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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유자 님의 서재입니다.

행복의 연금술 가게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녹색유자
작품등록일 :
2021.10.08 16:53
최근연재일 :
2022.01.13 18:00
연재수 :
17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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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57
추천수 :
188
글자수 :
1,774,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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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24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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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1쪽

33화

DUMMY

보름달 서커스단의 단장 트로이의 천막 안은, 조금 어둡고 눅눅한 곳이었다. 천막의 입구를 열어젖히며 일행들이 안으로 들어가자, 천막 한 가운데에 앉아있던 한 소녀가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이쪽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폴라. 무리하지말고 도로 앉아.”


트로이의 말에, 그 폴라라는 소녀는 다시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약을 가져왔다.”


그리고 트로이는, 방금 실비아에게서 받은 약을 꺼내 그녀의 발목에 얇게 펴발랐다.


“시원하지?”


“따끈따끈해요.”


“따뜻하다고?”


트로이는 펠릭스를 돌아보았고, 그러자 펠릭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뭐, 사랑초를 넣었으니까. 효과에는 별 차이 없을거야.”


“시원한게 낫지 않아?”


“사람마다 다르겠지. 저기, 폴라라고 했나요? 따뜻한 연고와 시원한 연고, 어느쪽이 더 취향이죠?”


폴라는 당황스러운 질문을 받아,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펠릭스. 당황했잖아요. 하여튼, 쓸데없는 질문은···”


“중요한 작업이에요, 실비아. 손님이 원하는 약을 만들어 주려면, 손님이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정도는 알아둬야죠?”


“그건 그렇군. 일리있는 말이야.” 올리버가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펠릭스에게 동의를 표하자, 실비아는 고개를 돌리고는 슬쩍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서커스에 문제가 있으시다고요?”


“아, 그렇습니다. 저기······?”


트로이가 실비아를 슬쩍 돌아보고는 눈치를 보자, 펠릭스가 헛기침을 하며 끼어들었다.


“내 손님. 실비아.”


“아, 실비아. 그렇습니다.” 트로이는 여전히 눈치를 보다가, 펠릭스에게 시선을 고정시킨채 말을 이었다. “우리 서커스에 잔병치레를 앓는 사람이 많은데, 오늘 밤은 아주 중요한 공연이 있거든, 펠릭스.”


“말 해.” 말을 꺼낸 것은 자기인데도 정작 펠릭스를 보고 말하는 트로이에게, 조금 심술이 난 듯 입이 부루퉁해진 실비아를 슬쩍 쳐다보고 웃으면서 펠릭스가 말했다.


“그러니까, 귀족이 공연을 보러 온다고 했어.”


“귀족이요!” 실비아가 다시 끼어들었다. “굉장히, 의외네요.”


“아, 맞습니다. 의외죠. 수없이 많은 귀족들과, 그 귀족들의 비호를 받는 비평가들이 그동안 우리 서커스를 얼마나 혹평을 해 왔는데, 이렇게 몸소 찾아와 줄 줄이야.”


“귀족들도 서커스 좋아해요!” 뜬금없이 실비아가 외쳤다. “그러니까, 저도 좋아하고, 제 친구들도 다들 서커스 좋아했다고요.” 시선이 쏠리자, 그녀는 갑자기 무례하게 끼어든 것이 부끄러워진듯, 얼굴을 살짝 붉히며 기어드는 목소리로 말했다. “서커스 극단이 마을에 찾아오면, 밤에 몰래 집을 빠져나가 평범한 사람처럼 변장을 하고 서커스를 구경하곤 했죠.”


“아름다운 추억이군요, 실비아.” 트로이가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쨌든, 오늘 밤에 찾아오는 귀족은, 자기가 귀족이라고 당당하게 밝히고 구경하러 오겠다고 타진을 해 왔습니다. 좋은 공연을 내 보이라는 압박인 동시에, 하지만 분명 큰 기회를 주겠다는 뜻이기도 하죠.”


“기회요?”


“그렇습니다, 기회. 우리 서커스 극단은, 다른 예술인들과 달리, 후원자가 없습니다. 순수히 일한 만큼 벌고, 번 돈은 다시 서커스 극단원들의 봉급으로, 서커스 극단의 유지비로, 기타 온갖 잡다한 비용으로 다 써버리면 남는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 오늘 밤에 공연이 잘 되어 귀족의 눈에 든다면? 다른 예술가들이 그렇듯, 귀족의 후원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기대감이 큽니다.”


