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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유자 님의 서재입니다.

행복의 연금술 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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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녹색유자
작품등록일 :
2021.10.08 16:53
최근연재일 :
2022.01.13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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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25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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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쪽

36화

DUMMY

무시무시한 기세로 끓는 솥을 향해, 펠릭스는 쉴새없이 올리버를 시켜 약재를 던져 넣도록 지시했다. 펠릭스의 말을 가만히 따르던 올리버는, 어떤 재료를 넣어도 미동조차 하지않고 꿀꺽 삼켜버리는 솥을 보며, 문득 기이하고 음습한 전설이 도는 어느 분화구가 떠올랐다. 그곳에 사는 신을 만족시키기 위해 수없이 많은 산제물이 바쳐졌다는 그런 분화구. 그러나 아무리 많은 산제물을 바쳐도 그 신은 아마 만족하지 못했을 것이다. 바로 그의 눈앞에 있는 이 솥처럼.




반죽을 같은 방향으로 젓기 시작한지도 이십 분이 지났을까, 갑자기 솥 안의 내용물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떡처럼 걸쭉했던 액체는 더이상 엉겨붙지 않고, 오히려 풀어지기 시작하여 솥 안의 액체는 점점 묽어졌다. 색깔도, 기분나쁜 붉은 색에서 오렌지빛으로 점점 바뀌다가, 거기서도 색깔이 다시 옅어지기 시작하여, 살구색을 거쳐 이제는 거의 상아색에 가까운 색깔이 되어 있었다.


“다 됐군요.”


마침내, 장작의 불을 최대한으로 키우고, 솥 위에 독특한 뚜껑을 씌워 솥의 내용물을 유리관을 통해 뽑아내며 펠릭스가 말했다.


“뭘 만든거야? 이렇게 손이 많이 가는 약은 잘 없잖아.”


“아주 좋은 약이죠.” 펠릭스가 얼굴가득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소녀에게, 하룻밤의 꿈을 꾸도록 만들어 주는 약이요.”


“그런 약은 벌써 몇 번 만들었잖아? 그 때는, 이렇게 난리법석 떨지도 않았고.”


“그렇기는 했죠.” 마지막 한 방울이 유리관에서 약병안으로 똑 떨어지자, 그제서야 펠릭스는 가벼운 경련을 일으키며 그대로 자리에 쓰러져버렸다.


“괜찮아?”


“강장제좀 줘요. 거기, 선반에 있어요. 고마워요 올리버. 그리고, 이 약은, 실비아한테 좀 가져다 주고요.”


“내가? 그럼 너는?”


“강장제 먹으면 금방 나아요.” 겨우 손가락만 움직이며, 펠릭스는 약병 뚜껑을 열고 약의 내용물을 입 안에 흘려넣었다.


“내 참. 못미덥기는. 알았어. 실비아한테 갖다주면 되지?”


“물론이죠. 수고해줘요 올리버.”


“그래. 너도.”


올리버가 약병을 들고 작업실 밖으로 빠져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펠릭스는 혼자 웃기 시작했다. 일단 터져나온 웃음은 금방 멈추지 않아, 어두운 작업실 안은 곧 펠릭스의 기이한 웃음으로 가득찼다.




“자. 약.”


실비아는 처음에는 무슨 우리에서 탈출한 괴물이 달려온 줄 알았다. 그러나 자세히보니, 그것은 올리버였고, 그의 손에 들린 것은 약병이었다.


“고마워요 올리버. 펠릭스는요?”


“몰라.”


실비아는 그에게 더 물어보려다가 말고, 그냥 웃기만 했다.


“무슨 약이래요?”


“소녀에게, 뭐랬더라. 하룻밤의 꿈을 꾸게 해 주는 약이랬나?”


“자기 전에 먹는 약이에요?”


“그렇지는 않을걸? 일단 마시기나 해 봐.”


