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녹색유자 님의 서재입니다.

행복의 연금술 가게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녹색유자
작품등록일 :
2021.10.08 16:53
최근연재일 :
2022.01.13 18:00
연재수 :
172 회
조회수 :
6,137
추천수 :
188
글자수 :
1,774,925

작성
21.10.27 18:10
조회
28
추천
1
글자
21쪽

40화

DUMMY

“올까?”


거의 시체처럼, 의자에 기이한 자세로 파묻히다시피한 올리버가 중얼거렸다.


“오겠죠.”


“조금있으면 해질녘이야.”


“해는 진작에 졌어요. 저 빌어먹을 먹구름 때문에.”


펠릭스는 짜증스런 눈으로 밤하늘 위를 가리고 있는 먹구름을 노려보았다. 물론, 먹구름은 그의 시선 따위에는 전혀 겁을 먹지 않고 제자리를 꿋꿋이 지켰다.


“정말 올까?”


“온다니까요! 내 참. 그 사람, 얼굴에 가면을 아주 몇 겹을 겹쳐 써서 아주 가관이더군요. 차를 홀짝이는데도, 눈 하나 꿈쩍않고.”


“그럼 네 그 쓸모없는 재주도 못 써먹었겠네.”


“아니오.” 펠릭스는 오늘 처음으로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럴리가요. 울타리 안에서 자란 귀족 주제에, 내 눈을 속이려고? 난 봤어요. 그 눈. 애타게, 간절하게 바라는 것이 있는 사람의 그 갈망하는 눈. 잠깐이었지만, 분명히 봤다고요.”


“퍽이나.” 올리버는 술꾼들의 허풍을 듣듯 펠릭스의 말을 귓등으로 넘겼다.


“온다니까요. 그러는 당신은, 답지않게 풀죽어서 뭐하는 거에요 올리버.”


“나도 사람이야. 올리버가 말했다. “하루정도는, 심통하게 있을 수도 있잖아. 오히려, 펠릭스 네가 대단한 거라고. 그래도, 한 일 주일도 넘게 같이 살았던 사람이 갑자기 가버렸는데, 전혀 아무런 감정도 못 느낀다고?”


“네.”


“그게 사실이라면, 넌 아마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중 가장 무쇠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일거야.”


“축하해요, 올리버. 지금 강철로 된 심장을 가진 사람을 보고 있군요.”


“비유지?”


“그럼 진짜겠어요?”




“딸랑딸랑!”


연금술 가게 문에 달린 방울이 울리자, 두 사람 모두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자세를 고치며 잔뜩 기대하는 얼굴로 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펠릭스. 아직 있어?”


그러나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깡마른 인상의 보름달 서커스 단장 트로이였다. 두 사람은 금새 바람빠진 풍선처럼 축 늘어져버렸다.


“안녕, 트로이.”


“그래, 안녕 펠릭스. 그런데, 어째 조금 실망한 기색이다?”


“아, 별건 아니고. 기다리던 손님이 있었는데, 그 손님이 왔나 해서.”


“아, 그래? 그럼 돌아갈까······”


“아니, 됐어. 그냥 여기 있어 트로이. 사실, 언제 올지도 모르는 손님이니까.”


“그래? 그럼, 염치불구하고, 좀 놀다 갈게.”


트로이는 넉살좋게 카운터 앞 의자 위에 풀썩 앉았다.


“펠릭스. 그나저나, 나는 네가 그렇게 갑자기 가 버려서 조금 실망했어.”


“그럴 만한 사안이라. 미안해, 트로이.”


“그렇다고 미안할 것까지는 없고. 해서, 그 에밀리아 콘월. 너하고 무슨 관계길래, 나한테 인사도 안 해주고 돌아가버린거야?”


펠릭스는 잠시 얼굴을 찌푸리고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말했다.


“나랑은 별 상관 없지, 사실.”