“글쎄. 트로이. 좋은 기회같기는 하지만, 그 고상한 귀족들이 넉살좋게 후원을 해 줄까?”


“펠릭스. 해 보기 전에는 모를 일이지.”


트로이와 펠릭스는, 서로를 보고 잠시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어떤 약이 필요하신 건데요?” 실비아가 트로이에게 물었다.


“아, 보자. 우선, 여기 앉아있는 폴라의 발목 약이 필요합니다.” 의도치않게 줄곧 앉아서, 단장과 연금술사들의 대화를 엿듣는 꼴이 된 폴라가, 수줍게 고개를 숙였다.


“아까 발라줬잖아.”


“단순한 진통제 말고. 삔 발목을 빨리 낫게 해 주고 싶거든. 그리고 맹수 조련사와 불의 괴인은 감기에 걸려 골골대고 있어. 괴력의 사나이는, 기운이 쪽 빠져버려서 힘빠진 풍선꼴이 돼버렸고.”


“그 사람은 왜 기운이 쪽 빠졌대? 기생충에라도 감염됐어?”


트로이는 씁쓸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전에 공연하던 도시에서, 도박판에 들렀다가 홀랑 날려먹었어.”


“얼마나?”


“내가 메꿔줘야 할 정도로.”


“끔찍한 비극이군, 트로이.”


펠릭스의 말에, 트로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트로이. 의뢰 내용은 잘 접수했어. 그들에게 필요한 약을 만들어 달라, 이거지?”


펠릭스가 손뼉을 치는것으로, 상황을 요약하며 말했다.


“맞아. 그래서, 펠릭스. 오늘 밤이 찾아오기전에 끝낼 수 있을까?”


“물론. 난 뛰어난 연금술사니까. 솥과 재료만 있다면 뭐든 만들어 보일 수 있어.”


“아참. 펠릭스. 솥은 가져와야 돼. 사람을 몇 명 붙여줄 테니까, 네 가게에서 좀 가져와줄수 있어? 아니면, 가게에서 직접 만들어 올래?”


“사람 붙여줘.” 펠릭스가 씩 웃으며 말했다. “유랑 서커스 극단같이 좋은 구경거리를 두고, 가게 안에만 처박혀있기는 아깝잖아.”


“그래. 그럼 금방 붙여줄게. 아, 잠시 자리 좀 비켜줄래? 폴라한테 약도 줘야하고, 정리할 서류도 조금 있거든.”


“얼마든지. 그럼.”


그리고 펠릭스가 앞장서서 천막 밖으로 나서자, 올리버와 실비아도 그의 뒤를 따라 천막에서 빠져나왔다.




“실비아.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천막에서 빠져나온 펠릭스가 대뜸물었다.


“뭔데요?”


“전 솥이나 재료나 뭐나 챙겨올게 많아서 그런데, 실비아. 아까, 트로이가 말 한 사람들 기억하죠?”


“네. 괴력의 사나이, 불의 괴인, 맹수 조련사, 그리고 폴라요.”


“그래요. 그 사람들한테 가서, 증상이 어떤지 한번 물어봐 줘요. 어떤 약을 원하는지도.”


“당신은요?”


“저는, 가서 솥이랑 뭐랑 가져와야죠.”


“그럼 저 혼자 물어봐요?”


“올리버 있잖아요?”


“난 약에 대해서는 몰라.” 올리버는 잽싸게 발뺌을 했다. “전혀 모른다고 볼 수 있지.”


“그렇다는데요?”


“그래도 괜찮아요. 실비아. 당신 이제 혼자 약도 만들줄 알고, 어엿한 연금술사 아니에요?”


“아니거든요!”


실비아가 날카롭게 외쳤지만, 펠릭스도 올리버도 여전히 웃고만 있었다.


“어쨌든, 아픈 사람들한테 찾아가서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듣는 정도는 할 수 있잖아요?”


“그거야, 할 수 있죠. 저는 이래뵈도 응급의학을 조금 배웠으니까요.”


“그래요. 일단은 그 정도만 해줘요. 그리고, 가급적이면 어떤 약을 원하는지도. 아, 저사람들인가?”


펠릭스는 저쪽에서 두리번거리며 걸어오는 건장한 청년 세 명을 향해 그대로 걸어가버렸다. 그는 잠시 그들과 몇 마디 떠들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곧장 어디론가 가버렸다.