실비아는 약병을 가만히 살펴보다가, 곧 주저하지 않고 병의 뚜껑을 연 다음 내용물을 입 안에 털어넣었다.


“어때?”


“굉장히, 미묘한 맛인데요?”


“어떤데?”


“제 살을 혀로 핥는듯한, 그런 맛이라고 할까······”


“오묘하군.”


“그래서, 무슨 약이었을까요?”


“모르지. 나야. 그럼, 난 이만 아까 하던거 마저 하러 가 봐도 돼?”


“아, 그랬지 참. 그래요. 어쨌든 고마워요 올리버.”


올리버가 성큼성큼 걸어가고 난 뒤에도, 실비아는 대체 지금 먹은 약이 무엇인지 고개를 갸웃했다.


“몸은 좀 어때요?”


“잘 모르겠어요. 무슨 약이었을까요?”


“아마, 몸이 유연해지는 약 아니었을까요?”


“그렇겠죠? 그럼, 어디······”


실비아는 시험삼아 공중그네를 붙잡았고······, 곧, 탄성이 터져나왔다. 두 소녀는 처음에는 놀랐고, 그 다음에는 잠시동안 의심했다. 그러나 의심은 곧 확신이 되어, 두 소녀는 잠시 방방 뛰며 손뼉을 치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공중그네 연습을 시작했다. 단 일 초도 허투루 낭비하지 않겠다는 열의로 두 눈을 불태우며, 두 소녀는 단단히 집중하여 그네를 탔다.




펠릭스가 천막으로 돌아온 것은 한 삼십분이나 지난 뒤의 일이었다. 약을 만드는데도 시간을 좀 써서인지, 이제 리허설도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다.


“트로이.”


기운이 쭉 빠진 목소리로, 힘겹게 서커스 천막 이층 난간위로 올라온 펠릭스는 힘빠지는 웃음을 지으며 트로이에게 왔다.


“뭐야, 뭐 만드라고라한테 기운이라도 빨렸어?”


“비슷하다고 볼 수 있지.”


“내 참. 엄청난데 펠릭스. 대체, 무슨 약을 만들었길레······”


펠릭스는 트로이에게 가까이 다가오라는 뜻으로 손짓을 했다. 그가 다가오자, 펠릭스는 그의 귀에 대고 방금 사용한 약의 재료들을 하나씩 말하기 시작했다.


“밧줄의 약!” 트로이가 믿을 수 없다는듯 말했다. “어려운 약이잖아. 그걸 만들었다고? 왜?”


“저 아가씨.” 펠릭스가 벌써 그네를 타고 공중을 붕붕 날아다니는 실비아를 가리키며 말했다. “꿈이라서. 내가 특별히 선심 좀 써 줬지.”


“그걸 만들어줄 정도야? 하기야, 밧줄의 약이면, 그렇게 기운이 없는 것도 이해는 가.”


“그래서, 트로이. 네가 보기엔 어때? 두 사람 다 무대에 올릴 만큼은 되나?”


“맹수 쪽은 어차피 물리지만 않으면, 그 외에는 별로 할게 없으니까 괜찮겠는데······”


“그런데?” 트로이가 괜히 말을 하다 말자, 펠릭스가 다그치듯 그에게 물었다.


“실비아라는사람.”


“그래.”


“엄청난데.” 그 소리를 듣자 펠릭스의 얼굴 위에 웃음이 떠올랐다.


“그렇지?”


“그래. 어마어마하게 머리가 좋은 사람인가봐. 한 번만에 공연 순서를 다 외고, 한두 번만 보여줘도 동작 하나를 외어. 엄청나. 그야말로, 탐나는 인재인데······”


“내 손님이야. 흑심 품지 말라고 트로이.”


“그래. 나도 친구 손님한테는 손 안대. 그래도, 솔직히 좀 아깝다. 대체 어디서 저런 사람을 찾은거야, 펠릭스?”