“그래? 계속 근처가 소란스럽더니, 갑자기 휙 가버리는것 같던데.”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게 뭐냐면······. 아, 안돼. 역시, 미안하다 트로이. 말 해주려고 해도, 아까 그 핑계로 에밀리아 콘월한테도 말을 안 해줬거든.”


“무슨 핑계?”


“비밀 엄수.”


그러자 트로이는 알겠다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다면야 뭐.”


“그래. 내 손님을 가로채 가려고 해서, 그래서 잠시 싸움이 붙었던거지.”


“가로채? 하지만, 두 사람은 친자매 아니었나? 그러면 가로챈건 네 쪽 아냐?”


“피붙이라고 무슨 대단한 권리가 있어? 막말로, 어릴 때 같이 자란 것 말고는 뭐 없잖아? 애초에 나랑 계약해서 계약 내용대로 잘 따르고 있던 사람을, 멋대로 채간건 그쪽이라고.”


펠릭스는 그것에 대해 아주 불만이 많은지, 입이 툭 튀어나온것도 모르고 계속 툴툴댔다.


“전통을 중요시 하는 사람들이 들었다가는 까무러칠 말인걸.”


“뭐 어때. 마음대로들 하라지. 그래서, 트로이. 너는 그냥 인사차 온거야? 나랑 잡담이나 하러?”


“달리 이유가 있어야 해?”


트로이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펠릭스는, 그제서야 아주 시원스럽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고맙다 트로이. 그럼.” 그리고 펠릭스의 웃음은 금새 멈추었고, 그의 얼굴은 사냥감을 노리는 사냥꾼처럼 집요하게 바뀌어 있었다. “그 에밀리아 콘월이라는 사람. 좀 궁금해졌거든. 트로이, 혹시 뭐 아는거 없어?”


“일개 유랑 서커스단 단장이 뭘 알겠어?” 트로이가 난색을 표했지만, 펠릭스는 그를 놔주지 않았다.


“알지. 당장, 예전에 왕국이 한창 전쟁중일 때는, 유랑 서커스 극단들이 첩자노릇도 했잖아.”


“전쟁은 끝났어. 진작에.”


“전쟁이 끝났다고, 그 버릇을 버렸을까? 트로이. 뭐 아는거 없어? 소문이라도 괜찮아.”


“뭐······” 트로이는 무언가 영 개운치 않은 표정으로 잠시 고민하다가, 마침내 말했다. “그래. 펠릭스 네가 나한테 부탁하는 일이 흔한것도 아니니까.”


“그래. 그래서, 어서 말해봐.”


“그러니까. 내가 아는건 사실 별로 쓸모있는 정보는 아냐. 콘월 후작이 벌써 외국으로 항해를 떠난지도 두 달이 넘었다는 것 정도?”


“진짜 쓸데없는 정보네.” 펠릭스는 허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라고 딱히 뭘 아는건 아니야. 그것 외에는, 글쎄. 부부사이가 나쁘다는 소문이 돌던데.”


“그래? 믿을만 한 정보통인가?”


“전혀.” 트로이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 뭐, 그래도 없는것 보다는 나으려나.”


“차라리 모르는편이 나을지도.”


“아내를 손찌검하나?”


“아니. 그냥, 별로 사이가 안 좋다던데. 콘월 후작은 아주 신사적인 사람이고, 콘월 후작부인도 마찬가지로 귀부인의 교양을 충분히 갖춘 사람이지만, 그냥 부부사이가 별로 안좋대.”


“거 참. 귀족들이란. 당췌 모를 일 투성이군.” 펠릭스가 혀를 차며 말했다.


“그러게말야. 아, 고마워요. 그러니까, 이름이······”


“올리버.” 올리버는 트로이에게 찻잔을 내어주며 웃었다. “맹수 조련사 로라에게 안부 전해주시오. 덕분에, 재밌었다고.”


“아, 그러고보니, 어젯 밤 무대에 올라갔었죠? 이제 기억이 납니다. 그래요, 솔직하게 말하자면, 꽤 인상적인 무대였습니다. 혹시, 서커스 단원이 되어 볼 생각 없습니까?”


