 펠릭스는 물이 펄펄 끓기 시작한 다음에야 약재들을 솥 안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뭘 캐보려고?”


“올리버. 당신이 계속 실비아를 신경쓰니까, 제가 직접 한번 물어봐 주겠다고요. 동생이랑 사이가 좋은지 어떤지.”


“그건 너무 무례하지 않나?”


“무례한줄 알면, 신경이라도 끄던가요. 제가 신경 끄라고 하면, 가만히 무시할 수나 있고요?”


“어렵지. 난 네가 아니니까.”


“그러니까요.” 자리에서 일어나, 커다란 주걱으로 솥을 저으며 펠릭스가 계속 말했다. “저로서도 제 고용인이 딴데 정신 팔려있는건 사절이에요. 그리고 그것 외에도 에밀리아 콘월은 영 수상쩍은데가 있기도 하고. 그러니까, 한번 저녁 식사 시간에 그녀의 속을 떠 보자고요.”


“화가 나서 우릴 쫓아내면 어쩌고?”


“그러면.” 펠릭스가 조금 섬뜩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땐, 다른 방법을 써야죠.”


“뭘?”


그러나 펠릭스는 올리버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솥 안에 재료를 빠뜨리고 불을 있는대로 키워, 솥을 마구잡이로 저어대기 시작했다.




애매한 시간에 식사를 하기는 했지만, 으레 귀족들의 우아한 음식들이 그렇듯이, 펠릭스도 올리버도 한 접시의 음식만으로는 그리 배가 부르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어렵지 않게 에밀리아의 초대를 받아들여, 두 번째 저녁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식당이 달라졌군요.”


황량한 식당을 둘러보며 펠릭스가 말했다.


“점심은 동생이랑 조용히 보내고 싶었거든요. 혹시, 식사가 마음에 들지 않으시던가요?”


“아니오. 썩 괜찮았습니다.”


펠릭스가 슬쩍 웃자, 에밀리아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약입니다.”


물론, 음식이 나오기 전에 펠릭스는 약병을 내미는 것으로, 한 시간이나 저녁 식사에 늦은 변명을 했다.


"모아뒀다가 나중에 한번에 달라니까요?"


"갓 만든 약은, 갓 구운 빵 만큼의 매력이 있는 법이거든요." 펠릭스는 이해가 가지 않는 비유를 들며 약병을 촛불의 불빛 아래에서 이리저리 움직여 보였다.


“어떤 약이죠?”


“마당에 뿌리는 약입니다.”


“이것도 창문을 활짝 열고 뿌려야 하나요?”


펠릭스는 에밀리아의 농담에 웃음으로 대답했다.


“해서, 아마 예상하셨다시피.” 펠릭스가 운을 떼었다. “저는 그리 고상한 사람은 아니라서요. 배가 고파 그런데, 오늘 저녁 식사는 뭘까요?”


“솔직하시네요. 속을 채워 포도주에 익힌 메추라기 고기랍니다.”


“괜찮네요. 디저트는?”


“호박 파이요. 호박이 제철이니까요.”


“조금 의외군요. 저라면, 계절에 맞지도 않는 이국적인 과일을 있는대로 으깨고, 즙을 짜내서 만든 푸딩이라도 가져올 줄 알았거든요.”


“그건 우아하지 못한 일이죠.” 에밀리아가 웃으며 말했다.


“어째서요?”


“돈을 낭비하는 꼴이고, 구하기 힘든 재료를 찾느라 하인들이 힘들어 할테니까요.”


“이미 여기서 일하는 하인들은 하나같이 지쳐보이던데요.” 펠릭스가 노골적으로 말했다.


“하지만, 저는 쓸데없는 일로 하인들을 나무라지 않아요.”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막 펠릭스가 말을 마치자, 때맞추어 하인들이 음식이 담긴 접시들을 들고 식당으로 척척 걸어들어왔다.


“그래서, 하인들을 함부로 대하시지 않는다고요?”


에밀리아의 얼굴에 놀람과 조금의 분노가 스쳐지나갔다. 당사자인 하인들을 눈앞에두고, 펠릭스는 그야말로 무례하기 짝이 없는 질문을 에밀리아에게 던진 것이었다.


“그래요.” 그러나 순식간에 원래의 낯빛으로, 에밀리아도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하인들은 그녀의 대답에 잠시 움찔하긴 했지만, 그 이상의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멋지군요. 그야말로 타의 모범이십니다.”


“그건 너무 지나친 칭찬이군요.”


하인들이 재빨리 돌아가자, 펠릭스는 에밀리아가 뭐라 더 말을 꺼내기도 전에 씩 웃으며 기세좋게 접시의 뚜껑을 들어올렸다. 달콤하고 먹음직스런, 메추리 고기의 향이 뿜어져 나와 테이블 위를 떠돌기 시작했다.