“내가 찾은게 아냐.” 펠릭스의 두 눈이 조금 흐리멍텅해졌다. “저 사람이 날 찾아왔지. 어느 날, 아침 창문을 여니 제비가 내 눈앞을 날아갔어. 이른 아침에 만나는 제비는 반가운 손님이 온다는 징조지.”


“징조!” 트로이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펠릭스. 아직도 그 미신을 믿어?”


“꽤 믿을만 하지 않아?” 막 그네에서 손을 떼고, 공중에서 몸을 세 바퀴씩이나 돌린 실비아가 반대편의 그네를 덥썩 붙잡는 모습을 보더니, 트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믿을만 하긴 하네. 하기야, 저런 손님이 찾아온다면 나같아도 그런 미신 믿겠어.”


“그래. 보통 손님이 아냐. 나를 찾아온 건 실비아지만, 실비아 역시 어쩌면 내가 찾던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아, 그래. 무슨, 약이랑 관련된 이야기였는데, 네가 못 만드는 약을 저 사람의 손을 빌려 만들겠다고?”


펠릭스는 말없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엄청난데.”


“그렇지. 아, 트로이. 이제 리허설이 끝났나본데.”


다시 분주하게 사방팔방 흩어지고, 무대 마무리를 하는 단원들을 보며 펠릭스가 중얼거렸다.


“이제 곧 개막이군.”


“그래.”


“펠릭스. 온 김에, 보고 가.”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


트로이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다음, 다시 무대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시간이 흐르자, 관객들이 빈 객석을 채우기 시작했고, 곧, 천막의 조명이 꺼지면서 무대의 막이 올랐다.




그럴싸한 연미복을 입은 사회자가 가장 먼저 무대 위로 올라왔다. 그러나 서커스 극단 안에서 혼자만 연미복을 입고 있다는 사실은, 그를 여느 광대보다 더욱 눈에 띄게 만들었다.


“원래는 내가 했어야 할 일인데.”


트로이가 말하자, 펠릭스가 그를 돌아보았다.


“오늘은 너랑 여기 특등석에서 구경하려고.”


트로이가 펠릭스를 돌아보고 웃자, 펠릭스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준 다음 무대로 시선을 돌렸다.




첫 번째로 등장한 것은, 접시 돌리는 재주꾼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손가락으로 접시를 빙글빙글 돌리다가, 접시를 공중으로 휙 던져올리고는 기다란 장대로 접시를 받치며 돌리다가, 그 상태에서 다른 장대를 꺼내 접시를 돌리다가, 돌리고 돌리고 또 돌리고. 나중에는 외발자전거를 타며 접시 열 개를 동시에 돌리는 기묘한 묘기를 선보이기까지 했다.


“사실, 접착제를 썼어.”


무대 아래에서 관객들의 환호와 박수갈채가 들리며 막이 내려가는 동안, 트로이가 말했다.


“손님한테 그렇게 다 떠벌려도 돼?”


“괜찮아. 어차피 사람들도 접시 돌리기에는 별로 신경 안 써. 만찬에 가서도 에피타이저를 걸고 넘어지는 사람은 잘 없잖아?”


“그거야 그렇네. 벌써 다음 무대인가?”


다시 막이 오르는 것을 보고 펠릭스는 중얼거리며 무대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사회자의 짧은 설명이 있었고, 이번에 나온 것은 몸이 아주 유연한 사람이었다. 이렇게 멀리서 보니, 그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불분명해 보였으며, 나이도 십대 초반에서 이십대 후반 사이의 어딘가인 것처럼 모호해 보였다. 아니, 그의 벗은 몸 위에 그려진 기이한 화장은, 그의 모든 것을 모호해 보이도록 만들었다. 심지어는 몸의 윤곽까지도. 그래서 그는 좁은 틈새를 뚫고 기어들어가거나, 자그마한 상자 안에 온 몸을 구겨넣기도 했다.