“너무 막무가내 아닌가요?”


“그만큼 널 믿으니까 그런 것 아니겠어?”


“그렇지만, 솔직히 별로 자신없는데······”


“내가 봐 줄테니까.” 올리버가 실비아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너무 긴장하진 마. 혹시나, 일이 틀어지면 내가 책임질게.”


“당신이 어떻게 책임져요! 하여튼, 올리버. 말은 잘 해요.” 그러면서 실비아는, 강한척 올리버의 손을 툭 쳐냈다.


“실비아.”


“왜요?”


“그쪽 방향이 아냐.”


한창 뻣뻣하게 걸어가던 실비아는, 얼굴을 붉히며 황급히 돌아왔다.




서커스 단원들에게 수소문을 할 필요도 없이, 맹수 조련사가 머무는 천막은 외따로 떨어진 곳인데다가, 천막 앞에 철사 우리가 늘어서 있어 찾는 데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계세요?”


천막 밖에서, 우리에 갇힌 채 실비아를 노려보고 있는 호랑이, 곰의 시선을 애써 피하며 실비아는 천막 밖에서 목을 길게 빼고 큰 소리로 외쳐보았다.


“계세요?”


그러는 동안, 올리버는 우리에 갇힌 곰과 태연하게 마주서있었다.


“올리버! 뭐해요?”


“곰.”


“네?”


올리버는 무언가에 집중한듯 더이상 대답하지도 않았다. 실비아는 대체 뭔지 뜻모를 소리를 듣고 얼이 빠져있다가, 천막 안에서 인기척이 들리자 황급히 자세를 고쳐섰다.




천막에서 걸어나온 것은, 그녀보다 나이가 한두살 더 많아 보이는 소녀였다. 머리카락은 짐승의 털처럼 뻣뻣하고 부슬부슬한데다가, 얼굴도 솔직히 말하여 미인이라고 해 줄 수는 없었다. 한창 햇볕에 피부를 그슬리며 들판을 뛰놀다가 막 집에온 어린아이같은, 그런 모습에 가까웠다.


“누구세요?”


“아, 저는. 그러니까, 연금술사에요.”


“연금술사?”


조련사의 표정이 예상한 것 이상으로 밝아져, 실비아는 부담을 느끼며 황급히 말을 고쳤다.


“조수요! 연금술사 조수!”


등 뒤에서 올리버의 웃음소리가 얼핏 들린 것 같았지만, 실비아는 뒤를 돌아볼 용기까진 나지 않았다.


“아, 네. 약을 만들어 주려고 오신거죠?”


“저는 아니고요. 저는, 당신 증상이라든가, 원하는 약이 어떤 것인가 하는걸 알아보러 왔어요. 혹시, 말 해 줄수 있을까요?”


조련사는 잠시 생각을 해 보다가, 팔로 천막 입구를 가린 천을 들어보이며 말했다.


“들어오시겠어요?”




조련사가 머무는 천막은 그리 넓지 않았다. 하지만, 다시한번 생각해보면 다른 단원들과 달리, 좁은 곳이나마 혼자 머물 공간이 있다는것이 일종의 특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실비아의 머리속을 스쳐지나갔다.


“혼자 지내세요?”


“네. 동물 냄새가 난다고 다들 싫어하거든요.”


그러나 그녀가 혼자만의 공간에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은, 실비아의 머리속을 방금 스쳐간 생각과는 전혀 다른 이유에서였다.


“아, 그래요······?”


“이해는 해요. 나는 괴짜들 사이에서도 유난히 괴짜잖아요. 동물 냄새를 풀풀 풍기고, 말 안 통하는 위험천만한 맹수들과 늘상 붙어있는 저를, 피할 만도 하죠.”


“아, 아니에요. 제가 보기에는 멋져요. 그러니까···...꺅!”


막 천막 어느 틈에서 스물스물 기어와, 태연하게 조련사의 몸을 타고오르는 뱀을 발견하고, 실비아는 그만 품위없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뭐야?”


그와 거의 동시에, 올리버가 헐레벌떡 천막 입구를 젖히고 고개를 불쑥 들이밀었다.


“아, 아니에요. 별 일 아니에요.”


“그래? 그럼 뭐.”


올리버가 도로 나가자, 실비아느 크게 심호흡을 했다.


