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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유자 님의 서재입니다.

행복의 연금술 가게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녹색유자
작품등록일 :
2021.10.08 16:53
최근연재일 :
2022.01.13 18:00
연재수 :
17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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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85
추천수 :
188
글자수 :
1,774,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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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23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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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9쪽

31화

DUMMY

한적하고 느긋한 오후의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빗소리도 어느덧 점점 약해져서, 이제 창문을 살짝 열어도 될 정도였다. 살짝 열린 창문의 틈새로 빗물을 머금은 가을의 쌀쌀한 바람이 불어왔지만, 그 바람은 텁텁한 실내의 공기를 상쾌하게 환기시켜 주었다.


“좋네요.”


“넌 비 오는 날이 마음에 드나봐.” 벽난로 가에 앉아, 조그만 소책자를 읽으며 올리버가 말했다.


“책을 읽어요?”


“가끔. 왜, 너도 볼래?”


올리버는 실비아에게 책 표지를 들어 보여주었다. 그것은 어느 시인이 쓴,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하며 자신의 철학을 조곤조곤한 어투로 말하는 책이었다.


“제 취향은 아니네요.”


“그래? 그럼 말고.”


올리버가 다시 책에 집중하자, 실비아는 열린 창문 밖으로 시선을 멀리 내던졌다. 아직까지도 낙엽이 지지 않은 잎사귀에 물방울이 맺힌 모습은 사소하지만 사랑스러웠고, 벌써 비가 그쳤나 싶어 어디선가 팔랑거리며 날아가는 나비, 그리고 잠자리를 보자 괜히 반갑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그것들이 조금이나마 귀엽게 느껴지기도 했다. 본디 벌레를 싫어하던 자신이, 그런 기분이 들었다는 그 사실에 실비아는 작게나마 놀랐다.


“밖에 나가고싶어?”


“네?” 실비아가 당황하여 고개를 돌리자, 언제부터인가 책은 덮어두고 조용히 자기를 쳐다보고있던 올리버와 눈이 마주쳤다.


“아니, 나가고 싶은 눈치길레.”


“하지만, 가게를 봐야 하잖아요.”


“나 혼자서도 볼 수 있어. 그런 적도 몇 번 정도 있었고.”


“그런가요?”


“그래. 정말 다급한 손님이면 펠릭스를 찾으러 마을로 내려가면 그만이니까. 그 정도로 급한 손님 아니면 대강 그놈이 만들어 둔 약을 파는 걸로도 충분하니까. 답답하면 가서 산책이라도 하고 와. 우산 줄까?”


“아니, 아니오. 괜찮아요. 로브를 덮어쓰면 돼요.”


“그래. 그럼 다녀오라고.”


그리하여 실비아는 조금 얼떨결에, 가게도 내버려둔채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행복의 연금술 가게를 둘러싼 숲 속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되었다. 덮어쓴 로브에 이따금 나뭇잎 끝자락에 맺혀있던 큰 물방울이 똑 떨어지면, 툭 소리가 나며 머리에 찬 기가 느껴졌다. 그렇지만, 그리 기분나쁜 경험은 아니었다. 오히려 옷이 비를 막아주니, 빗속을 느긋하게 걷고 있다는 사실이 아주 마음에 들 정도였다.


“찍찍!”


갑자기, 로브 안에서 무슨 소리가 나, 실비아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로브의 모자를 벗고 손을 쑥 집어넣었다. 그러자, 폭신폭신하고 조그만 덩어리가 손에 만져지는가 싶더니, 잽싸게 손을 타고 기어올라왔다. 가벼운 비명을 지르며, 손을 꺼내 돌아보자, 올리버를 따르는 다람쥐 코튼이 새까만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코튼!”


실비아는 신기한 기분이 들어, 다람쥐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그 다람쥐는 제 이름을 알아듣는지 어떤지, 이름을 부르자 찍 하는 소리를 냈다.


“날 따라온거야?”