“저 사람은? 어디 접착제를 발랐어?”


“아니, 저 사람은 자기 관절을 살짝 뽑을수 있거든. 사실, 저것도 오래 못할 일이기는 해.”


조금 착잡한 얼굴로 트로이가 말했다.


“밧줄의 약을 쓰면 되잖아?”


“그랬다간, 재료비가 더 많이 들어. 적자가 난다고.”


“하기야.”


몸이 유연한 사람은 생각보다 보여줄 것이 별로 없었는지, 그 짧은 대화를 하는 사이에 그의 공연이 모두 끝나버렸다.




이번에 무대에 오른 것은 몇 명의 사람들이었다. 건장한 체격을 가진, 그 체격만큼이나 건강한 외모를 가진 남자들이 무대에 올라, 이상한 기합 소리를 내며 붕 붕 뛰고, 구르고, 공중제비를 돌기도 했다.


“이건 뭐야?”


“그냥 공연. 자기 건강미를 잔뜩 뽐내고 가는거야. 별거 없어.”


고리 사이를 뛰어 넘는 모습을 보고 펠릭스가 지적했다.


“불 붙이지 않아?”


“그건 전문가가 따로 있으니까. 앞서 불을 보여줘버리면, 나중에 볼 때 긴장감이 덜 하잖아.”


“그렇군.”


펠릭스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무대를 내려다보자, 이제 그 공연도 막바지에 이르렀는지, 사람 두 명을 목마를 타고 저 높은 곳에서 손으로 둥근 고리를 만들어 선 사람과, 그 한참 아래에서 고리를 노려보며 자세를 잡는 사람이 있었다.


“클라이막스야?”


“그래도, 저건 꽤 볼거리긴 해.”


그리고 그 남자는 아무런 도움도 없이, 약이나 장치, 줄, 끈,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오롯이 스스로의 힘으로 땅을 박차고 공중으로 뛰어올라, 그 작은 고리를 쑥 통과해 보였다. 그러자 객석에서 힘찬 박수소리가 터져나왔다.


“볼거리긴 한데······”


“객석에 바람잡이가 있어.”


트로이가 실토하자, 펠릭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바람잡이들. 어디에나 있지. 전에, 골든포트 경매장에 갔는데 말야. 거기 아직도 있더라고. 그 바람잡이들. 거기서 첼시도 만났지.”


“첼시! 잘 지내고 있대?” 옛 동문의 이름을 듣자, 트로이가 반갑다는듯 물었다. 그러나 펠릭스는, 첼시에게 드리운 검은 그림자가 떠올라, 웃으며 얼버무렸다.


“아마도. 잠깐 봤거든.”


“아, 그렇구나. 첼시. 그렇게 돈을 좋아 하더니. 결국 골든포트에 갔구나? 거기서 무슨 장사를 한대? 말솜씨는 꽤 좋은 편이잖아. 그래서 내가 언젠가, 진지하게 광대를 해 볼 생각이 없냐고 물었는데. 돈 안되는 일에는 관심없다고 바로 퇴짜맞았지.”


“뭐, 그런 일도 있었지······”


다시 무대의 막이 내리고, 새로운 막이 올랐다. 그리고 이번에 등장한것은, 그 힘빠지는 괴력의 사나이였다.


“오, 봐. 펠릭스. 괴력의 사나이야. 네 약이 얼마나 대단한지 한번 보자고.”


“아직 안 먹었을걸?”


“뭐?” 뒤늦게 깜짝 놀라며 트로이가 펠릭스를 돌아보았다. “왜?”


“아주 단단히 정신 차리라는 뜻에서.”


“펠릭스! 아무리 그래도, 오늘 밤은 중요한 무대라니까?”


“괜찮을걸. 봐.”


펠릭스가 가리킨 곳에서는, 괴력의 사나이가 평소처럼 차력을 보이고 있었다. 무거운 물건을 괴성을 지르며 들어올린다든가, 맨손으로 무언가를 때려부수고, 또는 맨몸으로 거친 몽둥이질을 견디는 그런 것들이었다.