“깜짝놀랐죠? 이제, 왜 제가 혼자있는지 아시겠어요.”


“조금 놀랐네요. 그러니까······”


“로라.” 조련사가 웃으며 말했다. “저는 로라에요. 반가워요.”


“아, 네. 저는, 실비아에요. 반가워요 로라. 그래서, 그러니까······”


“아, 괜찮아요. 얘는 독이 없거든요.” 로라는 그러면서 자신의 목 언저리를 슬금슬금 감아오는 뱀을 천천히 손으로 쓰다듬었다. 뱀이 빨간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몸을 휘감아오는 모습은, 실비아가 보기에는 그리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었지만, 정작 로라는 대단히 사랑스러운 눈으로 뱀을 보았다.


“아, 그래서, 감기에 걸리셨다고요?”


“아, 네.” 로라는 이제서야 뱀에게서 눈을 떼고 실비아와 눈을 마주쳐 주었다. “재채기가 나요. 저는 괜찮은데, 제 친구들이 깜짝깜짝 놀라거든요. 혹시나, 병을 옮기는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친구들이요.”


로라는 미소를 띄며 다시 뱀과 눈을 마주쳐 보았다.


“아, 네. 그래서, 감기에 좋은 약이 있었으면 해요.”


“그래요. 가급적이면 재채기에 좋은 감기약으로 만들어 드릴게요. 달리 필요하신건 없나요?”


로라는 미소를 지은 얼굴로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이제 그만 가 보셔도 돼요.”


“네?”


“저기, 긴장하신 것처럼 보여서요.”


“아, 아뇨. 그러니까······”


“전 괜찮아요.” 로라가 다시 웃으며 말했다. “익숙하거든요. 오히려, 제가 더 고마울 정도에요. 이렇게까지 신경써 주시는 분은 잘 없거든요.”


“아, 그래요 로라. 그럼, 저는 다른 사람들한테도 찾아가봐야해서······”


실비아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로라는 웃으며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실비아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잠깐동안 맹수들의 왕의 허락을 받은 것 같다는 오묘한 생각을 하면서, 그녀의 천막을 빠져나왔다.


“올리버. 뭐해요?”


우리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고, 곰과 눈싸움을 하는 올리버를 보고 실비아는 기겁해서 물었다.


“곰.”


“곰이 뭐요?” 또 그 알수 없는 대답에, 실비아는 넌더리를 냈다. “빨리 가요. 다른 사람들한테도 찾아가 봐야죠.”


“난 여기있으면 안될까?”


“저 혼자 가요?!”


“괜찮지않아?” 여전히 곰에 눈을 맞춘 채, 올리버가 중얼거렸다.


“내 참! 하여튼, 몰라요! 알아서 해요!”


그리고 실비아는 올리버에게 한 마디 톡 쏘아붙인 다음, 투덜거리는 것으로 겁먹은 목소리를 숨기며 그곳을 재빨리 벗어났다.




단원들에게 수소문을 하여 이번에 찾아간 것은, 괴력의 사나이였다. 그를 알아보는것도 생각보다 쉬운 일이었다. 오늘 밤 공연에 대한 기대로 부풀어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혼자만 구멍뚫린 자루처럼 축 늘어져 있는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그가 괴력의 사나이였다.


“안녕하세요?”


실비아가 웃으며 그에게 다가오자, 그는 아주 느릿하게 고개를 돌리고는, 힘없고 혼탁한 눈동자로 실비아를 쳐다보았다.


“누구···”


“아, 저는 연금술사 조수에요. 약을 만들러 왔는데, 단장님이 당신이 약을 필요로 한다던데요.”


“내가···?”


남자는 금시초문이라는듯, 실비아에게 되물었다.


“네.”


“내가······?”


남자는 이번에는 자기 자신에게 묻는듯, 허공을 멍하니 쳐다보며 다시 중얼거렸다.


“내가, 그랬던가······”


“저기요! 저기, 그러니까···...”


“아, 난 롬. 롬이라고 불러.”


“아, 네. 롬 씨. 그래서, 어떤 약을 원하시나요?”


“어떤 약이라. 글쎄······”


처음에는 힘빠진 사내를 보고 조금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실비아였지만, 도무지 대화가 진행되지않고 헛도는 것을 보고있으니 그녀의 마음에서 불쌍함 대신 답답함과 짜증이 스물스물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저기요! 힘 나는 약이면 충분할까요?”