“트로이! 내 채집꾼이야!”


“아, 미안. 버릇이라.” 트로이는 어쩔수 없다는듯 웃으며 말했다. “무례를 사과드립니다.”


“아니, 뭐 그럴것 까지는 없고. 그럼, 편히 말 나누다 가시길.”


“그래, 트로이. 저래뵈도 올리버도 제법 신사적인 면이 있거든. 입이 무겁다든가, 눈치가 빠르다든가, 뭐 그런 것들.”


“그래. 그럼 눈치빠르고 신사적인 채집꾼은 이만 비키도록 하지. 펠릭스. 뒷정리는 하고 들어가.”


“알았어요. 먼저 수고해요 올리버.”


올리버는 그길로 그대로 자기 방안으로 들어가버렸다.




“좋은 사람들이 곁에 많구나, 펠릭스. 그 실비아라는 사람도 그렇더니.”


“뭐, 그 아가씨는 친언니 손에 붙들려 가버렸지만.” 조금 아쉽다는듯 입맛을 다시며 펠릭스가 말했다.


“그래도, 인연이 있다면 다시 만나지 않겠어?”


“그럴지도. 그보다, 트로이. 마침 올리버도 없고 해서, 너한테 묻고 싶은게 하나 있거든. 대답해줄래?”


일순간에, 행복의 연금술 가게 안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마치, 거대한 닻에 이끌려 바다 아래로 가라앉은 난파선처럼.


“뭔데?”


“붉은 가루 병. 우리들중 누군가가 만들었다는 소문이 있었잖아. 혹시, 너 아는거 없어?”


“없어. 당연히.” 트로이는 별 걸 다 묻는다는듯 대답했다.


“네가 만든건 아니지?”


“내가 어떻게 만들겠어? 펠릭스. 그렇게 교묘하고 효과적인 약은, 내 정도 실력으로 못 만들어. 메를린이나, 너쯤 되면 몰라.”


“그러면, 달리 아는 건 없어?”


“글쎄.” 트로이는 잠시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 “사실, 나는 붉은 가루 병이 돌기 훨씬 전부터 서커스 극단쪽으로 마음이 쏠려있었거든. 그래서, 그 즈음에 연금술사들의 숲에 무슨 일이 있었어도 나는 잘 모를거야.”


“그래? 그러면, 뭐. 모른다니 내가 어떻게 더 할 수도 없지.”


“도움이 못 되서 미안하네, 펠릭스.” 진심으로 아쉽다는 듯한 말투로 트로이가 말했다. “네가 우리들한테 도움을 구하는 일은, 정말 거의 없는데 말야.”


“그랬던가?”


“그래! 너는 그 숲 안에서, 손에 꼽히는 연금술사였어. 우리가 네 도움을 구하면 몰라, 네가 우리 도움을 구한 적이 어디 한 번이라도 있었어?”


“글쎄.” 펠릭스는 두 눈을 찌푸리고, 과거의 희미한 기억을 더듬는듯했다.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내 기억엔 없어. 그래서, 이렇게 말하긴 좀 뭣하지만, 네가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거든. 어마어마한 실력을 가진, 오만하고 뻔뻔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확신에 차 있는 연금술사.”


“뭐, 사실 그렇기는 하지. 선망할 만도 해. 나도 대스승님은 존경했으니까.”


“스승님은 아니고?”


트로이가 묻자 펠릭스는 씩 웃는가 싶더니, 갑자기 순식간에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글쎄?”


펠릭스가 보인 뜻밖의 태도 때문에, 갑자기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어색해졌다.


“그래서, 펠릭스. 붉은 가루 병 이야기는 갑자기 왜 꺼낸 거야?”


“아, 뭐 별건 아니고.” 다시 평소와 같은 표정을 지으며 펠릭스가 대답했다. “전에, 해리어를 만났는데. 그, 해리어는, 그렇잖아.”


“아, 맞아. 불쌍한 해리어. 하긴, 그와 만났으면 붉은 가루 병 이야기가 나올 만도 하지.”