“사실 소품의 도움이 커.”


“그럴 것 같았어, 트로이. 하지만, 진짜도 있잖아?”


“그래. 있었지. 예전에는 진짜가 더 많았어.” 트로이가 중얼거렸다. “예전에는 저 모든게 진짜였어.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인가 조금씩 가짜로 바뀌어갔지.”


“당연한 일이야. 진짜 몽둥이로 사람 패면, 괴력이 아니라 신이라도 금방 죽을걸?”


“그래. 그런 거야. 하지만, 그렇다고 바윗돌을 가짜로 만들 필요까진 없었는데······”


마침 무대 위로 커다란 돌덩이가 수레에 실려 들어왔다. 괴력의 사나이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자세를 잡고, 끙! 하고 힘을 주었다. 그러나 돌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바람잡이야.”


“다음엔 성공해?”


또다시 끙! 하는 소리가 났지만, 이번에도 바위는 꿈쩍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성공했어야 하는데.”


“이번에는 성공할걸.”


괴력의 사나이의 얼굴 위에 드리운 불안한 기색을 포착하며 펠릭스가 말했다. 다시 그는 자세를 잡고, 아까보다 훨씬 진지하게 두 손을 움직여 바위를 더듬다가, 마침내 끙! 하는 소리와 함께 돌을 들어올렸다. 비록, 머리위로 번쩍 든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바람잡이들의 성원에 힘입어 관객들은 그에게 박수를 쳐 주었다.


“들잖아.”


“그래도, 조금 실망이야. 펠릭스. 폴라한테는 바로 듣는 약을 줬으면서.”


“그렇지만, 그 사람한테도 이편이 좋지 않았겠어? 그는 스스로 책임지는 법을 좀 배워야지. 네가 대신 돈을 메꿔줄 것 까지는 없었다고, 트로이.”


“나도 알아. 그건 실수기는 했어.” 트로이가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보면, 항상 나는 큰 일을 앞두고서 결심을 잘못 내리곤 했지. 왜, 그때, 약을 만들때도······”


“아, 맞아! 연례 연금술사 교류회를 할 때면, 유난히 네 약은 영 미묘했지.”


“맞아. 고쳤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그 버릇이 좀 남아있었나봐.”


“이제 알면 됐지 뭘. 그래서, 다음 무대는 뭐지, 트로이?”




펠릭스는 별로 마음을 잡아끌지 못하는 몇 개의 무대를 건성으로 보다가, 맹수 조련사가 무대 위에 오르는 것을 보고 다시 눈을 빛냈다.


“올리버의 차례군.”


“올리버라. 좋은 채집꾼이던데.”


로라가 무대 위에 올라, 호랑이를 부려 재주를 넘게하고 곰과 함께 공을 타며 춤추는 것을 보며 트로이가 말했다.


“맞아. 붉은 가루병이 돌 즈음, 숲에서 만나 그대로 동료가 됐지.”


“어쩌다가 만났어? 그 때도 제비를 만났나?”


“생각해보니, 그런것 같기도 하고.”


“그래?”


“그래.” 이제 올리버가 무대위에 올라왔다. 멀리서 보니, 영락없는 두 발로 선 짐승 꼴인 올리버를 보고, 펠릭스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제비가 그렇게 영험한 동물인줄 몰랐는데. 우리 서커스단에서도 하나 길러야하나?”


“기를거면 한 쌍을 길러.”


펠릭스가 웃으며 말했다. 올리버의 차례는 순식간에 지나갔지만, 그는 마침내 그 곰과 교감을 나누어, 무려 곰과 손을 잡고 무도회 음악에 맞추어 두 악절 정도의 춤을 추었다. 그 기괴한 모습을 보고, 물론, 사람들은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너무 작위적인데.”