“힘 나는 약이라. 글쎄. 내가 바라는 것이 힘이었을까?”


“제가 어떻게 알아요?”


“힘도 좋지. 아, 그렇지만, 글쎄. 아, 아닌가? 어쩌면······”


실비아는 참을성있게 롬이 뭐라도 쓸만한 말을 해 주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한 오분동안 멍하니 혼잣말만 중얼거리는 것을 보고, 보다못한 실비아가 짜증스레 입을 열었다.


“알아서 해 드릴게요!”


결국 도저히 견디지 못한 실비아는, 그렇게 말하고는 억지로 웃으며 롬에게 인사를 해 주고 그에게서 달아났다.




이번에 실비아가 찾아간 것은, 불의 서커스를 한다는 괴인이었다. 불의 서커스. 실비아는 올리버가 보여주었던 전단지의 그림을 기억해내며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될지, 잔뜩 기대했다. 예전부터 불의 서커스를 하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동경의 대상이었다. 위험천만하게 아름다운 불을, 아무렇지도 않게 몸에 두르고, 뿜어내거나 삼키고, 불로 묘기를 부리는 그 모습이란. 재주좋은 서커스가 다녀간 날 밤이면, 사실 그들은 붉은 피부에 머리에 뿔이 달린 악마라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그래서 잔뜩 기대를 하던 실비아는, 늙은 노파와 만나게 되었을 때, 적잖이 당황했다.


“저기···?”


“그분입니다.”


친절하게 실비아를 안내해 주었던 단원은 웃으며 그렇게 말해주고는 저쪽으로 훌쩍 걸어가버렸다.


“저, 안녕하세요?”


그래서 실비아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노파에게 다가가 웃으며 말을 붙여 보았다. 그녀는 조그만 화톳불을 피워놓고, 그 앞에 앉아 떨리는 두 손으로 한 손에는 조각칼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나무토막을 집어들고 나무를 깎아 인형을 만들고 있었다. 이미 그녀의 앞에는 그렇게 만들어낸 인형 두 개가 바닥에 팔자좋게 누워있었다.


“누구?”


그리고 노파가 얼굴을 돌려, 실비아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조금 끔찍해 보였다. 화상 흉터로 얼룩덜룩한, 주름이 깊게 패인 얼굴에, 두 눈은 불에 타버린건지 어떤지 눈동자가 희끄무레하고 혼탁했다.


“아, 저는요. 연금술사의······조수에요. 단장님이 약을 만들어 달라고 해서 찾아왔어요.”


“연금술사?” 노파의 얼굴에 살짝 화색이 돌았다. 그녀는 느릿하게 손에 들고 있던 조각칼과 나무토막을 내려놓았다. “연금술사야?”


“저는 아니고요!” 실비아는 재빨리 발뺌했다. “조수에요, 저는. 감기에 걸리셨다던데요?”


“아, 맞아.”


“그래서, 증상이 어떤지 확인하고, 또 당신이 무슨 약을 원하는지 알아보려고 찾아왔어요. 몸은 좀 어떠신가요?”


“아프지.” 노파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이 나이가 되면, 몸 여기저기가 늘상 아프단다.”


“아, 네. 그래서, 감기는···?”


“마른 기침이 나는게 다야. 나이가 들면, 온 몸이 바싹 말라버려서, 눈물도, 콧물도 나지 않거든.”


실비아는 당황스러운 농담인지, 진담인지 뭔지를 들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럼 기침 멎는 약이면 될까요?”


“아, 그래. 무슨 약을 원하는지 알려달라고 했지?”


“네. 달리 원하시는 약이 있나요?”


“나 말야. 죽음의 약을 만들어 줄 수 있을까?”


“네?” 완전히 당황하여, 실비아는 갈라지는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뭐라고······”


“역시 안되나보구나.” 조금 쓸쓸하게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노파가 다시 미소를 지었다. “미안해. 방금 한 말은, 그냥 잊어주려무나. 감기약이면 충분하단다.”


“아, 네. 저, 그럼······”


“그래. 그만 가봐야 하지? 붙들어 둬서 미안하구나. 그럼, 어서 가 보렴.”


그리고 노인은 다시 조각칼로 나무인형을 느릿하게 깎아내기 시작했다. 실비아는 잠시 그녀의 근처를 어물쩡거리다가, 곧 머뭇거리며 발걸음을 돌렸다.