“그래.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약혼자가 그 병으로 덜컥 죽었으니. 아무튼,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이 대단한 연금술사 펠릭스가 유일하게 못 이겨낸 병이, 바로 그 붉은 가루 병인것 아니겠어?”


“이겨냈잖아? 좀, 거친 방법이었지만······”


“난 좀더 우아하고 고상하고 극적인 방법으로 이기고 싶어.”


“그래. 그렇다면, 관심을 가질 법도 하네. 어쨌든 치료약은 아무도 못 만들었으니까. 스승님도, 심지어는 대스승님도······.”


“그래. 그런데.” 펠릭스가 다시 아까의 그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러고보면, 대스승님조차 약을 못 만든건 조금 이상하지 않아?”


“대스승님은 신이 아니잖아. 어느 싸구려 연극무대에서 시기적절하게 갑자기 툭 튀어나오는, 그런 팔자좋은 신이 아니라고.”


“아니, 그러니까 말야. 트로이. 그러니까, 하 젠장. 또 그 비밀엄수가 문제군. 무슨 말을 못 하겠어.”


“왜?”


“그러니까. 아냐. 됐다 트로이.” 펠릭스는 메를린이 만들고, 자신이 은폐했던 그 위험한 치료약의 이야기를 결국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어쨌든, 이상하잖아. 대스승님은 그 마녀한테 직접 지식을 전수받은 사람이야. 약에 대해 모르는게 없을텐데. 그런데, 그 위험천만한 병이 그냥 퍼지도록 가만히 놔뒀다니. 좀 이상해.”


“그래? 사람들을 모아서 회의를 진행하고, 뭐 그러셨잖아? 왕국에다 보고도 하고, 그런 일들을 하시지 않았겠어? 내가 극단의 단장이 되어 하는 일을 단원들이 모르듯이, 우리들도 대스승님이 하는 일을 몰랐을 뿐이겠지.”


“그래. 그렇다면 좋은 일이다만. 흠. 나중에 어쩌면, 만약에 그 연금술사의 숲으로 돌아가 봐야 할지도 모르겠어.”


“그렇게까지 할 일이야?”


“응.” 별 생각 않고 고개를 끄덕이는 펠릭스를 보고, 트로이는 조금 부럽다는듯 웃었다.


“행운을 빌게, 펠릭스.”


“난 행운의 도움 없이도 뭐든지 해낼 자신 있어.”


“하지만, 행운은 너를 좋아하잖아. 부럽다, 펠릭스.” 트로이는 진심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튼, 난 이만 돌아가서 단원들한테 내일 일정 잡아줘야겠다.”


“그래, 수고해 트로이. 덕분에 잠깐이었다만, 즐거웠다.”


“그래. 나도. 그리고 그 콘월 가문 말야.” 막 가게를 나서려던 트로이는,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문간에 멈춰섰다.


“뭔가 떠올랐어?”


“별건 아니고. 사실 헛소문에 가깝긴 한데, 그냥 생각난 김에 말 해 줄게. 진짜 별건 아니고, 검은 상복을 입고 얼굴을 베일로 가린채 연금술 가게를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사람이 있다는데, 그 사람이 콘월 후작 저택으로 들어가는걸 본 사람이 있대.”


“진짜 헛소문이네.”


“그렇지? 혹시 몰라서 그냥 해 본 말이야. 그럼, 펠릭스. 나 진짜 간다. 아, 그리고 이 마을에서 며칠 머무를 거니까, 나중에라도 심심하면 서커스 구경 와.”


“그래.”


트로이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해준 펠릭스는, 그가 가게를 나가자마자 가게의 열림 푯말을 반대로 걸고 가게 안의 조명을 단 하나만 제외하고 모조리 꺼버렸다. 카운터 위에서 불안하게 떨리는 기름 등불의 빛이 얼굴에 스칠 때마다, 마구잡이로 변화하는 그림자가 펠릭스의 험악한 얼굴 위에 드리웠다.