펠릭스가 웃으며 말하자, 트로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서커스 아니겠어?”


그 말에, 펠릭스는 동의한다는 뜻으로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무대의 막이 내리는 것을 보았다.




“이제 뭐가 남았지?”


“공중그네랑 불의 서커스.”


“최고 볼거리들이네.”


막이 오르는 무대를 보며 펠릭스가 중얼거렸다.


“맞아. 오늘밤 찾아온 귀족의 입맛에 맞았으면 좋을텐데.”


“어디있대?”


고개를 난간 밖으로 쭉 빼고 관객석을 돌아보며 펠릭스가 말했다.


“몰라. 가볍게 변장을 하고 오거나 했나봐.”


“하긴. 괜히 구경꾼들을 모으는 것보다는 그게 낫지. 잘못하면, 서커스가 아니라 서커스를 보러온 귀족을 구경하러 손님들이 들이닥칠 테니까.”


“그래. 배려할 줄 아는 귀족이라 그나마 다행이랄까 뭐랄까.”


높다란 공중그네를 타고, 폴라가 하늘을 날기 시작했다.


“시작됐다.”


폴라는 우아한 음악에 맞추어 한동안 온 몸을 공중으로 날리며 묘기를 선보였다. 누군가 그 모습을 본다면, 마치 정말 날개라도 달린 요정처럼 보인다고 할 지도 모를 정도로.




높다란 공중그네의 탑 위에선 실비아는 심호흡을 했다. 바로 몇 발자국 아래, 천길 낭떠러지가 보였고, 거기서 시선을 조금 돌리면 무수히 많은 관객들이 어둠 속에서 눈을 빛내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저편에서, 이제 폴라의 신호가 왔다. 마침내, 실비아는 천막 밖으로 발자국을 내딛었다. 몸에 밴 귀족의 습관대로, 온 몸을 우아하게 움직이며, 그녀는 그네를 잡았다.

실비아의 두 발이 발판에서 떨어졌다. 무시무시한 바람을 맞으며, 그녀는 손을 놓고 온 몸을 공중으로 내던졌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실비아는 자유로웠다. 공중에서 몸을 팽그르르 돌리며 온 세상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을 보며, 그녀는 환희에 차 웃음을 지었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것 같은 시원함. 마구잡이로 거리를 내달려도 그 어떤 것에도 걸리지 않는 듯한 자유로움을 만끽하며, 그녀는 이제 회전을 끝마치고 반대편에서 날아오는 폴라의 손을 맞잡으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실비아의 머리속에 폴라가 한 말이 떠올랐다. 공중제비를 돌다가, 객석의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는 이야기. 실비아는 그것이 반쯤 허풍이라고 생각했다. 바로 지금, 객석 사이에서 익숙한 얼굴이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얼굴로, 실비아와 두 눈을 마주치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앗차 하는 순간에, 그녀의 몸은 이미 힘을 잃고 떨어지기 시작했다. 실비아는 뒤늦게 고개를 들고 팔을 뻗어올렸다. 다행히, 늦지 않게 폴라가 거의 추락하듯 그네를 잡고 내려과 그녀를 붙잡은 덕택에, 그녀는 볼썽사납게 떨어지지는 않았다. 폴라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마치 이것도 무대의 한 장면이라는듯 자연스럽게 도로 공중으로 치솟으며 실비아를 반대편 그네로 무사히 보내주었다. 그리고 폴라가 혼자 몇 번의 연기를 더 한 다음, 공중그네의 막이 내렸다.




“사고였어!”


경악한 목소리로 트로이가 외치며 허둥지둥 난간에서 내려왔다. 그 뒤를, 펠릭스가 허둥거리며 따라간 것은 물론 말 할 것도 없었다.


“아니, 어떻게?”


트로이가 믿을 수 없다는듯 중얼거렸다. 그는 앞에서 걸리적거리는 단원들을 밀치며 대기실로 뛰어들었다.