“그럼, 부인. 감사한 마음으로 식사하겠습니다.”


“그래요. 많이 드시기를.”




에밀리아 콘월의 친절한 응대에, 펠릭스는 실없이 웃으며 포크와 나이프를 집어들었다. 그러나 올리버는, 겨우 억지 웃음을 짓는 것이 한계였다. 후작 부인을 눈앞에두고 펠릭스가 이토록 무례하게 나올 줄은 그로서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뒤늦게 죽은 메추라기의 시체를 손질하며, 올리버는 이 식사를 무사히 끝마칠 수 있긴 할까 하고 속으로 작게 한숨을 쉬었다. 물론, 그런 올리버의 속도 모르고, 펠릭스는 태연하게 고기만 계속 우적였다.


“그런데, 부인.”


그리고 그 펠릭스가 메추라기 고기를 한 반쯤 먹었을 때, 운을 떼었다.


“네. 뭐죠?”


“하나 여쭤보고 싶은게 있습니다만.”


“말씀하세요.” 수저를 내려놓고 에밀리아가 가만히 웃으며 말했다.


“실비아와 사이가 좋은가요?”


올리버는 먹던 음식이 기도로 넘어갈 뻔 한것을, 겨우 막으며 재빨리 물로 입을 적셨다.


“네?”


“여동생분과 사이가 좋으신지 물어봤습니다.” 펠릭스가 다시 실쭉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갑자기 왜 그런것을 물으시죠?”


“그냥요.”


“그렇다면, 알려드릴수 없어요. 그건 개인적인 사정이니까요.”


“그렇죠. 가족사라 이거죠. 이해합니다 부인. 그러면, 이유를 조금 다르게 말씀드려 볼까요.”


그리고 펠릭스는 갑자기, 아주 우아한 적을 하며 포크와 나이프로 메추라기 고기를 작게 한 조각 잘라, 입 안에 넣더니 귀족처럼 소리내지 않고, 입을 거의 우물거리지도 않으며 씹어 삼킨다음, 에밀리아를 향해 밝게 웃으며 말했다.


“사실, 저는 실비아와 머지않은 장래에 결혼하려 합니다.”


그 폭탄같은 말이 떨어지자, 올리버는 말 그대로 테이블 위가 폭발하기라도 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식사, 굶주림, 맛있는 향과 냄새, 그 모든 것들이, 펠릭스의 한마디 말에 의해 테이블 위에서 사라져버렸다.


“지금, 뭐라고······?”


“말 그대로요.” 이제는 목소리까지 차분하게, 지극히 의도적이었지만 어쨌든 아주 우아하고 고상하게 말투까지 바꾸어 펠릭스가 다시 말했다. “실비아와 결혼할 생각이 있는 만큼, 그녀의 가족들에 대해서도 충분히 알아둬야 하니까요. 그런데, 이곳에 온 뒤로 실비아는 어딘가 영 기운이 없어보이더군요. 그래서 주제넘게나마,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감히 여쭈어 보았습니다.”


에밀리아와 올리버는 놀란 눈으로 펠릭스를 돌아보았지만,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야기를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행복의 연금술 가게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53 53화 21.11.03 28 1 25쪽
52 52화 21.11.02 25 1 16쪽
51 51화 21.11.02 24 1 18쪽
50 50화 21.11.01 26 1 19쪽
49 49화 21.11.01 25 1 21쪽
48 48화 21.10.31 29 1 34쪽
47 47화 21.10.31 26 1 25쪽
46 46화 21.10.30 26 1 21쪽
45 45화 21.10.30 28 1 31쪽
» 44화 21.10.29 28 1 23쪽
43 43화 21.10.29 24 1 18쪽
42 42화 21.10.28 28 1 23쪽
41 41화 21.10.28 27 1 23쪽
40 40화 21.10.27 28 1 21쪽
39 39화 21.10.27 25 1 21쪽
38 38화 21.10.26 26 1 19쪽
37 37화 21.10.26 23 1 19쪽
36 36화 21.10.25 31 1 21쪽
35 35화 21.10.25 25 1 23쪽
34 34화 21.10.24 28 1 21쪽
33 33화 21.10.24 26 1 21쪽
32 32화 21.10.23 31 1 23쪽
31 31화 21.10.23 27 1 19쪽
30 30화 21.10.22 31 1 19쪽
29 29화 21.10.22 28 1 27쪽
28 28화 21.10.21 29 1 16쪽
27 27화 21.10.21 29 1 30쪽
26 26화 21.10.20 30 1 19쪽
25 25화 21.10.20 27 1 28쪽
24 24화 21.10.19 31 1 17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