짙은 먹구름에 달이 가려, 밤하늘은 그야말로 암흑 천지였다. 이런 어둠을 헤치고 밤나무숲속에 자리잡은 행복의 연금술 가게로 찾아오려면, 누구든 등불의 도움을 받아야 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펠릭스는 창문 바깥에서 꿈틀거리는 빛의 흔적이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문에서 노크소리가 나자, 온 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물론, 그는 유령 따위를 믿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 어둠을 빛의 도움 없이도 꿰뚫어 볼 수 있을 만큼 밤눈이 밝은 사람이, 그 자신 말고도 존재한다는 사실에 놀랐을 따름이다.


“들어오시죠.”


끼익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고, 어둠 속에서 에밀리아 콘월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아직 영업 중인가요?”


“보시다시피.” 펠릭스는 떨리는 등불의 불빛 아래에서, 여유롭게 씩 웃어보였다. 그 모습은 마치 무시무시한 음모를 꾸미는 거물 범죄자처럼 보일법도 했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펠릭스의 얼굴이 너무 어려보였다.


“늦은 시간에 죄송해요.”


“거기 멀뚱히 서 있지 말고, 그만 들어와서 앉으시지 그래요?”


에밀리아는 펠릭스가 의자를 권한 뒤에야, 귀족 답게 안으로 들어와 자기 자리를 찾아갔다.




“실비아의 허락을 받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군요.”


“실비아는 한창 사춘기를 지나고 있거든요.” 에밀리아가 두 손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이해합니다. 그래도, 꽤 늦은 걸요.”


“집에서 여기까지 오는데 거리가 좀 있어서요.”


“마차를 타면 그래도 금방 아닌가요?”


“금방이래도, 한 시간 남짓은 걸린답니다.” 에밀리아가 웃으며 말하자, 펠릭스도 알겠다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럴수도 있죠. 그래서, 이제 사업 이야기를 해 볼 까요?”


펠릭스가 종이와 펜을 꺼내자, 에밀리아가 말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요약하자면. 저를 며칠 고용해서 집안의 대소사를 처리하는데 도움을 받고싶다, 이거군요.”


펠릭스가 꺼내든 종이 위에는, 두서없이 마구잡이로 끄적여진 낙서 같은 것이 빼곡했다.


“그래요. 저를 도와주시겠어요?”


“실비아가 허락해 줬다면야, 뭐, 못 할건 또 없습니다만.” 그래도 어딘가 내키지 않는다는 투로 펠릭스가 말했다. “제가 직접 댁까지 찾아가야 할 만한 이유라도 있나요? 저는, 가급적이면 이곳 행복의 연금술 가게를 벗어나고 싶지 않거든요.”


“일을 비밀스럽게 처리하고 싶어요.”


“그러면, 더더욱 제가 그리로 가면 안 될것 같은데요.” 펠릭스가 씩 웃으며 말했다. “요즘 세상에는, 연금술사에 대해 그리 좋지 않은 소문도 돌거든요.”


“아니, 소문 따위는 괜찮아요. 난 그런거 신경 안 쓰니까.” 에밀리아가 조금 힘주어 말했다. “그보다는, 당신이 만든 약에 대한 뜬소문이 날까봐 그래요.”


“제가 직접 가서 만든다고, 소문이 없어지나요?”


“일종의, 연극이죠. 집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여봐란듯이, 요란하게 약을 만드는 거예요. 그러면서, 그 약이 무엇인지 큰 소리로 떠들어 대면, 음습하고 낭만적인 소문이 돌 건덕지도 안 남겠죠.”


“그렇게까지 번거로운 방법을?”


에밀리아는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뭐, 비용만 준다면야, 저도 별 상관은 없으니까요. 해서, 내게 얼마나 지불할 생각입니까?”


“하루에 은화 다섯 닢.”


“저렴하군요.”


“적당하지 않나요? 전에 머물던 약사는 하루에 은화 한 닢을 받고도 아주 만족했어요.”