마지막으로 그녀가 찾은 것은, 아까 트로이의 천막에서 보았던, 그 폴라라는 소녀였다.


“안녕하세요.”


“아, 또 만나네요.” 폴라가 공손하게 웃으며 허리를 살짝 숙였다. 그녀가 머물고 있는 것은, 그녀의 개인 천막이었다.


“혼자 지내고 계신가봐요?”


“아, 저는. 조금 특권이 있거든요.” 쑥스럽다는듯 말하며, 폴라는 살짝 얼굴을 붉혔다.


“그래요?”


“네. 공중 그네 타는 사람은 저밖에 없거든요.”


“공중그네요?”


실비아가 눈을 반짝이며 되묻자, 폴라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공중그네는 손님들이 좋아하시는데, 위험하고 힘들어서 타는 사람이 이제는 저밖에 없거든요. 다치거나, 은퇴하거나. 그런 일로 다들 가버렸어요. 그런데, 저까지 없어져버리면, 극단으로서는 손해가 크잖아요? 그래서, 이렇게 혼자 쓸 방도 따로 만들어 주는 거죠.”


“우와······저기, 폴라. 공중그네를 타면 어떤 느낌이에요?”


“어떤 느낌이냐고요? 보자······” 폴라는 아름다운 추억에 잠긴 사람처럼 눈을 반짝였다. 상쾌하죠. 자유로워요. 그 어떤 때보다도. 두 손으로 그네를 붙잡고 있을 때는, 아직 두려운 마음이 조금 남아있지만, 온 몸을 저 허공위로 내던져버리면 두려움은 간데없이 사라지고, 저는 자유로움과, 살아있음을 온 몸으로 느껴요.”


“멋져요. 저도 한번 해 보고 싶을 만큼······”


“해 보실래요?”


“아, 저는, 그러니까······”뒤늦게 얼굴을 붉히고, 손사레를 치며 실비아가 말했다. “저는, 조금 무리잖아요?”


“누구나 할 수 있어요. 마음만 따라준다면.”


“그런가요?”


“그래요. 저도 그랬으니까요. 다만, 머리가 나쁘면 조금 고생은 하겠죠. 우리 공중그네는 외어아 할게 많거든요. 공연 순서부터 시작해서, 몸 동작 하나하나, 파트너가 있을 때는 파트너와 합을 맞추는데도 엄청 신경써야했어요. 지금은 저 혼자 뿐이지만······”


조금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폴라가 말했다.


“저, 맞다. 당신, 약이 필요하다고 하시던데요. 발목이요.”


“아, 네. 발목 삔데 바르는 연고나, 그 비슷한거면 충분할거예요. 삔 발목은 안쓰고 가만 놔두는게 상책이잖아요?”


“그렇긴...하죠. 그런데, 듣자하니. 오늘 밤에 큰 공연이 있다던데요.”


“맞아요.” 폴라가 다시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아쉽긴 해요. 좋은 기회인데.”


“저, 유감이에요.”


“괜찮아요. 흔한 일이니까. 그런데, 제가 너무 시간을 빼앗은건 아니죠?”


“아, 네. 물론이죠.”


“그럼, 잠깐 저랑 수다라도 떨어 주시겠어요?”


그러면서, 여느 평범한 또래 소녀처럼 방긋 웃는 폴라를 본 실비아는, 그녀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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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42화 21.10.28 28 1 23쪽
41 41화 21.10.28 27 1 23쪽
40 40화 21.10.27 28 1 21쪽
39 39화 21.10.27 25 1 21쪽
38 38화 21.10.26 25 1 19쪽
37 37화 21.10.26 23 1 19쪽
36 36화 21.10.25 31 1 21쪽
35 35화 21.10.25 25 1 23쪽
34 34화 21.10.24 28 1 21쪽
» 33화 21.10.24 26 1 21쪽
32 32화 21.10.23 31 1 23쪽
31 31화 21.10.23 27 1 19쪽
30 30화 21.10.22 31 1 19쪽
29 29화 21.10.22 28 1 27쪽
28 28화 21.10.21 28 1 16쪽
27 27화 21.10.21 29 1 30쪽
26 26화 21.10.20 30 1 19쪽
25 25화 21.10.20 27 1 28쪽
24 24화 21.10.19 31 1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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