슬금슬금 팔을 타고 기어오르는 코튼을 살펴보며 실비아가 말했다. 어찌나 털이 윤기가 나고 복실거리는지, 떨어진 물방울이 맺히지도 않고 그대로 굴러 떨어질 정도였다.


“세상에. 여긴 좀 쌀쌀할텐데. 따뜻한 집 안에서 올리버랑 같이 놀지 그랬어?”


그러자 다람쥐는 코를 벌름거리며, 수염을 까딱이더니 잽싸게 주머니 속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래. 나랑 같이 산책 가고 싶었어?”


주머니 속에서 찍! 하는 소리가 나자, 실비아는 웃음을 피식 터트렸다.


“그래. 같이 구경하자. 사실, 나도 이 근처에 뭐가 있는지는 잘 몰랐거든.”


실비아는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습기와 생기를 머금은 풀들을 기분좋게 밟으며, 그녀는 뜻밖의 동료와 함께 가볍게 숲 속을 걸어갔다.




숲 속은, 익숙하다고 생각했건만, 이렇게 조용히 둘러보니 하나같이 새롭게 짝이 없었다. 어느 나무 한 가운에 작게 뚫린 구멍을 멀리서 가만히 보고 있다가, 새 한 마리가 그 안으로 쑥 들어갔다, 쑥 빠져나와 어디론가 포르르 날아가는 것을 보고 그녀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아니면, 키 작은 관목과 키큰 나무 사이에 열심히 지어둔 집에 아직까지도 꿋꿋하게 붙어있는 거미도 있었다. 실비아는 거미가 조금 무서웠지만, 그 거미가 만든 집에 물방울이 촘촘하게 맺혀있는 모습은, 꼭 어느 보석 상이 가져와 자랑스레 내보이는 진주 목걸이보다도 아름답게 보였다. 실비아는 거미줄을 가만히 보다가, 갑자기 바람이 불어 거미줄이 요동치자 잽싸게 달아났다.




어느 나무 위에서 기척이 느껴져, 가만히 서서 천천히 눈을 돌려 보면, 아직 녹색으로 반짝이는 나뭇잎 사이에 숨죽이고 숨어있는 다람쥐도 얼핏 보였다. 그러면 실비아는 코튼의 친구를 만난 것처럼, 그들에게 반갑게 다가갔지만, 그럴 때 마다 다람쥐들은 찍찍 소리도 내지않고 잽싸게 달아나버렸다. 그러면 실비아는 다시 아쉬운 목소리로 주머니 속에 둥지를 튼 코튼의 이름을 부르며 조용히 뭐라 중얼거렸다. 물론, 코튼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도리는 없었지만 말이다.




실비아가 가게로 돌아온 것은, 어둠이 드리우는줄도 모르고 천천히 숲을 둘러보다가 도롱이벌레의 드리운 고치와 얼굴이 부딪혔을 때였다. 처음에 그녀는 바람에 꺾인 나뭇가지가 얼굴에 부딪힌 줄 알았다. 그러나, 그 얼기설기 엮은 고치 속에서 애벌레가 고개를 쑥 내밀자, 실비아는 비명을 지르며 지금까지 걸었던 거리를, 한 달음에 도로 달려왔다.


“뭐야? 왜?”


현관 문을 벌컥 열고 숨을 고르고 있는 실비아를 보며 올리버가 다가갔다.


“벌레! 벌레가···”


“뭐? 무슨 벌레?”


올리버는 실비아가 멀쩡한 것을 확인하고는, 그녀를 안으로 들이고 현관문을 닫은 다음 부엌으로 가서 찬 물을 한 잔 따라왔다. 실비아는 그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나서야 자기가 겪은 일을 말할 수 있었다.


“꽤 재밌었겠어.”


실비아의 모험담을 들은 올리버의 소감이었다. 그는 실비아에게 아무런 위험도 없었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느긋하게 벽난로가에 풀썩 주저앉았다.


“벌레랑 부딪혔어요!”


“흔한 일이야. 그 벌레도 아마 적잖게 놀랐을걸. 그러니 쌤쌤이지 뭐.”