“약사 따위와 저를 비교하지 말아주시겠어요? 우리 연금술사들은, 상상력이 풍부한 손님에게는 무엇이든 만들어 보일 수 있거든요. 그 빈곤한 상상력과 실력을 가진 약사들과 달리.”


에밀리아는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그럼, 당신 하는 것 보고 돈을 더 지불하든가 할게요.”


“그러든지요. 그래서, 계약서는 이렇게 쓰면 될까요?”


펠릭스는 낙서투성이의 종이를 한 옆으로 밀어내고, 깨끗한 새 종이를 꺼내 순식간에 멋들어진 글씨로 계약서를 써내려갔다. 그 글씨의 우아함과 정교함, 그리고 글씨를 써내려가는 속도는 아주 뛰어난 귀족인 에밀리아 콘월조차 깜짝 놀랄 정도였다.


“여기요.”


그녀는 완성된 계약서를 받아들고 잠시 훑어보다가, 이내 웃으며 계약서를 펠릭스에게 돌려주었다.


“그정도면 괜찮군요.”


“서명하시죠.”


“당신먼저.”


“전, 도장을 찍어야 해서.”


에밀리아는 다시 계약서를 가져와, 자신의 이름과 가문의 성씨를 간결하고 경쾌하게 서명했다. 그러자 펠릭스는 주머니에서 자주색 초를 꺼내 끄트머리를 살짝 녹여 계약서 위에 촛농을 떨어뜨린 다음, 그 위에 자신의 도장을 꾹 찍었다.


“다 됐군요.”


완성된 계약서를 둘둘 말며 펠릭스가 말했다.


“원본은 제가, 당신에겐 사본을 드리죠.”


“아니, 필요없어요.”


“그래요?”


“네. 계약서 같은 것은, 당신 혼자 갖고 있어도 충분해요.” 에밀리아가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계속 똑같았지만, 펠릭스는 잠시동안 그녀가 화를 내고 있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그렇다면야. 해서, 언제 착수하면 될까요?”


“내일 아침 편으로 마차를 보내 드릴게요.”


“알겠습니다. 준비해 두죠. 다만, 재료를 좀 많이 실어야 하니까, 커다란 짐마차를 불러주세요. 아 참. 그리고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집 안에 연금술사의 작업실이나 그 비슷한게 있나요?”


에밀리아는 잠시 생각하는듯 하다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평범하군요. 알겠어요. 짐마차로, 부탁합니다. 그럼.”


“그럼. 내일 보도록 하죠.” 에밀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펠릭스는 그녀를 배웅하지 않았다.


“아참. 그러고보니, 에밀리아 후작부인.”


“네?”


막 문간에 발을 디딘 에밀리아를 펠릭스가 불러세워, 그녀는 조금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소문을 들었는데요.”


“그런데요?”


“검은 상복을 입고 얼굴을 가린채, 연금술 가게 이곳저곳을 떠돌아 다니는 유령이, 콘월 후작의 저택 안으로 사라진다는 소문이요. 마침 그 집 안주인이 있어서 하는 말인데, 혹시, 저택 안에 유령이 살고 있나요?”


“뜬구름잡는 헛소문이네요.”


“그렇죠? 하여튼. 사람들이란. 소문 퍼뜨리기를 좋아하죠. 알겠어요. 어쨌든, 저는 그런 수상쩍은 사람이랑은 같이 일 못한다고 미리 알려주려고 그랬어요.”


“소문은 소문일 뿐이에요.”


“그렇겠죠. 그럼, 아무쪼록 밤길 어두운데 조심해서 돌아가시기를.”


“밤길은 괜찮아요. 전 이래뵈도 밤눈이 밝거든요.”


“그러시다면야. 그럼.”


펠릭스는 에밀리아에게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고, 에밀리아도 그에게 살짝 고개를 숙인 다음 가게 문을 열고 어두컴컴한 밤나무 숲 속으로 걸어들가 금새 자취를 감추었다.




“올리버! 일어나요! 잠꾸러기 같으니.”