“폴라!”


대기실에서는 폴라와 실비아가 나란히 앉아있었다. 모양새로 봐서는, 아마 풀죽은 실비아를 폴라가 위로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괜찮아?”


“아, 단장님. 저는 괜찮아요. 그런데, 실비아가······”


“실비아!”


한발 늦게 펠릭스가 대기실로 쳐들어왔다.


“사고였잖아요. 뭐죠? 실수인가요? 약에 부작용이라도 있었어요?”


펠릭스는 그저 떠오르는 대로 마구잡이로 말을 뱉으며 실비아에게 다가갔다.


“펠릭스. 저기, 제가, 헛것을 본 거겠죠?”


이제서야 실비아는 고개를 들어 펠릭스를 마주보았다. 아주 복잡하고 심란한 그녀의 얼굴을 보고, 펠릭스는 뭐라고 대답할지 잠시 고르다가 금세 포기했다.


“뭘 봤는데요?”


“그러니까요······”


갑자기, 대기실 근처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트로이는 무언가 낌새를 알아차린 듯 잽싸게 대기실 밖으로 나갔다. 곧, 당황스러운 트로이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무언가 골치아픈 결정을 내리기 직전처럼 끄응, 하는 소리가 났다.


“뭐죠?”


폴라가 불안한듯 떨리는 눈으로 물었지만, 펠릭스라고 해서 딱히 나은 것은 없었다.


“잠시 살피고 올까요?”


펠릭스가 나서기도 전에, 대기실 입구를 가린 천이 살며시 열렸다. 먼저 트로이가 조금 못마땅한 표정으로 들어왔고, 그리고 천 너머에서 어느 여인이 아주 귀족적인 자태를 뽐내며, 평민의 옷으로도 가릴 수 없는 우아함과 아름다움을 내보이며 안으로 천천히 걸어들어왔다. 그러나, 펠릭스는 그 얼굴을 보고 어디선가 본듯한 익숙함을 느꼈다. 그 여인은 잠시 놀란 눈으로 대기실 안을 돌아보다가, 실비아를 보더니 깜짝 놀란 것처럼 굳었다.


“실비아···?”


실비아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두 눈이 크게 확장되었고, 입가가 잠시 떨리더니, 그녀는 이내 울며 달려가 그 여인의 품 안으로 뛰어들었다.


“언니!”


“실비아. 세상에······”


“언니, 언니 맞지? 언니! 어떻게, 어떻게···...”


펠릭스와 트로이, 그리고 폴라는 이 당황스러운 감동의 재회를 잠시 멀뚱히 지켜보다가,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살금살금 소리를 죽여가며 다들 조용히 대기실을 비워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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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47화 21.10.31 26 1 25쪽
46 46화 21.10.30 25 1 21쪽
45 45화 21.10.30 27 1 31쪽
44 44화 21.10.29 27 1 23쪽
43 43화 21.10.29 24 1 18쪽
42 42화 21.10.28 28 1 23쪽
41 41화 21.10.28 27 1 23쪽
40 40화 21.10.27 28 1 21쪽
39 39화 21.10.27 25 1 21쪽
38 38화 21.10.26 25 1 19쪽
37 37화 21.10.26 22 1 19쪽
» 36화 21.10.25 31 1 21쪽
35 35화 21.10.25 25 1 23쪽
34 34화 21.10.24 27 1 21쪽
33 33화 21.10.24 25 1 21쪽
32 32화 21.10.23 31 1 23쪽
31 31화 21.10.23 27 1 19쪽
30 30화 21.10.22 31 1 19쪽
29 29화 21.10.22 28 1 27쪽
28 28화 21.10.21 28 1 16쪽
27 27화 21.10.21 28 1 30쪽
26 26화 21.10.20 30 1 19쪽
25 25화 21.10.20 27 1 28쪽
24 24화 21.10.19 31 1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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