숨을 고르고 나자, 실비아에게도 벌레와 부딪힌 일이 그렇게 기분나쁘게만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녀도 쫄래쫄래 벽난로 가에 가서 풀썩 앉자, 줄곧 실비아의 주머니에 숨어있던 코튼이 고개를 불쑥 내밀고 수염을 까딱이며 코를 킁킁거리다가, 제 주인의 냄새를 알아채고 올리버의 옷자락을 쥐고 쪼르르 그의 팔을 타 올랐다.


“느긋하네요.”


탁 탁 소리를 내며 타오르는 벽난로 속의 장작을 보며 실비아가 중얼거렸다.


“그렇지? 이런 생활도, 꽤 좋지 않아?”


“그럴지도 몰라요.”


실비아는 이제 아주 푸근한 얼굴로,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다리를 끌어안고 벽난로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여기가 마음에 들지?”


“네. 생각보다요.”


올리버는 소리없이 씩 웃었다.


“네가 원한다면, 여기서 살 수도 있어.”


“그런가요?”


“그래. 십 년이고, 이십 년이고. 네가 원하는 만큼······”


“하지만, 두 달이에요. 이제 한 달 하고도 이 주 조금더 남았군요.”


실비아가 조금 쓸쓸하게 말하자, 올리버는 고개를 슬며시 돌리며 생각했다.


‘역시 안 되나.’


그러나 올리버는 굳이 자기 생각을 입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다만 실비아가, 타오르는 불 속에서 무언가를 찾기를, 앞으로 살아갈 만한 충분한 이유를 찾기를 바라며 조용히 자리를 비켜주었다.




펠릭스가 연금술 가게로 돌아온 것은 밤이 다 되어서였다. 그는 한 손에 두툼한 주머니를 들고 의기양양하게 가게 현관문을 벌컥 열며 들어왔다.


“나 왔어요!”


“펠릭스. 비 오는날 치고는, 꽤 기분이 좋아 보이는걸.”


“그렇죠. 좋은걸 샀거든요.” 펠릭스는 대단한 보물이라도 가져온 것처럼 당당하게 부엌 테이블 위에다가 주머니를 내려놓았다.


“뭐예요?”


“아, 실비아. 어때요, 가게는 볼 만 하던가요?”


“아, 네. 물론이죠.”


“실수로 약값을 안 받았다든가, 그렇지는 않았죠?”


실비아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대답했다.


“물론이죠.”


“그래요. 여기 찾아오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사연있는 사람들 뿐이니까, 어쩌면 당신이 약값을 잊어버렸는데 그 쪽에서 먼저 알려줬을지도 모르죠.”


“아니, 펠릭스! 옆에서 구경이라도 했어요? 어떻게...아.”


실비아는 뒤늦게 조금 부끄럽다는듯 입을 가렸다.


“내 참. 하여튼. 그래도 뭐 약값은 받았으니 됐어요. 뭐, 그래서 달리 별 일은 없었고요?”


“딱히요.”


“올리버. 그래요?”


“물론. 뭐, 손님이 실비아가 이 가게의 새로운 주인인줄 알고 잠시 착각한 것만 빼면.”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펠릭스는 무슨 대단한 일이라도 일어난 양, 의자에 앉으려다 말고 도로 벌떡 일어났다.


“아니, 별 일 아니잖아요?”


“별 일이죠! 당신같은 초짜를 나같은 장인이랑 헷갈리다니. 올리버. 어떤 손님이에요? 내가 기억력이 좋아지는 약과, 머리가 총명해지는 약을 같이 처방해 줘야지 원···”


“그 손님은 아직 정정하고, 그리고 머리도 기억력도 당신보다 훨씬 낫거든요?”


“아니, 당신이 왜 화를 내요?”


“그야, 그 손님이 저한테는 잘 대해 줬으니까 그렇죠!”


펠릭스는 두 사건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잠시 파악하려 애쓰다가, 금새 포기하고 테이블 앞에 앉았다.


“그래서, 그건 뭐야?”