아직 아침 태양이 완전히 떠오르지도 않은 어스름한 시간에, 펠릭스는 요란스럽게 올리버의 방문을 주먹으로 쿵쿵 두드렸다.


“왜!”


짜증스런 올리버의 목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려왔다.


“그 귀족. 어젯밤에 다녀갔어요.”


“왔어? 왔었다고?!”


우당탕 소리가 나더니, 올리버가 벌컥 방문을 열어젖혔다.


“진짜로?”


“그래요! 아침 일찍 마차를 보낸다고 그랬어요.”


“마차? 왜?”


“나를 고용했거든요.”


“그래?” 올리버의 얼굴에 침착함이 조금씩 돌아오는가 싶더니, 어느새 그 침착함은 다시 새로운 불안으로 바뀌었다. “그럼, 실비아와의 계약은? 두 달 안으로 약재를 모으겠다고 호언장담했잖아.”


“실비아한테 허락받은 일이랬어요.”


“기한을 못 맞추면, 크게 실망할텐데.”


“뭐 어쩌겠어요. 친언니가 낚아채 갈줄, 저라고 알았나요? 아무튼, 준비해요 올리버. 콘월 후작 저택으로 갈 거니까.”


“그래, 준비. 준비해야지. 비켜 펠릭스.” 잠시 방 안에서 허둥거리던 올리버는, 펠릭스를 슬쩍 밀치고는 어디론가 갔다.


“그래요. 철저히 준비하라고요! 언젠가, 당신이 말했잖아요. 귀족 저택은 무시무시한 사냥터라고!”


“아, 그래. 그랬지 참. 그래. 펠릭스 너도 철저히 준비하라고.”


“딸랑딸랑!” 창문 밖에서, 벌써 경쾌한 종소리가 들려왔다.


“벌써 왔나봐요!”


“좀 기다리라 그래!”


“그러게 말이에요. 어휴, 귀족들이란. 도무지, 남의 생각이라고는 조금도 안 해주는 꼴이라니!”


툴툴거리면서 옷을 갈아입고, 마차에서 내린 하인들을 부려 포장해둔 약재들을 짐마차에 실은 펠릭스는, 대강 어젯밤 자르다 만 흑빵의 상처에 손가락을 쑤셔넣고 거칠게 잡아뜯어, 찢어낸 빵 덩이를 입에 우물거리면서 마차에 올라탔다. 곧, 중무장한 올리버도 마차에 탔고, 마차는 매섭게 오솔길을 달려갔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행복의 연금술 가게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53 53화 21.11.03 28 1 25쪽
52 52화 21.11.02 25 1 16쪽
51 51화 21.11.02 24 1 18쪽
50 50화 21.11.01 26 1 19쪽
49 49화 21.11.01 26 1 21쪽
48 48화 21.10.31 29 1 34쪽
47 47화 21.10.31 26 1 25쪽
46 46화 21.10.30 27 1 21쪽
45 45화 21.10.30 29 1 31쪽
44 44화 21.10.29 29 1 23쪽
43 43화 21.10.29 24 1 18쪽
42 42화 21.10.28 29 1 23쪽
41 41화 21.10.28 27 1 23쪽
» 40화 21.10.27 29 1 21쪽
39 39화 21.10.27 25 1 21쪽
38 38화 21.10.26 26 1 19쪽
37 37화 21.10.26 23 1 19쪽
36 36화 21.10.25 32 1 21쪽
35 35화 21.10.25 25 1 23쪽
34 34화 21.10.24 29 1 21쪽
33 33화 21.10.24 27 1 21쪽
32 32화 21.10.23 32 1 23쪽
31 31화 21.10.23 27 1 19쪽
30 30화 21.10.22 31 1 19쪽
29 29화 21.10.22 29 1 27쪽
28 28화 21.10.21 30 1 16쪽
27 27화 21.10.21 29 1 30쪽
26 26화 21.10.20 30 1 19쪽
25 25화 21.10.20 27 1 28쪽
24 24화 21.10.19 33 1 17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