올리버가 코를 킁킁거리며 물었다. 그가 코를 킁킁거리자, 그의 옷 어딘가에 숨어있던 코튼도 같이 나와 주인을 따라 코를 킁킁거렸다.


“이게 뭐냐면...아니, 이 다람쥐가! 저리가! 훠이!”


“코튼! 펠릭스, 이건 올리버가 키우는 애완 다람쥐라고요! 함부로 대하지좀 말아요!”


테이블 위로 풀쩍 뛰어올라 주머니 근처에서 알짱거리던 다람쥐를 펠릭스가 쫓자, 다람쥐는 테이블에서 바닥으로 폴짝 뛰어내려 실비아의 다리를 타고, 손을 타고 그녀의 어깨 위에 앉았다.


“아니, 올리버. 당신이 애완 동물을 다 키워요?”


“어쩌다보니.”


“짐승 사냥꾼이 애완 동물을 키우다니. 세상도 참 말세로군.”


펠릭스는 괜히 다람쥐를 보고 화를 내며 말했다.


“그래서, 그 주머니는 뭐냐니까요?”


“아 이거요. 좋아요. 내가 뭘 사왔는지, 다들 한번 보라고요!”


펠릭스는 잔뜩 애를 태우다가, 마침내 주머니를 묶은 끈을 슥 풀고는 주머니를 활짝 열어보였다. 실비아는 그 안에서 진기한 보석이나, 이국적인 꽃이 핀 가지 따위가 나타날 줄 알았다. 그러나 주머니 안에 들어 있던 것은, 빵이었다. 그녀의 주먹 정도 크기의 빵. 조금 희고, 조금 노랗고 한 면이 갈색으로 먹음직스럽게 익은, 버텨 향기를 뿜어내는 그런 빵.


“이건······”


“빵이네.”


“네. 빵. 버터를 발라 구운 부드러운 빵. 이런 빵 먹어본지 오래 됐잖아요?”


“펠릭스. 돈 있어?”


“저금 하나 털었죠 뭐.” 펠릭스는 별 것 아니라는듯 말하고는 주머니 속으로 손을 쑥 집어넣고, 빵 하나를 꺼내 기세좋게 베어물었다. 빵은 텁텁하게 뜯겨나가는 대신, 아주 부드럽게 길게 꼬리를 남기며 죽 찢어졌다.


“맛있어?”


“네. 올리버. 당신도 먹어요. 실비아 당신도.”


실비아는 잠시 머뭇거리며 섰다.


“안 먹어요?”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잠시 생각을 좀 정리하려고요.”


“그래요? 뭐든 간에, 빨리 하는게 좋을 걸요. 다 먹어버리면 곤란할텐데.”


넉살좋게 다시 빵 하나를 덥석 집으며 펠릭스가 말했다. 실비아는 지금 자기 눈앞에서 천진난만하게 빵이나 뜯고 있는 사람이, 오늘의 처음이자 마지막 손님이 말한 그 싹싹하고 성실한 청년이라는 사실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정말 이상해요.”


“뭐가요?”


“당신이요! 흥.”


그러나 실비아가 주머니 속으로 손을 넣었을 때, 그곳에서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실비아는 처음에는 자기가 착각했다고 생각하여 주머니를 뒤지다가, 손을 빼고 주머니 안을 들여다 보다가, 주머니를 거꾸로 테이블 위에 뒤집어 탈탈 털었다. 그러자, 빵 부스러기가 후두둑 떨어졌다.


“내 빵.”


실비아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녀의 시선이 펠릭스에게 옮겨갔다.


“왜요.”


“내 빵!”


“빨리 먹으랬잖아요.”


“빵! 남겨뒀어야죠!”


“난 경고했어요.”


“경고라니! 펠릭스! 애도 아니고···”


“아니, 아야! 내 돈으로 산 건데, 아야! 아니, 이 다람쥐가...올리버!”


다람쥐 코튼까지 실비아에게 가세하여 펠릭스의 손가락 끝을 잽싸게 물고 달아나버렸다.


“올리버! 저 다람쥐, 똑바로 안 가르치면 내가 온 집안에 쥐덫을 놓을 거예요!”


“이리와 코튼! 저 사람은 물면 안 돼. 알았지? 어허, 씁.”


올리버는 코튼에게 무언가를 가르치려는듯 보였지만, 사실 그런다고 해서 코튼이 그의 말을 알아들을지 어떨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제 빵. 없어요?”


“네 뭐. 그래도 지체높은 귀족 자제...아야!”


“빵 내놔요! 펠릭스!”


“어이, 너무 싸우지들 마.”


왁자지껄한 저녁식사의 현장을 한 발 떨어져 구경하며, 올리버는 테이블은 외면하고 코튼과 손장난을 시작했다.




요란스러운 저녁 식사가 끝나자, 실비아는 씩씩 화를 내며 소파에 앉았다가, 자기가 조용히 머물 방이 없다고 하소연을 하여 일단은 연금술 작업실로 들어가 문을 쾅 닫아버렸다.


“내 참. 그게 그렇게 화낼 일인가요? 까짓 빵 좀 먹었기로서니···”


“어리잖아. 실비아도.”


올리버는 멍하니 벽난로 속에서 하얗게, 희미하게 타들어가는 장작을 구경하며 말했다.


“그래서, 재료 찾기 여행은 잘 되가?”


“나쁘지 않아요. 오늘로 13일 차인데, 모은 재료는 4가지죠. 불나무 껍질 건은 좀 아쉽지만.”


“대신, 화이트플레인 마을에 물벼락을 쏟아부었잖아. 언젠가, 네 꿈이라며?”


“그래요! 제 꿈이었죠. 커다란 먹구름을 뭉게뭉게 피워올려 마을을 물바다로 만드는 것. 그래서 저는 후련하긴 하지만, 그래도, 재료를 잃은 건 좀 아깝긴 해요. 처음에 두 개 찾았으면 좋았을텐데. 어디 벼락 맞은 나무 없나···”


“우르릉!”


때마침 천둥 소리가 들리며, 창 밖에서 매서운 바람소리가 웅웅거렸다.


“근처에 잘 찾아봐. 어디 하나 있나.”


“밤나무는 안 돼요. 감나무나 대추나무면 몰라도.”


“까다롭군.”


올리버는 실없이 중얼거렸다.


“그렇지만, 그 때 조지가 준 호박석. 그게 있으니 어쩌면, 뭐라도 될지도요.”


“호박석이? 그게 약재가 되나?”


“종종 쓰죠. 호박석은 호박마다 효과가 판이하게 달라서, 함부로 약용으로 쓰기 힘들어서 약재로 잘 안 쓸 뿐이에요. 다른 보석들, 그러니까 수정이니 사파이어니 자수정이니, 아니면 금이니뭐니 하는 것 보다도 약용으로는 호박석이 훨씬 낫죠.”


“그래? 그러면 뭐, 잘 해봐. 나는 약에는 영 문외한이라.”


다시 멀리서 우르릉 소리가 들려왔다.


“진짜 근처 한번 찾아봐야하는거 아니야?”


“여긴 밤나무 숲인데요.”


“그래도. 어디 귀퉁이에 조그맣게 뭐 하나 나무가 자라있을지도 모르잖아.”


“조그만 나무가 어떻게 벼락을 맞아요. 키 큰 나무쯤 돼야 벼락을 맞지.”


“그것도 그렇네. 조금 아깝게 됐어. 그런데, 아까부터 뭐 하고 있는거야?”


“아, 편지요.” 펠릭스는 쓰던 종이를 들어올려 올리버에게 보여줬다.


“편지를 자주도 쓰는군. 이번에는 또 뭣하러?”


“흑살구.” 펠릭스는 짧게 대답하고 편지지 위에서 펜을 놀리다가 멈추기를 반복했다.


“왜, 안 써져?”


“아,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렇네요. 아직 비도 오고···”


창문 밖이 번쩍이더니 우르릉 쾅! 하는 소리가 들렸다.


“들었어요?!” 그리고 굳게 닫힌 작업실의 문도 활짝 열렸다. “가까웠어요!”


“실비아. 마침 잘 나왔어요. 잠시 이리로 와 봐요.”


“왜요?” 다시 창문이 번쩍이자, 그녀는 재빨리 부엌 테이블로 다가왔다.


“자, 좀 도와줘요.”


“뭘 도와요?”


“편지. 편지 쓰는 것좀 도와줘요. 당신은 분명 귀족의 예법들. 그러니까···?”


벌써 실비아의 얼굴은 아주 의기양양해져 있었다.


“도와줄래요?”


“당신이 아까 일에 대해서 사과 한다면요.” 팔짱까지 낀 채, 실비아가 말했다.


“무슨 일요?”


“빵요! 당연히. 그 빵, 버터를 발라 구운 맛있는 빵이잖아요! 내가 좋아하는건데, 당신이 홀랑 다 먹어버려서···”


펠릭스는 조용히 올리버를 힐끗 돌아보았다. 그러자 올리버는 슬쩍 고개를 피해버렸다.


“알았어요. 빵은 미안해요 실비아. 그러니까, 편지 좀 도와줘요.”


“좀 더 진심을 담아서 사과해요.”


펠릭스는 올리버에게 이번에는 도움을 구하는 시선을 보냈다. 그러나 그의 신호는 올리버에게 도착하지 못하고, 그의 옆얼굴 어디선가 도로 반사되어버렸다.


“사과!”


“아, 음. 미안합니다 실비아. 나의 경솔한 행동이 당신을···”


“전혀 진심이 담기지 않았잖아요!”


“아니, 몰라요 나도! 진심을 담으라니.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내 진심이 담겼는지 아닌지, 그리고 내가 진심을 담았다고 당신이 알아먹을수나 있나요?”


펠릭스가 오히려 쪼아대자, 실비아는 잠시 주춤했다.


“그러면, 성의있게 사과해요.”


“성의! 더 어려워졌어요!”


“아니, 그럼 사과 안 해요?”


“빵 홀랑 다 먹어서 미안해요, 실비아! 당신 몫을 남겨 뒀어야 하는데, 나 혼자 다 먹어버렸죠. 그래요. 조금 미안하게 생각해요.”


“조금?”


“그래요. 조금. 많이는 아니고, 조금.”


실비아는 어이없다는듯한 표정으로 펠릭스를 보다가, 그 정도면 그래도 만족스런 사과라고 생각했는지 드디어 팔짱을 풀었다.


“이리 줘 봐요. 어디 보자...아니, 서쪽으로 가요?”


“한가하게 읽고있지만 말고, 쓰는 거나 좀 도와주지 그래요?”


“아, 알았어요. 그나저나, 당신 은근히 발이 넓네요. 아니, 사막 횡단? 제정신이예요?”


“그만 읽고 도와줘요, 실비아.”


“아니, 둘 다 너무 시끄럽군.” 올리버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코튼이 잽싸게 그의 손을 타고 올랐다.


“어디 가려고요?”


“잠깐 밖에. 어린 애들은 조용히 집이나 보고 있으라고.”


“멀리 가지는 말아요 올리버.”


“그래요. 벼락도 치니까···”


“어련히 알아서 하려고. 아직 너희 애들한테 걱정받을 나이는 아니니까. 그리고 너희들이야말로 너무 자주 싸우지는 말라고.”


올리버는 행복의 연금술 가게의 따스하고 빛나는 건물에서 빠져나갔다. 그가 현관 문을 열고 나갈 때까지, 실비아와 올리버의 활기차게 떠드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조금 씁쓸하게 웃으며 올리버는 기름등불의 갓을 살짝 들어올리고 마침내 어둠이 내려앉은 밤나무 숲 속으로 걸어들어갔다. 모처럼 만난것도 인연인데, 이대로 계속 사이좋게 지내면 좋을 것을. 입 안에서 쓴 맛을 느끼며, 올리버는 그곳에서 있을리 없는 벼락맞은 나무를 찾기 시작했다. 불나무 껍질을 찾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우연히 무슨 기적이라도 일어나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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